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하옐의 능청에 바이올렛이 즐겁게 웃음을 지었다.
윈터는 진심으로 하옐의 멱살을 쥐어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즉시 바이올렛에게 일러바칠 테니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그를 보며 손등이 위로 가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행동에 윈터는 하옐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아내의 손을 잡아 마차에 타게 에스코트하고 저도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가 와서 문을 닫자마자 윈터가 아내의 손을 당겨 제 허리에 감게 했다. 그러곤 바이올렛의 다리를 끌어다 제 무릎에 올리고 구두를 벗겨 내려놓았다.
바이올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짓이죠?”
“떨어져 앉기 싫어서.”
“하녀들이 날 장난감 다루듯 한다면서요. 그걸 기준으로 해고한다면 당신부터 해고해야겠군요.”
“말이 심하네.”
윈터가 한 귀로 흘려 넘기고 바이올렛을 두 팔로 감아 안았다. 바이올렛이 기가 차서 그의 팔을 밀어냈다.
“하루 종일 달라붙어 있을 생각이에요?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했는데 왜 당신이 이래요?”
“원래 이러고 싶었어. 당신이 날 미워하는 줄 알고 못 했던 거지.”
그녀는 지금 제 상태를 보았다. 두 다리를 남편의 무릎과 교차해 올리고 벽에 등을 기댄 제 모습이 낯설었다.
바이올렛이 한숨 쉬며 윈터를 흘겼다.
“도대체 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있게 하는 거죠?”
“보통 사람들은 이게 편한 자세라고 생각해.”
“나는 아주 어릴 때도 이런 자세로 앉아 본 적이 없는걸요.”
“남편을 잘못 만났군, 가엽게도.”
윈터가 놀리듯 말하자 바이올렛이 한숨을 깊게 쉬었다. 윈터는 두 다리를 맞은편 의자에 얹고 있었고, 그의 말대로 그것이 그의 가장 편한 자세로 보였다.
바이올렛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남부 사업을 정리하면 당신에게 타격이 크겠군요.”
“아까는 농담이었어. 부동산을 정리하면 현금이 많아지지. 그뿐이야.”
“그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요. 반발이 아주 심할 거예요.”
“그 정도는 생각했어. 애초부터 내 사업 기반을 남부에서 수도로 옮기려고 했었고. 이게 손해만 보는 장사였으면 우리 집에 카닉사 직원 놈들이 전부 몰려와서 뜯어말렸지.”
“하지만 당신이 블루밍 공작이 되면 남부에서 살아야 할지 모르는데요?”
“왜?”
“블루밍 공작가는 남부에 영지를 두는 남부의 가문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이해가 안 되는지 인상을 썼다가 곧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하옐이 미리 챙겨 준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십자말풀이 해.”
“고마워요.”
“이해가 안 가는군. 어떻게 취미가 십자말풀이지?”
“그러는 당신 취미는 옷 다리기라면서요.”
“그건 얻는 게 있잖아.”
“십자말풀이도 얻는 게 있어요.”
부부는 여전히 서로에 대해 이해 못 하는 부분이 산더미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제 치마를 보며 말했다.
“구겨졌잖아요. 당신이 다려 준 게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그래?”
“아주 많이요.”
“도착하면 내가 다시 다려 줄 테니까 맘껏 구겨.”
윈터의 눈꼬리가 우쭐하게 휘어졌다.
바이올렛은 그런 남편이 웬일로 귀엽다고 생각하며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십자말풀이를 하기 전에 앞선 기사들을 찬찬히 읽다가 눈이 커졌다.
그리고 서둘러 윈터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이것 좀 봐요, 윈터.”
“뭔데…… 아, 이 미친.”
윈터가 신문을 구겨 쥐고 미간을 좁혔다.
의회에서 낸 기사였다.
선왕 폐하의 제1후계자, 에쉬 로렌스는 실패한 국책을 해결하려, 소작 관리인 제도를 폐지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윈터가 혀를 차고 신문을 바이올렛에게 돌려준 후 몸을 뒤로 기댔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엔나 부인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군요. 만찬장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고 들었어요.”
“그랬군.”
“거기에…… 당신이 남부에서 사업을 회수하려 하니 워호슨들이 재촉해 급하게 기사부터 냈을 거고요.”
그러자 윈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먼저 선수 친 것처럼 됐네. 잘됐다고 해야 하나.”
*
선왕의 국책은 매우 거대한 규모를 가졌다. 그것은 라크라운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커다란 파도였고, 순간 나라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크기의 변화였다.
그 국책 중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가 영지민의 이주였는데, 이전까지 영지민이 이주하기 위해서는 그 땅을 소유하는 가문에게 이주 3개월 전에 미리 알려야 했다. 그것을 원하는 시기에 언제든 이주할 수 있게 하였다.
두 번째는 소작료였는데, 이전에는 땅의 주인이 마음대로 그 땅의 소작료를 정하게 하던 것을 이제는 평야마다 소작료 관리인을 두고 땅의 세금을 부과하는 동시에 소작료를 자기 마음대로 책정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했다. 소작인들은 여전히 적지 않은 돈을 땅의 주인에게 지불하고 있었지만 벌어들인 돈도 모자라 살림살이까지 빼앗기거나, 불시에 소작료를 올리겠다 협박당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으로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남부의 비옥한 평야를 소유한 워호슨들이었다. 여전히 저희가 가진 땅으로 부유한 생활을 영유할 수 있었으나, 이 법은 그들을 매우 배 아프게 했다.
워호슨들은 소작농들에게 이 법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저희가 전부 망해 버릴 것이고, 소작농들은 더 이상 소작할 땅을 얻지 못할 거라는 논지였다.
실제로 라크라운드 왕실은 이 변화를 추진하기 위해 몇 년째 큰 적자를 보고 있었고, 여러 귀족 가문이 몰락하며 경기가 침체 되었다. 그 위기를 틈타 윈터 블루밍 같은 사업가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위력을 늘려 가고 있었으나, 그 외의 소작농들에게는 그저 실시간으로 닥치는 불황일 뿐이었다.
위험을 느낀 소작농들은 왕성으로 달려가 실패한 왕에게 책임을 촉구했다.
칼슨과 혼담이 오가던 바이올렛이 급한 결정으로 윈터와 결혼하기 위해 남부로 가던 무렵의 일이었다.
*
윈터는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황당하긴 하지만 별수 없지. 이 정도 난리는 나도 몇 번이나 겪었어. 어차피 우린 손해 볼 것도 없고.”
윈터의 냉정한 말에 바이올렛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라운드에 불황을 가져온 국책이었다.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다면 그녀도 도리가 없다고, 잠시 생각했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에쉬 그 놈 참 악랄하군. 소작료를 쥐어짤 기회를 다시 열어서 귀족들의 지지를 확실하게 얻겠다는 건가? 제 아버지 뜻을 뒤집어서라도?”
“그런 모양이네요.”
바이올렛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표정에 윈터가 실없이 웃었다.
“왜, 결혼까지 해 가며 지킨 게 바뀌는 게 싫어?”
“모르겠어요. 그냥…….”
바이올렛이 잠시 더 생각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몸을 바로 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십자말풀이도 하지 않았다.
윈터는 별말 없이, 제 쪽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게 꽤 길어지고, 바이올렛이 잠깐 자세를 움직이다가 윈터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보았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대답이 충분히 됐던가요?”
“전혀. 궁금해 죽어 버리겠어. 누가 나 좀 기절시켜서 당신이 대답할 마음이 들 때 깨워 줬으면 좋겠군.”
기다렸다는 듯 내뱉는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게 궁금했는데 왜 보고만 있어요, 당신답지 않게?”
“당신은 원래 생각하는 데 오래 걸리는 사람이잖아. 좋게 말하면 신중한데 나쁘게 말하면 사람 피를 말려.”
“……내가 그랬군요. 몰랐어요.”
“천천히 생각해. 난 이제 슬슬 적응하고 있으니까.”
윈터가 말하더니 그 상태로 스르륵 미끄러져 바이올렛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바이올렛이 놀라는 게 느껴졌으나 모른 척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당신도 생각보다 되게 까다로운 사람이야. 나처럼 대충이라도 길들인 남편과 사는 게 속 편할걸.”
“길들이다니요. 사람에게 쓰기 적절한 표현은 아니에요.”
“그래, 그래. 우리 공주님은 진지한 게 매력이지.”
윈터가 흘려 넘기며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다 제 눈을 덮게 했다.
이러려고 마차를 큰 걸 샀나, 싶었다. 그의 상체는 수용할 길이의 의자였고, 다리는 불편해 보였으나 그럭저럭 바닥으로 구겨 넣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다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윈터가 입을 열었다.
“날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
“네?”
“필요한 거 있으면 해달라고 하라고. 사달라고 하든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게요.”
그녀의 대답에 윈터가 만족했는지 하품을 하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잠들지 않아서 언제까지고 그녀의 다리에 무게가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
북부 별장에 도착해 보니 계승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전에 왔을 때와 달리 여름 기운이 완연한 호수는 다이아몬드 가루를 흩뿌려 놓은 것처럼 햇살에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호수를 둘러싼 숲의 냄새에 바이올렛이 황홀해하며 윈터에게 말했다.
“겨울에 눈이 와도 정말 근사할 것 같아요.”
“근사하지.”
윈터가 두 사람의 숙소인 레이크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이 별장의 주인으로 손님들을 대우하기 위하여 대강당 건물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았다.
레이크하우스 앞에 묶여 있는 작은 조각배를 발견하고 바이올렛의 입이 절로 열렸다.
“배로 이동하는구나…….”
유리 같은 호수 위를 떠갈 배는 하늘색으로 칠이 되어 있었고, 한쪽에 카닉사의 로고가 적혀 있었으며, 그 안은 매일매일 새로운 꽃들로 채워졌다.
그녀가 조각배에 감탄하는 사이 윈터는 오기 전부터 미리 준비하게 한 초콜릿 상자 하나를 하인에게 받아 챙겼다.
그러곤 배에 타라는 듯 바이올렛의 한 손을 잡아주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잡아 들고 배 안에 한 발을 넣었다.
생각보다 배가 흔들리지 않아 다른 한 발도 안으로 넣어 보니 꽃향기가 진동을 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윈터가 밧줄을 풀어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보이며 말했다.
“이 근처에 아주 유명한 초콜릿 장인이 있어.”
“어머, 예뻐라.”
각종 초콜릿들이 상자에 칸칸이 나뉘어 담겨 있었다. 바이올렛이 장갑을 벗고 고민하다가 라즈베리가 올라가 있는 초콜릿을 집어 입에 넣었다. 속에 잼이 들어 있어 입 안에 사르르 흘러내렸다.
바이올렛이 웃음을 지었다.
“맛있어요. 당신도 먹어요.”
“골라 줘.”
윈터가 말하더니 넣으라고 입을 벌려 보였다. 바이올렛이 난처해하다가 가장 달아 보이는 초콜릿을 꺼내 입에 넣어 주었다. 윈터는 초콜릿을 녹여 먹으며 노를 저어 레이크하우스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호수 끝에 있는 하얀 꽃나무 숲이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어 호수로 늘어지고, 몇몇 긴 줄기는 잠겨 있기까지 한 꽃나무들을 바라보았다.
“황홀한 곳이군요.”
“혹시 내가 먼저 죽어도 팔아먹지 마. 자손 대대로 물려주라고.”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혔다.
“다시 말하지만 다른 남자와 만날 생각 없어요.”
“입양도 괜찮지.”
“……좋은 생각이네요, 그건.”
바이올렛 역시 생각해 본 일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이야기가 나오니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게 되었다. 그리고 설명할 방법이 없어 윈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윈터는 아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늘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아직도 아내가 저를 버릴까 두려워 바이올렛의 팔목을 꽉 잡고 있었다.
반면, 바이올렛의 머릿속은 부부관계의 횟수를 늘리자는 말을 어떻게 해야 무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