116화
“가장 먼저 의회에서 에쉬 로렌스와 연계된 자들의 의석을 뺏고 그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의회에 들어간다면 카닉 일족을 대표할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이글린이 입을 열었다.
“일족을 사랑하는 저야 감사한 마음이지만, 바이올렛이 가장 잘 알잖아요, 왜 그게 안 되는지.”
“왜 안 돼?”
윈터가 묻자 이글린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의회 의원은 가문 세습이잖습니까.”
“아, 그랬지. 망할, 내가 공작 작위를 받아도 블루밍 가문 의석은 디에브 놈에게 가겠군.”
윈터가 이제 떠올랐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바이올렛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총 의석은 열여덟 개고 로렌스 가문 사람이 3석, 남부 귀족 워호슨이 6석, 북부 귀족 보네스가 6석, 그 외의 명문가가 3석을 가지고 있죠. 나는 그중 로렌스 가문 세 명을 의회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안잘리를 제외한 셋의 눈이 커졌다. 반면 안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스 가문은 왕가라 적장자만은 못해도 직계 자손들의 발언권이 강하니까요. 부인께서 설득하신다면 가능할 수 있겠군요.”
“네,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해체되었더라도 왕실이던 로렌스 가문이 의회와 완벽히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에쉬가 여전히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잖아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귀족이 아닌 세 사람은 두 사람의 대화를 경악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러자 안잘리가 의아한 얼굴로 윈터에게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부인께서는 급진적이시라고. 이방인 혼혈 서자를 후계자로 올리시려는 것만큼 놀랍지는 않은데요. 의원직이 선출직으로 바뀐 국가들이 제법 있습니다. 오히려 라크라운드가 지나치게 혈연 중심의 국가라 늦은 셈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윈터가 하옐에게 말했다.
“남부 사업을 회수하는 것에 명분 붙이기 좋아 보이는데. 카닉사는 워호슨의 이득만을 생각해 소작 관리인을 없애는 정책을 반대하기 때문인 걸로.”
“제 생각에도 타이밍이 좋아 보여요. 공동 부대표님 두 분은?”
하옐이 돌아보자 둘 다 의견이 일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은 고급 호텔업을 하는 이들이 귀족 사회 이상으로 대외적 이미지에 더 신경 쓰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소수의 귀족을 제외한 부르주아를 노린 그들의 선구안은 틀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이라 이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잘리가 담담히 말했다.
“그럼 회의 준비하겠습니다.”
“아, 또 밤샘이네. 사표 내야겠다.”
이글린이 괴로워하자 안잘리가 그녀를 따라 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사표 좀 그만 내. 수습하기 힘들어.”
“입으론 그렇게 말하면서 몸으론 수습해 줄 거잖아.”
“무슨 의미지?”
“성희롱이야. 책 좀 읽어, 안잘리.”
“그게 왜?”
안잘리가 의아해하며 회의 준비를 위해 이글린과 떠나고 하옐 역시 회사로 전신을 보내기 위해 달려 나갔다.
거실이 조용해지자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에서 커피를 뺏었다.
“당신은 이쯤 하고 자.”
“다들 지금부터 회의 준비하잖아요. 나도 있겠어요.”
“공주님이 무슨 밤샘을 해.”
윈터가 말하더니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저 혼자 쉰다는 걸 영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내에게 핀잔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난 당신을 고용한 적이 없어. 회의는 내 회사 사람들과 할 거라고.”
“매정하군요.”
“억울하면 입사해. 이왕이면…….”
어느 업무가 어울릴지 추천하려던 윈터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음탕한 생각밖에 안 나니 그만둬야겠군.”
“업무에 왜 그런 생각이 들죠?”
“지금 내 머릿속이 그래. 여기 오자마자부터 당신이 날 유혹했잖아. 당신이 내 앞에서 블라우스를 벗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고.”
윈터가 툴툴거리며 침실로 들어섰다. 그러더니 그대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사이 잠옷으로 갈아입은 바이올렛이 말했다.
“잘 거면 잠옷 입어요.”
“못 자. 회의해야지.”
“아, 그렇군요.”
“이리 와. 당신 잠들면 다시 나갈 거야.”
윈터가 끌어당기자 바이올렛이 난처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겼다.
약식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정장 차림을 한 남자의 품에 잠옷 차림으로 안기려니 뭔가 잘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돌아가서도 침실을 같이 쓰는 건 어때?”
“싫어요.”
“왜? 그 정도로 날 좋아하진 않아서?”
“그렇지 않아요. 정말 좋아한단 말이에요.”
바이올렛이 살짝 욱해서 말하자 윈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시니 믿어 드려야겠군.”
윈터가 놀리듯 말하고는 그녀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품에 묻어 두고 아이 재우듯 등을 다독였다. 바이올렛은 이게 무슨 짓인가, 난감해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하옐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 준비 끝났습니다.”
윈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새근새근 잠이 든 아내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아 한참 뜸을 들였다.
“내가 돈을 미치게 좋아하긴 좋아하나 보네. 이런 공주님을 집에 두고 어떻게 일할 생각을 했지?”
그는 처음으로 제 모짊에 놀라며 혀를 찼다.
자꾸만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제게 얼마나 큰 벌이 될까. 여기서 깼는데 바이올렛이 없으면.
그는 아직도 바이올렛이 사실은 오래전에 정말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는 순간적인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침실은 따로 써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자다 깨서도 몇 번을 미친놈처럼 아내가 정말 곁에 있는 게 맞나 확인할지 몰랐다.
아이가 있다면 나아질 텐데, 하는 생각을 윈터는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해서 떠올렸다.
입양도 좋을 것 같지만 아내를 닮은 아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녀가 사라지는 망상을 덜 하게 될 것 같았다.
아내는 그만큼 아이를 원하니까.
*
그날 새벽부터 계승식 전 마지막 아침까지도 레이크하우스의 1층에서는 끊임없는 회의가 이어졌다. 툭하면 고성이 오가서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면 회의 분위기가 매우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게 분위기가 좋은 거라니, 남들이 윈터의 성격을 저보다 훨씬 악랄하게 여기는 게 이해가 갔다.
아침 일찍 눈을 뜬 바이올렛은 곁에 윈터가 없음을 알고 우선 가져온 크림색 블라우스와 장밋빛 스커트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2층 계단을 걸어 1층으로 향했다.
여지없이 직원 열 명 정도가 1층에 너부러져 잠들어 있었고, 윈터는 아예 소파에 그대로 누워 정장 재킷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 있었다.
남부에서 사업을 정리하는 것은 보통 큰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아마 한 달 이상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었다.
바이올렛은 남편이 들어오지 않았던 지난 3년이 늘 이런 식이었을까, 생각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별장지기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뭐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아침 식사는 넉넉히 준비가 되었는가?”
“예, 충분히 준비했지만 잠이 더 필요하신 듯하여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그렇겠네.”
바이올렛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벽장에서 담요를 꺼내 직원들에게 하나씩 덮어 주고 남편에게는 침실에서 제 담요를 가져다가 덮어 주었다. 하도 밤을 새워서 그 와중에 아무도 깨질 않았는데, 윈터만 손을 올려 얼굴을 덮었던 재킷을 치우고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이 다정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미안해요, 내가 깨웠어요?”
윈터가 잠이 덜 깼는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바이올렛이 손을 뻗어 윈터의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전야제 전에 면도해요.”
“…….”
“윈터?”
“……나랑 평생 같이 살 거지?”
“네?”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별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다시 재킷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 다시 잠을 청했다.
바이올렛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보지 못할 텐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레이크하우스를 나섰다.
평생 같이 살 거냐고 묻던 윈터의 목소리 때문에 아침부터 심장이 콩닥콩닥거렸다.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그녀가 진정하는 사이 간단한 아침 식사를 챙겨 따라 나온 젠이 말했다.
“얼른 배로 가요, 작은 마님.”
“응? 응, 그래.”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까지도 바빠진 통에 바이올렛은 이곳에 온 이후 젠과 함께 배에 타서 아침 식사를 즐겼는데, 그게 젠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모양이었다.
배 위에서 플립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닉사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오니 그도 함께 왔던 참이었다.
“플립, 호텔 일은 할 만한가?”
바이올렛이 반가워하며 말하자 플립이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는 그녀가 배에 탈 수 있게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할 만합니다.”
말주변 없는 그의 짧은 대답에 젠이 옆에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다들 플립에게 일 배우고 싶어서 난리예요. 인기 엄청 많거든요.”
“그, 그 정도는…….”
플립이 당황해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피했다. 바이올렛이 웃는 소리를 듣고는 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이 배를 타자 그가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젠이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호수와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했다.
“어쩜 이렇게 날씨가 좋죠? 여긴 북쪽이고 숲이라 덥지도 않네요.”
“그러게, 정말 날씨가 좋구나.”
플립은 두 사람이 호수를 즐길 수 있도록 일부러 아주 천천히 배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호수에서 물고기만 파닥거려도 까르륵 웃음이 터졌다.
젠이 호수 한가운데에 도착하자 꾹꾹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정말 궁금했는데요, 대표님이랑 작은 마님은 어떻게 몸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자 옆에서 플립이 자기도 궁금했다는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 두 사람도, 하옐도 몸이 바뀌는 것에 대하여 함구한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바이올렛은 그들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 일만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비밀로 해야겠구나.”
“에이…… 하지만 그러실 줄 알았어요.”
젠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신이 나서 다른 이야기를 재잘재잘거렸다.
호수에는 그들 말고도 다른 귀족 가문의 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다들 커다란 파라솔로 시야를 가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쳤는데 인사를 하지 않는 건 무례하고, 아침 식사는 조용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는 별장지기가 구운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간단히 만든 것인데도 별장지기의 특별 소스가 들어가 수도에 돌아간 후에도 이 맛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배를 타고 호수를 지나던 바이올렛은 익숙한 노랫소리에 잠시 파라솔을 걷었다. 호수 맞은편에 칼슨이 있었다.
그는 쾌활한 얼굴로 노래를 선보이고 있었고, 지나가던 하녀들은 물론 귀족들까지도 즐겁게 그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젠이 소곤거렸다.
“로우 가문도 굉장한 가문이죠? 작은 마님께 혼담을 넣었던 가문이니까.”
“응, 부유한 가문이지. 거의 모든 극장과 가수들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예술가 가문이네요. 아, 들으셨어요? 얼마 전부터 사진을 연결해서 연극처럼 상연을 한대요.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도 하고요.”
“그러니? 신기해라.”
요즘 사진기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 젠이 재잘재잘거리자 바이올렛이 신문물에 관심 있어 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칼슨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칼슨의 허리에 총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사람에게 무기를 쥐여 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현재로서는 귀족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바이올렛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