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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11화 (111/176)
  • 111화

    윈터는 열두 살이 되어서야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단맛이었다.

    식당에서 뛰쳐나온 열두 살 한 해 동안, 그는 죽을 고비 넘겨가며 세상을 방황했다.

    먹을 것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길에서 근사한 교복을 입은 또래 아이들을 볼 때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고급스럽게 빛나는 정장식 교복 차림의 아이들만 보면 윈터는 불길이라도 피하듯 저 멀리 되돌아가곤 했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상점에서 화려하게 과일이 장식된 트라이플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윈터는 그걸 부러워하면서도 디저트의 맛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블루밍 가문에 들어온 첫날 그의 앞에 놓인 것도 트라이플이었다. 윈터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어 보았다.

    그때의 강렬한 달콤함, 부드러움, 질 좋은 과일들이 주는 풍부한 향은 영원히 그의 기억 한 구석에 박혔다.

    나도 이제 그 아이들처럼 되는 거구나. 넝마 대신 그 아이들처럼 옷을 입고, 맞으며 일을 하는 대신 그 아이들처럼 앉아서 여유 부리고.

    “맛이 있니?”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캐서린이 다정히 물었다.

    다섯 살에 떠난 어머니 말고는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없었다.

    아마 맛이 있냐고 묻는 것은 어머니들의 질문인 듯하다고, 그날의 윈터는 생각했다.

    나는 이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저를 받아 준 부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윈터는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좋은 옷을 입혀 앉혀 놓고 트라이플을 내준 것, 그리고 맛이 있냐는 질문도 사랑해야만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제가 아는 사랑의 초라함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바이올렛이 망가져 가던 무렵이었고, 그녀가 제 앞에서 총을 쏘았을 때는 저 따위는 무슨 짓을 해도 아내의 영혼을 갈아 없애는 꼴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와 재회한 이후, 그녀가 제 앞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저를 마음에서 지웠기 때문이라고, 윈터는 확신했었다.

    온전히 아내를 위해 제 부모를 잘라내면서도 그는 바이올렛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뿐이리라 여기던 때였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윈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정말 많이.”

    그러고는 제가 들어도 멍청이 같은 목소리를 냈다.

    “……뭐?”

    술이 갑자기 확 깼다.

    바이올렛은 그가 제 말에 반응할지 몰랐는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담담히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어, 나도.”

    그의 대답에 바이올렛이 쓰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자요.”

    “왜 말이 안 돼. 사랑해, 나도.”

    “자라니까요.”

    바이올렛이 윈터를 밀어냈다.

    “이럴 줄 알았어요.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당신도 그렇게 쉽게 대답할 줄 알고 있었어요. 내가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이제 와서. 나는 이렇게 힘들게 말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쉽게.”

    그녀가 조금씩 떨려오는 목소리로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윈터가 서둘러 그녀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매번 과거형이었잖아. 이번에 처음 현재 진행형이었고.”

    “그래서요? 내가 과거형으로 말하면 당신은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아요. 그게 어떤 마음인지 이해도 못 하잖아요.”

    윈터는 바이올렛의 말에 자리에 멈춰 섰다.

    아내가 보기에, 나의 이 마음은 정말로 사랑이 아닌 건가.

    그는 여전히 제 초라함이 아내를 상처 입히는 것이 두려웠다.

    바이올렛은 대답 없는 윈터를 씁쓸히 바라보다 침실을 나가 버렸다.

    *

    윈터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들이 미친 듯이 왕성해져서 알코올을 분해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지금부터 제가 뭘 해야 하나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윈터가 얼떨결에 들어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그 말을 다시 떠올리곤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경악하다가 정신없이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아내의 방 문을 두들겼다.

    “바이올렛.”

    대답이 없어 몇 번 더 불러 봤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려 했지만 걸쇠로 잠가 두어 열리지 않았다. 문을 잠그는 법이 별로 없는 바이올렛이 문을 잠가 버린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바이올렛, 제발.”

    그가 애원하자 겨우 걸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틀 너머에서 바라보는 바이올렛의 눈동자가 쌀쌀했다.

    그 표정을 보니 윈터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바이올렛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공주님께서는 모종의 이유나 목적 때문에 결혼했다 하더라도 배우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가지고 계실 테니까.

    그건 성애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인류애에 가까우리라, 윈터는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심장이 너무 펄떡거려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바이올렛이 화가 나 있는데도 그 펄떡거림이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방금 전 침실에서 바이올렛이 한 질문을 이번에는 윈터가 하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증명해요.”

    “마음을 어떻게 증명해?”

    “말 한번 잘했네요.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믿죠?”

    “……알았어, 어떻게든 해 볼게.”

    윈터가 무작정 대답하고 나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겁을 줄 줄 아는, 제 반쪽밖에 안 될 여자에게 몸을 수그렸다.

    “그래서. 아무튼 날 좋아하긴 해?”

    “그렇다니까요.”

    “많이?”

    “많이요.”

    “어쩌다가? 취향 특이하네.”

    윈터가 농담을 해 보려 했지만 크게 실패했는지 바이올렛이 정색하며 윈터를 보더니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윈터가 다시 뭘 해 보기도 전에 걸쇠가 잠겼다.

    이대로 쫓겨나는 건가, 생각하는데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그렇게 침실에서 혼자 술을 마실 건가요?”

    “싫어?”

    “싫어요.”

    “그럼 이제 절대 혼자서는 안 마실게. 당신이 허락해 줄 때만 마실게.”

    “……그러세요.”

    바이올렛이 말하더니, 들으라는 듯 걸음 소리를 내며 문에서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윈터가 비틀거리더니 뒤로 물러서 벽에 기대 미끄러져 앉았다.

    이 소란에 달려와서는 멀찍이 떨어져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하인 몇이 다가왔다. 윈터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 의사 좀 불러와. 이러다 뒈지겠어. 그리고 못 걷겠으니까 부축을 받아야겠군.”

    그의 말에 하인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저 체격을 부축하다간 누구 하나 허리가 나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옐이 있었다면 ‘걸을 수 있으십니다, 대표님!’ 하고 어물쩍 넘어가려 들었을 테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다들 부축을 망설이며 욕을 먹을까, 차라리 허리를 포기할까 고민하는데 윈터가 알아서 일어났다.

    “그래, 다들 비실비실하니까.”

    그의 말에 하인들이 움찔했다. 이건 분명 폭풍 전야였다. 저러다 전부 해고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윈터가 뚜벅뚜벅 걸어 제 침실로 들어가더니 침대 아래에서 술이 든 상자를 꺼내 가까이 있던 하인의 품에 안겼다.

    “내다 버리든지 너희끼리 마시든지 알아서 처리해.”

    “예, 예?”

    “그리고 술 깨야겠으니 와플 좀 구워 와.”

    윈터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다가 하인들이 멍하니 저만 보고 있으니 벽을 쾅 쳤다.

    “빨리!”

    그제야 하인들이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잠시 후, 의사와 갓 구운 와플이 그의 방에 도착했다. 그의 심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윈터는 엄청난 양의 와플을 먹어 치웠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윈터는 곧장 바이올렛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아주 곤히 잤고, 눈을 떠 보니 술이 완전히 깨 있었다. 술에 취해 펄쩍거리고 뛰어다녔으니 아직 완전히는 낫지 않은 다리가 좀 욱신거렸다.

    덕분에 표정을 찌푸린 채로 방 앞에 도착해 보니, 평소엔 이 시간에 겨우 일어날까 말까 한 바이올렛이 나갈 준비를 마친 후였다.

    “어디 가려고?”

    윈터가 당황하며 묻자 바이올렛이 담담히 말했다.

    “엔나 부인께서 편찮으시니 다시 가 보려고요.”

    “지금?”

    “네, 사흘 정도 가 있을 생각이에요.”

    “……나한테 화났어?”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났어요.”

    “얘기 좀 하자.”

    “나중에요.”

    바이올렛이의 거절에 윈터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어제 부모님과 연을 끊었잖아. 그래서 술을 엄청나게…….”

    “다녀와서 얘기해요.”

    바이올렛이 그의 말을 끊어 버리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집을 나가 버리자 윈터는 자리에 우뚝 멈춰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화난 얼굴로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하자 다시 심장이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

    엔나의 병증을 확인하러 온 바이올렛은 아무리 봐도 저보다도 혈색이 좋아 보이는 엔나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 만에 다 나으신 건가요?”

    “낫긴. 아직도 온몸이 아프구나.”

    그리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엔나가 엄살을 부리니 바이올렛은 혼란스러웠다.

    엔나가 여상히 말했다.

    “정원에서 점심 식사를 하자꾸나. 와인도 한 잔 마시고.”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정말 아프신 것 맞나요?”

    그러자 엔나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거짓말은 정말 못 할 노릇이구나. 어제 윈터 경께서 부탁을 하시더군.”

    “무슨 부탁을 했죠?”

    “아픈 시늉을 좀 해 달라는 거였지. 널 자기 부모님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아, 그런 줄도 모르고…….”

    엔나가 아프단 소식에 남편도 혼자 두고 정신없이 달려왔던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젠이 그렇게 많은 와인을 챙겨 온 거군요? 남편과 공모해 준 보상으로.”

    “그렇지. 네가 와인에 손을 못 대게 해서 어찌나 고단하던지.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아끼는 널 쫓아냈겠니.”

    이제야 전날 일이 다 이해가 갔다.

    바이올렛은 엔나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그녀가 인생을 다하여 가꾼 오겔 화원에 들어섰다. 여름의 초록이 물들기 시작한 화원에 들어서자 숨통이 트였다.

    테이블 앞에 앉아서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전날 아침부터 다시 찾아올 거라 예고했으므로 엔나는 이 점심 식사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게다가 질 좋은 와인들이 그녀의 와인 창고를 가득 채웠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이 점심 식사를 즐길 마음이 충분했다.

    전날 윈터의 기복으로 복잡해졌던 바이올렛의 마음은 전채로 나온 오겔 가문 전통 방식으로 만든 치즈에 곁들인 캐비어를 맛본 순간 다소나마 가라앉았다.

    이어서 불에 구운 훌륭한 버섯 요리가 나왔는데 입 안에서 온갖 향이 가득 퍼져 그것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바이올렛이 오겔 화원의 주방장이 추천해주는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한 모금씩 즐기는 사이, 엔나 부인은 한 잔씩을 가득 채워 와인을 마셨다.

    바이올렛은 윈터와 비슷할 정도로 주량이 강한 엔나를 보며 저도 모르게 남편을 떠올렸다.

    “남편이 침실에서 몰래 술을 마시더군요.”

    “저런. 그건 큰 문제구나.”

    “어젯밤엔…… 만취해서는.”

    “성질이라도 냈니?”

    엔나가 인상을 썼다.

    엔나 부인은 바이올렛이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하나라, 윈터도 나름 예의를 갖추는 편이었으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 성질머리를 아예 감추지는 못했었다.

    엔나의 걱정에 바이올렛이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반대예요. 남편은 취하면 오히려…… 가여워진다고 해야 할까요.”

    “가여워져?”

    “네. 어젯밤엔 하도 쓸쓸해 보여서 제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결혼 후 처음으로 자기도 좋아한다고…….”

    “잠깐만. 다시 말해 보렴. 뭘 결혼 후 처음으로 말해?”

    “제가 남편이 첫사랑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지금껏 대답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젯밤에 만취해서는 처음으로 자기도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엔나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왜 그랬다니? 널 그렇게 사랑하면서.”

    “네?”

    바이올렛이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엔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효율성 그렇게 따지는 사업가가 제 사랑에는 효율이 전혀 없구나. 네가 없던 1년 동안 경께서 여길 여러 번 찾아왔단다. 나뿐이겠니, 너와 연락이 닿을만한 사람은 다 찾아다녔을 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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