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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12화 (112/176)

112화

“하, 할머니를 찾아왔어요?”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편이 폐를 끼쳤나요?”

그녀다운 질문에 엔나가 웃었다.

“많이 끼쳤지. 하지만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경은 그걸 다 돈으로 보상한다는 걸. 덕분에 세상의 온갖 귀한 술은 다 마셔 봤구나.”

“남편이…… 그랬군요.”

“너에겐 미안하지만…… 그렇게 매일 찾아오니 네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경께 보여준 적이 있었단다.”

그녀는 새로 따른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 표정을 봤다면 그 마음을 알았을 거다. 네가 잘 지낸다는 편지를 읽고 기뻐하면서도, 자기한텐 돈만 부치고 있으니 절망하는 표정을 같이 짓고 있었지.”

“…….”

“더 일찍 찾아가자면 얼마든지 찾아갔을 걸, 네가 원하지 않아서 찾아가지 못한 거야.”

엔나의 말을 듣는 바이올렛의 표정이 복잡했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엔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당장 용서해 주라는 말은 아니란다. 이제 처음 좋아한다는 말에 대답했다고? 아주 몹쓸 남편이로구나.”

엔나의 말에 바이올렛이 조금 웃고 다시 복잡한 얼굴로 돌아왔다.

바이올렛은 사흘 정도 엔나의 집에 머무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엔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생각은 서랍장을 정리하듯 차곡차곡 정리되어 갔다.

사흘 뒤 아침, 바이올렛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마차 앞까지 바이올렛을 배웅 나온 엔나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알아둘 것이 있단다. 에쉬 로렌스가 의회 사람들과 자주 사냥을 다닌다는 소식이 있더구나. 꿍꿍이가 있는 게지.”

“아…… 그렇군요. 저와 헤스턴 가문의 결혼이 무산되었으니.”

“만찬 자리에서 잠깐 흘러나온 이야기로 봤을 때 선왕 폐하의 국책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게 아닐까, 싶구나.”

“…….”

“내가 알게 되는 게 있으면 바로 연락하마.”

“감사합니다, 할머니.”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자, 엔나가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네가 있어서 좋았는데. 너와 함께 온 사람들도 다들 어찌나 성실하고 잘 웃는지…….”

그녀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꼭 쥔 바이올렛의 손을 놓지 않았다. 바이올렛 역시 가기 싫은 얼굴로 엔나의 손을 같이 꼭 잡았다. 그러다 못 참고 엔나를 와락 끌어안자, 엔나가 바이올렛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구나, 바이올렛.”

“저는 이미 행복해요.”

“더 많이.”

엔나가 말하며 아쉬운 얼굴로 그녀를 보냈다.

바이올렛은 엔나가 반듯한 걸음으로 다시 화원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녀의 짐을 싣는 것을 관리하던 젠이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작은 마님, 할린 도련님이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러니?”

바이올렛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할린이 쭈뼛거리며 문 앞에 섰다.

“자,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알리카로 돌아가기 전에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린이 마차에 타 문을 닫았다.

잠시 두 사람만 마차에 남게 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리지 않은 말씀이 있습니다. 형님께 말씀드렸다가는 난리가 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던 것이……. 하지만 젠 님을 비롯해서 다른 하녀님들과 이야기해 보니 아무래도 작은 마님…… 아니, 부인께서는 침착하게 받아들여 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어떤 말이오?”

바이올렛이 가만히 묻자 할린이 그녀를 바로 볼 엄두도 못 내고 제 무릎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건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말이라는 걸 꼭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책에서 찾아본 내용으로, 몸이 바뀌는 것은 같은 일족의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일족?”

“네. 그 부분이 이상해서요.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은 같은 일족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몸이 바뀌었다는 건 아무래도…….”

“아무래도?”

처음엔 할린과 절대 가까워지지 않으려 애쓰던 바이올렛이 궁금함을 감추지 못해 재촉하듯 물었다. 그녀의 오밀조밀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게 불편했던 할린이 문 쪽으로 엉덩이를 바짝 붙이며 말했다.

“제 추측이고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지만, 두 분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아주 있을 수 없는 얘기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러니까 확률이 아주 낮지만요!”

“아무튼 확률이…… 있기는 하다는 거요?”

“정말 제 생각입니다. 혹시 너무 기대하실까 봐…….”

할린의 조심스러움에 바이올렛이 떨리는 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임신인 줄 알았다가 아니란 걸 알았던 적이 있소. 기대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나도 알고 있소.”

그녀의 말에 할린이 멈칫했다가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두 사람 사이에 제가 지금까지 안 것보다 훨씬 많은 서러움이 쌓여 있음을, 할린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바이올렛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아, 아닙니다! 저희 쌍둥이 때문에 대표님…… 아니, 윈터 경께서 상처만 더 커지셨을 겁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이 목숨은 두 분 겁니다.”

할린이 진심으로 말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고맙게 받겠소. 돌아갈 기차표는 구했고?”

“구했습니다. 음…… 더 찾아지는 정보가 있으면 가져오겠습니다. 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카닉 일족 문신 중에 부부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신이 있습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거라면 이전에 받아 본 적이 있소.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건 원래 영구적으로 하는 문신이 아닙니다! 임신을…… 기원하는 주술성 의미가 있거든요. 일족이 아닌 배우자에게 사용하는 문양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거였소?”

“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할린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라크라운드의 왕족이 이방인의 문신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제 이부 형은 아예 세상의 중심이 아내인 것 같으니 말할 것도 없고 사용인들마저 제 작은 마님 이야기만 나오면 구구절절 애정을 표현하는 이유를 할린은 알 것 같았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시오.”

“네!”

할린이 떠나자 젠이 마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작은 마님?”

“아주 좋은 얘기였어.”

“그래 보이시네요. 아, 지금부터 대표님께 화내러 가시는 거 아니에요? 빨리 무서운 표정 지으세요. 이렇게 기쁜 표정 지으시면 화 다 풀린 줄 아실 거예요.”

“아, 그래야겠네.”

바이올렛은 그리 말했으나, 그녀의 얼굴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

바이올렛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윈터는 가장 좋은 옷을 빼입고 마차 오는 방향을 몇 시간째 바라보던 참이었다.

드디어 바이올렛이 탄 마차가 바로 앞에 멈춰 서자 윈터가 마차로 향했다. 그런데 마차가 멈추지 않고 저택을 빙 돌아 바로 정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젠장.”

윈터가 다급하게 돌아가 저택을 가로질러 정원으로 향했다. 거의 다 나았다고는 해도 아직 뛸 정도는 아닌지라 윈터의 걸음 속도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 걸어 정원에 도착했을 때 바이올렛은 이미 침실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윈터는 아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그녀가 곧 다시 발코니로 나오리라 확신했다.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그녀의 눈에 띄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들이 사정없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 적은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것만은 그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윈터는 제가 감히 그녀를 원한다 말해도 될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제가 몇 번이나 아내를 죽게 했는데, 주제를 모르고.

아내는 왜 그럼에도 저에게 좋다고 말했을까. 그녀는 왜 이리 순진할까.

세상에 저보다 나은 남자가 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왜 하필 저처럼 무례하고 혈통도 비루한 자에게 좋다고 말해 주나.

그는 여전히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아내에게 저 역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발코니를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보는데 다행히 바이올렛이 걸어 나왔다.

바이올렛은 정작 저를 기다리는 윈터를 발견하고 머리가 하얘져 정원으로 마차를 돌리라 한 차였다. 윈터가 정원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 몰라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윈터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이올렛, 내가 사흘 내내 생각해 봤는데.”

“…….”

“난 처음 당신을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아. 그때 그 기분을 지금도 그대로 느껴.”

“……천사 같아요?”

바이올렛이 긴장을 풀어보려 건넨 농담에 다행히 윈터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 속에는 애타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천사 같지.”

“그랬군요.”

바이올렛이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나와 사는 3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돈보다 우선한 적이 없었어요.”

“그랬지.”

윈터가 순순히 대꾸하고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이건 믿어 줘. 돈이 목적이었던 게 아니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날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지.”

“…….”

“당신도 마찬가지야. 당신 말이 맞아. 난 사람을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몰라. 묶어 둘 줄만 알아. 돈으로 현혹하길 바라. 우리가 처음 결혼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래.”

“…….”

“바이올렛, 나는 원래 그래.”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말이지 가망이 없는 남자였다.

“그렇군요. 이해해요.”

“이해하란 소리가 아니야.”

“그럼요?”

“사랑해 줘.”

“…….”

“날 좀 더 사랑해 줘.”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뭐라 할 말을 잊고 입을 다물었다. 윈터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발코니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미 내가 좋다며. 내가 돈으로 현혹하지 않아도, 그냥 내가 좋은 거 아닌가?”

“……당신은 정말로 나빠요.”

“난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었던 적 없어. 그래도 당신은 날 좋아한다며.”

“…….”

“바이올렛, 날 봐 봐. 내가 사는 꼴을 좀 봐.”

윈터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아니었다고, 날 버렸던 당신이 돌아오기만 멍청하게 기다리며 꼴 같지 않게 정원을 가꾸는 놈이 내가 아니었다고 가정해 봐.”

“…….”

“그 남자는 일반적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일 거야.”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는 윈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제가 바라는 것에 맞춰 삐딱하던 걸음걸이를 정갈하게 바꿔 가고, 그의 뒤로는 두 대륙을 통틀어도 없을 정원이 있었다. 제가 정원을 좋아했으니까.

세상에 유일한 가족이라 믿던 부모와 연을 끊고는 술을 마시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그가 설령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고 해도.

설령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말대로. 물질적으로,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까.

적어도 윈터 블루밍에게는 이것이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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