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할게요. 당신의 의견.”
“정말이야?”
“네, 정말. 당신을 보니…….”
화난 표정을 지으려던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정말로 이게 사랑일 수도 있겠네요.”
“믿어 주는 건가?”
“아뇨, 완전히는 아니에요. 고려하겠다고 했잖아요.”
“충분해.”
윈터는 곧바로 2층 바이올렛의 곁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아내의 허리를 팔로 감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어때, 나 없이 잘 잤어?”
“네, 당신은요?”
“잠이 올 리가 있나. 당신이 갑자기 돌아올까 봐 술도 못 마셨어.”
“안 마셨어요?”
“전혀.”
윈터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잃어버렸던 주인을 되찾은 강아지처럼 그녀의 어깨에 어떻게든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타박하듯 말했다.
“당신을 믿는 건 아니라니까. 벌써 다 해결된 것처럼 굴지 말아요.”
“누가 해결됐다고 했나. 서로 이해해 보기 시작하는 거지. 난 당신의 사랑을, 당신은 나의 사랑을.”
윈터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바이올렛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의 빠른 맥박이 바이올렛에게도 전해져 울렸다.
부부는 여전히 상대의 감정을 믿지 않았고, 불안함과 기쁨, 알 수 없는 슬픔과 집착을 동시에 느꼈다.
두 사람은 아마 그런 것이 첫 사랑인 게라고 생각했다.
*
제임스 블루밍은 동생이 다급하게 호텔로 보낸 전신에 수도 사교계 행사를 다닐 정신도 없이 남부에 도착한 참이었다.
카닉사와 일하던 블루밍 가문 사람들이 전부 해고당했습니다, 형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가 블루밍 가문의 커다란 회의실에 도착해 보니 블루밍 가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임스가 나타나자마자 그의 동생인 드루가 달려왔다.
“형님, 갑자기 카닉사에서 앞으로는 우리와 일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오?”
그의 말에 제임스가 한숨을 쉬었다.
“윈터 이 녀석이 우리에게 당장 작위를 주지 않으면 남부 전체에서 사업을 정리하겠다더군.”
“그, 그래서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드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요? 형님! 우리 다 죽일 일 있소!”
언성이 높아진 것은 드루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숙부들까지 나서서 작위를 물려받은 제임스로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러다 우리 가문을 죽이려는 게냐!”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숙부님! 윈터는 캐서린의 아이가 아니니, 캐서린이 당연히 반대하지요!”
제임스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윈터 녀석과 얼마나 연계가 되신 겁니까?”
“얼마나? 가주인 네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는 게냐? 네가 영지에서 많은 부분을 윈터에게 팔고부터 블루밍 가문이라면 먼 친척까지도 그 녀석의 사업에 발을 걸치고 있어.”
“도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셨습니까! 서자에게 의지를 하다니요!”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느냐!”
“맞습니다, 숙부님! 그 서자에게 완전히 의지해서 사신 건 형님이잖소!”
살아오며 들어 본 적 없는 질타에 제임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제임스의 조카인 케이시가 말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윈터 형님이 블루밍 가문을 아껴서 우리에게 자리를 열어 준 것만은 아니란 겁니다. 남부의 종주인 우리 가문 사람으로 연결되면 워호슨 곳곳의 어디라도 손을 뻗을 수 있죠. 실제로도 그 영향력이 남부 전체에 미치고 있고요.”
“이런…….”
집안 살림에 무신경했던 제임스의 얼굴이 차츰 하얗게 질려 갔다. 그제야 그는 처음으로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여태 제가 혈통 나쁜 아들을 거둬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제가 서자가 만들어 준 낙원에서 현실 돌아가는 모습을 전혀 모르고 지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형님, 당장 가서 윈터에게 사과하십시오. 그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드루가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옆에서 다른 블루밍가 사람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사과하라고 한 마디씩을 보탰다.
*
블루밍 가문이 발칵 뒤집혀 있는 사이, 바이올렛 부부는 헤스턴가의 계승식에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은 북부 별장을 어떻게 이용할지 확인하기 위해 사흘 전에 미리 도착해 둘 예정이었다.
윈터의 짐은 어차피 하옐이 다 알아서 챙겨 주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바이올렛의 짐으로 몽땅 꽂혀 있었다. 북부 별장으로 떠나는 날 아침, 그에게는 계획한 일이 있었다.
노크 소리에 윈터가 은밀히 문을 열자 앞에는 눈이 초롱초롱한 젠이 바이올렛이 입고 갈 외출복들을 들고 서 있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대표님!”
“그래.”
“제가 웬만하면 다른 사람한테 우리 작은 마님 물건 안 맡기는데요, 대표님은 믿을 수 있어요. 옷을 정말 기가 막히게 다리시더라고요!”
젠이 바이올렛의 옷을 맡기자 윈터가 그것을 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그는 제 옷도 남이 다리면 어딘가 탐탁지 않아 제가 다시 다릴 때가 있었는데, 하물며 공주님의 옷이었다. 더더욱 꼼꼼하게 다려야만 했다.
전부터도 윈터는 하녀들의 다림질 실력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바이올렛이 다림질이 취미인 남편을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느라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별 쓰레기 같은 짓을 다 저질렀는데도 바이올렛이 좋아한다고 하는 걸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윈터가 제 키에 비해 낮은 다리미판에 맞게 허리를 구부리고 꼼꼼하게 아내의 옷을 다렸다.
그는 옷이 구김 없이 완벽해졌을 때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가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이 듣는다면 당황한 얼굴로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리라.
여자 옷은 다려 본 적이 없어 처음엔 좀 헤맸으나, 그는 긴 취미 생활 경력으로 이내 완벽하게 옷을 다려 냈다.
그가 조용히 문을 열어 스윽 젠에게 옷을 돌려주자 그녀가 감탄했다.
“대단하세요!”
“꺼져.”
“네!”
젠이 쾌활하게 대답한 후 옷을 들고 바이올렛에게 달려가려다 돌아와 물었다.
“대표님이 다리신 거라고 말씀드려도 돼요?”
“……몰래 말해. 남들 알면 당장 해고야.”
“그럼요, 몰래 말씀드릴게요!”
젠이 말하고 신이 나서 달려갔다.
*
바이올렛은 레몬이 든 미온수를 한 컵을 다 마시고도 콩닥거림이 가라앉지 않아 애를 먹는 중이었다.
임신 확률이 낮다면 확률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였다.
여러 번 시도하는 것.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녀는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시도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렇게 시도하자는 말을 남편에게 꺼내는 게 문제였다. 도무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책에서 본 것처럼 옷을 벗고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그녀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할 일이었다.
어떡하나, 어떡하나, 바이올렛이 멍하니 생각하는데 그녀의 허리 리본을 묶던 하녀 하나가 말했다.
“작은 마님, 얼굴이 왜 이렇게 붉으신가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전혀…….”
바이올렛이 말하기도 전에 다른 하녀가 눈이 커져서 말했다.
“어쩐지 아침부터 계속 물을 찾으시고! 정말 아프신 거 아니에요?”
“괜찮아. 너무 건강해서 탈이구나.”
“작은 마님이 언제 건강하셨다고 그러세요?”
“맞아요! 의사 모셔 올게요.”
다들 바이올렛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제 옷을 잠깐 살피더니 말했다.
“정말이다, 내가 딴생각을 하느라. 그보다 오늘따라 옷이 유난히…… 말끔하구나.”
그녀가 알아보자 젠이 옆에서 씨익 웃었다. 바이올렛이 이렇게 말한 걸 윈터에게 알려 주면 그가 신나 할 것이 뻔히 보였다. 그녀가 바이올렛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대표님이 직접 다리셨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대표님이 옷 다리는 게 취미시거든요. 이건 진짜 비밀이에요. 비서님과 저만 알아요.”
바이올렛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로 할게. 말해 줘서 고맙구나.”
회색 블라우스에 검푸른 스커트, 어두운 회색 구두를 신은 바이올렛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보다 굽이 높았지만 발에 아주 잘 맞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옷을 다리다니. 그녀는 자라며 단 한 번도 아내 옷을 다려 주는 귀족 남자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다.
바이올렛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잘 다려 놓으니 원래도 예쁜 옷이 더 예쁘구나.”
“작은 마님이 예쁘신 거예요.”
옆에서 하녀 하나가 못 참고 말하더니 까르륵 웃었다. 바이올렛이 인사치레로 넘기며 같이 웃고 있는데 늘 성질이 급해 그녀의 치장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윈터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저를 돌아보는 바이올렛을 위아래로 훑더니 말했다.
“구두를 왜 벌써 신었어. 가서 신지.”
“옷과 잘 맞는지 보려…… 위, 윈터!”
그는 바이올렛을 휙 안아 들고 돌아섰다. 하녀들이 웃는 소리와 하옐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윈터의 가슴팍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정말?”
“그러게 누가 벌써부터 구두 신고 있으래?”
“남들 보는데…….”
“외부인도 아니고, 다 여기서 일하는 녀석들이 보는데 무슨 상관이야.”
윈터가 짜증스레 투덜거렸다.
“저 하녀들 다 해고하든지 해야지, 당신 치장만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니. 당신이 무슨 자기들 장난감인 줄 아는 거 아냐?”
“한 명이라도 건드려 봐요.”
“건드리면 어쩔 건데.”
“다시 찾아서 고용할 거예요.”
“세상에, 난폭하셔라.”
윈터가 빈정거리며 마차에 도착해 바이올렛을 내려 주었다.
북부 별장까지 갈 마차는 왕도 못 타 봤을 것 같은 거대한 크기였다. 바이올렛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마차를 바라보자 윈터가 말했다.
“이게 자본주의라는 거지. 돈 들이면 들이는 대로 되는 거.”
“충격적이네요…….”
그녀가 말하는데 어느새 가방을 들고 뒤따라온 하옐이 말했다.
“그래도 대표님은 자산에 비해 물욕이 별로 없으셔서요.”
“……그게 무슨 말인가? 물욕이 없어?”
“네. 그래서 사치품이 많이 없으시잖아요.”
“사, 사치품이 없다니?”
“그러니까 자산에 비교하자면요.”
하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적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대표님 자산은 대부분 부동산이니까요.”
윈터가 제 재산이 대부분 호텔 부동산이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남부 부동산을 일부 정리하실 거라 현금이 많아지겠네요.”
하옐의 뼈가 있는 말에 윈터가 무슨 쓸모없는 말을 하냐는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하옐은 잽싸게 바이올렛에게 보고를 이어 갔다.
“대표님께서 워호슨과의 전쟁을 선포하셨거든요.”
전쟁이라 무슨 소리인가, 바이올렛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하옐이 말을 이었다.
“작위를 넘겨주지 않으면 남부에서 사업을 정리하실 거라고 하셨거든요. 이미 하고 계시고요.”
그 말에 바이올렛은 남편이 제 부모와 다투던 날, 제게 매달려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제 부모가 아니라 남부 전체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바이올렛 입장이 난처해졌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니 그가 덤덤히 말했다.
“워호슨 전체가 당신을 따돌리고 괴롭힌 건 사실이잖아.”
“그렇다고 남부 전체에게 싸움을 걸어요?”
“당신은 이 저택과 정원만 있어도 살 수 있잖아. 난 나머지를 다 털어서라도 남부를 가라앉힐 거야.”
“…….”
“그러니 거지가 되면 난 여기서 재워 줬으면 좋겠군. 당신 나 좋아하잖아.”
윈터가 능청을 떨자 바이올렛이 하옐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참 저런 예상하기 어려운 사람과 일하느라 고생이 많네.”
“작은 마님이 계셔서 그럭저럭 버팁니다.”
하옐이 대답하고 우는 시늉을 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