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블루밍 부부가 도착했을 즈음, 윈터는 어느 정도 술이 올라온 상태였다.
세 사람은 곧장 정원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블루밍 부부는 아름답게 꾸민 저녁 식사 테이블에 말문이 막혔다.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었고, 그 테이블을 빙 둘러 둥글게 아주 구하기 어려운 꽃을 심어 두었다.
거기에 어두워진 공간들을 밝은 전구들이 밝혔다. 남부에는 아직도 전선을 끌어오지 못해 모두가 등유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블루밍 공작 부부는 저택을 둘러싼 이 화려한 불빛에 탐이 나 윈터와의 다툼을 그만두고 화해를 할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부부는 속내와 달리 그런 감정들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한참 침묵 속에서 식사하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바이올렛은 많이 바쁜가 보구나. 우리가 오는데 와 보지도 않고.”
캐서린의 말에 윈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잠깐 어디 보냈습니다. 낮부터 술이 마시고 싶어서요. 아내가 있으면 못 마시니까.”
맨정신으로 이야기할 때도 약간의 위압감을 주던 장남이 취해 있으니 캐서린도 제임스도 약간의 위협을 느꼈다.
윈터가 물을 한 컵 들이켠 후 보석 꽃으로 만든 센터피스를 가리켰다.
“아내가 점점 나에게 물들어서, 요즘은 속물적이 되려고 고생이 많거든요. 두 분을 후회하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잃은 건지를 보여 주라고 하면서 저런 걸 가져다 놨는데…… 두 분이 얼마나 쓰시는지를 몰랐나 봐요, 우리 공주님이. 고작 저까짓 걸 가져다 놓고.”
그의 말에 제임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애는 꼭, 우리가 널 금전적으로만 보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사실이잖아요. 뭘 아닌 것처럼.”
“사실이 아니지. 어떻게 이보다 더 널 사랑한단 말이냐.”
이 정원이 지독히 탐이 났던 부부가 번갈아 회유하는 것을 윈터는 한 귀로 흘려보냈다. 윈터가 고기 위주 식사가 영 안 내키는지 곧 수저를 내려놓고 의자에 팔을 걸며 말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뭘 말이니?”
캐서린이 묻자 윈터가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와 아내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는 거 아셨잖아요. 그런데 왜 아내에게 아기 신발을 보내신 겁니까?”
그의 질문에 부부가 멈칫했다. 그러나 곧 아무 일 아니었다는 듯 캐서린이 말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단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우린 그런 질 나쁜 약을 먹인 적이 없어. 정말 그랬다면 우리가 왜 아기 신발을 보냈겠니?”
“……아, 그래서 보내신 거군요.”
그제야 이해한 윈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변명하시려고 아기 신발을 보낸 겁니까? 그런 약을 먹인 적이 없다는 증거로 삼으려고?”
“증거가 된다면 그렇게 하렴. 하지만 그렇잖니. 아이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왜 그런 선물을 했겠니?”
그런 거짓말을 위하여. 그까짓, 증거를 위하여 제 아내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이다. 아마 그러면서도 그들은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겠지.
윈터는 오히려 제 부모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제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런 짓을 서슴없이 했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재산을 끌어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부는 타인의 손실에서 오는 것이니.
그때도 이미 부모의 눈에 저는 제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사람으로 보였던 건가. 그랬으니 아내를 내치려 들었던 거겠지.
윈터는 실없이 자꾸만 웃음이 났다. 저는 그때도 이미 돈 따위와는 비교도 하지 않을 만큼 아내를 아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의 적 앞에 서니, 그것이 보였다.
윈터가 술을 한 잔 다시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습니다. 모든 귀족들이 내 아내처럼 우아한 건 아니라는 걸. 내 아내가 유난히 고매하신 거였군. 속내까지 공주님이라.”
윈터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작위 같은 거 필요 없고, 가문에서 파낼 거면 파내십시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 거라.”
“하지만 만약 저를 후계자로 두지 않으면…….”
잠시 생각하던 윈터가 곧 입을 열었다.
“앞으로 두 분을 포함한 남부 귀족 워호슨과 모든 계약을 끊겠습니다.”
그의 말에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하옐이었다.
사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하옐을 제외하고 그의 말의 정확한 파급력을 알 수 없었다. 하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럼…….”
“남부에 있는 카닉사 사업들은 전부 철수하지.”
“예, 말씀 끝나시면 회의 준비하겠습니다.”
하옐은 이게 공수표이길 바랐으나 윈터의 표정은 전혀 농담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부의 종주인 블루밍 가문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남부의 돈줄 전체를 틀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윈터가 담담히 말했다.
“저는 남부에서 사업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업가들까지 위험을 느끼게 만들 힘이 있습니다. 제가 사업을 정리한다면 다른 사업가들도 불안해하며 남부를 벗어나려 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업에 손댄 워호슨들이 전부 나서서 저를 후계자로 임명하라고 두 분을 설득하기 시작할 겁니다. 말했지만, 저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요.”
부부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윈터는 상관없어하며 말을 이었다.
“설득뿐일까요. 아마 두 분에게 위협도 아끼지 않을걸요.”
“아무리 그래도 안 돼.”
캐서린이 단호하게 말하자 제임스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마, 윈터.”
“얼마든지 생각하십시오. 지금부터 바로 시작할 테니까요.”
윈터가 하옐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남부 부동산들을 매각해. 워호슨만 아니라면 누구에게 팔아도 상관없어.”
“네, 대표님.”
하옐이 달려가자 서서히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캐서린이 물었다.
“그렇게 하면 손해를 보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니?”
그녀의 말에 윈터가 실없이 웃었다.
“전 작위 얻으려고 전 재산도 처박은 놈인데요. 잊어버리셨습니까? 제 이득보다 두 분이 못 버티게 하는 게 목푭니다.”
“윈터, 그건 너무 자기 파괴적인 생각이구나.”
캐서린이 달래려고 하자 윈터가 담담히 말했다.
“절 그렇게 키운 건 두 분이십니다.”
기묘한 압박감에 짓눌린 캐서린이 처음으로 한발 물러섰다.
“만약 너를 후계자로 인정해 주면…… 우리에게도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니?”
그녀의 말에 윈터가 코웃음 쳤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렇게 위협하고 난 그가 허리를 숙여 제 부모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두 분께서는 아직도 현실 파악이 안 되시는군요. 크게 착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뭐, 뭘 말이니?”
“내가 두 분 편이 아닌 것과 내가 두 분의 적인 건 같지 않아요.”
그는 검지로 제 부모를 번갈아 가리켰다.
“제가 아직도 두 분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작위를 달라,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강탈해 가려는 거예요.”
그러곤 알아들었냐는 듯 몸을 바로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에게 작위를 주면 전 두 분과만 거래를 끊겠지만, 주지 않으면 워호슨 전체와 끊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두 분이 이기시는 답은 없지만, 매주 티 파티를 열던 친구들에게 최소한의 호의는 보이시는 게 좋겠죠.”
윈터가 곧 크게 한숨을 쉬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얘기 끝났으니 내 집에서 나가시죠, 이제.”
그러자 캐서린이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우리와 싸우겠다는 이야기구나.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바이올렛은 라크라운드를 위험에 빠뜨렸던 선왕 폐하의 딸이야. 가장 피해를 본 건 워호슨이었지. 바이올렛의 편을 들 것 같니? 부모 자식 간의 연까지 끊고.”
“아내의 편을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아, 수학이 약한 건 우리 공주님만의 문제인 줄 알았더니 라크라운드 귀족들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게군.”
“그게 무슨…….”
“연 같은 건 원래 없었던 겁니다.”
윈터가 중얼거렸다.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믿었던 건 나 하나였던 거죠.”
그는 곧 제 부모를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천천히 결정하세요. 어차피 내 아내를 힘들게 한 것은 두 분 아닌 나머지 워호슨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그들이 손해를 보는 건 나의 기쁨이 될 겁니다.”
*
엔나는 아프다고 누워서 자꾸 젠이 챙겨 온 와인들을 확인해 보려 했다. 바이올렛이 아픈 사람이 왜 와인을 마시냐며 끝까지 마시지 못하게 하자, 엔나는 결국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는 것을 선택했다.
하루 묵으며 간호할 생각이던 바이올렛은 결국 엔나의 집에서 쫓겨나 10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바이올렛이 들어서자 룰루가 달려왔다.
“작은 마님, 대표님께서…… 크게 다투셨습니다.”
“다퉈?”
“네. 언성을 높이고 싸우시더니…… 중간에 주인어른께서 먼저 손을 올리셔서 대표님이 같이 멱살을 잡으시는 바람에 하인들이 겨우 말려서 떼어 놨어요.”
“그, 그게 무슨…….”
룰루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보통 복잡해지는 게 아닌 모양이더라고요. 비서님은 두통 온다고 약까지 먹었어요.”
바이올렛은 제가 있어야 했구나, 뒤늦게 후회하며 아파 오는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바이올렛이 조용한 걸음으로 윈터의 침실로 가 문을 두들겼다.
“윈터.”
안에서 대답이 없어 바이올렛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에서 술 냄새가 확 번졌다.
바이올렛이 난처한 얼굴로 들어섰다.
“……윈터.”
윈터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바닥에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는데도, 윈터는 계속 술을 들이켰다.
바이올렛이 걸어가 그의 술병을 빼앗았다.
“그만 마셔요.”
“…….”
“얼마나 마신 거예요?”
바이올렛이 그리 말하며 술병을 테이블에 두고 있을 때, 윈터의 두 팔이 등 뒤에서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바이올렛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하옐이 그러는데, 당신이 종종 침실에서 술을 마신다더군요.”
“종종. 불안할 때만.”
“슬슬……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 그만 마셔야…….”
말을 채 끝맺지 못한 바이올렛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취한 윈터의 팔이 그녀의 몸을 가볍게 안아다가 제 무릎 위에 데려와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를 꽉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린 후 윈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이올렛은 끈끈하게 달라붙는 그가 당황스러웠다. 술을 마신 윈터는 몇 번 봤지만 이렇게 취한 그는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약과 같이 술을 마신 건 아니죠?”
“안 그러면 잠이 안 와.”
“괜찮아진 것 같아 보였는데…….”
“어떻게 괜찮아.”
윈터가 웃는지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공주님, 난 당신을 죽였어. 그것도 여러 번.”
“…….”
“평생 괜찮지가 않을 거야. 난 죽어서도 괜찮을 수가 없어.”
“…….”
“그래서…… 돌아왔잖아. 당신은 나 같지 말라고. 그래서 살았잖아, 나는.”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떠나지 마.”
“…….”
“그것밖에 없어. 날 두 번은 버리지 마. 나는…… 날 버린 건 내 생모도 용서를 못 해. 그런데 당신은 용서할게. 날 버리지 마. 제발, 날 버리지 마.”
윈터의 떨리는 손이 바이올렛의 잠옷을 움켜쥐었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그의 등을 토닥였다.
“이제 이혼은 당신이 결정하는 거예요. 난 안 떠나요, 당신…… 아, 내일 기억은 하려나 모르겠어요.”
길게 심호흡을 하고,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윈터. 당신은 대답해 주지 않고, 너무 취해서 내 말을 듣지도 못하겠지만…… 우리 둘 중 누가 상대를 버리게 된다면…… 그건 아마 내가 아닐 거예요. 나는 아직도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정말, 정말 많이.”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