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9화 (109/176)
  • 109화

    책을 읽느라 애초에 시간이 늦었던 데다가, 서약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바이올렛은 새벽이 가까워 잠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눈을 뜬 바이올렛은 침대에 앉아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윈터를 발견하고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여기서 뭐 해요?”

    “하도 안 일어나니까 하녀들이 걱정하며 찾아왔더군. 당신 좀 깨워 달라고.”

    “그랬군요.”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는 윈터는 오늘도 멀쑥하게 차려입은 후였다.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훑었다.

    “당신이 준 책을 읽어 보다가 너무 늦게 잠들었네요.”

    “재미있었나 보군.”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렸어요. 고마워요.”

    “어때, 이제 내가 이상 성욕자가 아니란 걸 좀 알겠지?”

    윈터가 놀리려 묻는 말에 바이올렛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당신 말대로 남자들은 여자 가슴 앞에서 미성숙해지는 모양이더군요.”

    그녀의 분석적인 소감에 윈터는 뭔가 말하려다 체념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게 어디냐.”

    윈터는 적당히 납득하고 문을 턱짓했다.

    “그만 일어나. 당신이 나가야 병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는 걸 사용인들도 알 테니.”

    “다른 사람들은 당신처럼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내가 낫지. 다른 녀석들은 당신을 막 알에서 나온 아기 새라도 된 것처럼 보거든.”

    “당신은 아니란 건가요?”

    바이올렛이 묻자 그가 태연히 대꾸했다.

    “난 최소한 아기 사슴 정도는 된다고 보는데.”

    “매번 나를 놀리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원. 진심인데 말이야.”

    말을 마친 윈터가 바이올렛의 양팔을 잡아 훌쩍 들어 올리더니 제 무릎에 앉혔다. 바이올렛이 화들짝 놀라 피하려 하자 한 팔로 허리를 꽉 껴안아 가두고 슬리퍼를 집어 들어 하나씩 그녀의 발에 신겼다.

    “하인이 수발든다고 생각해.”

    “다른 하인이 이렇게 날 무릎에 앉힌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당연하지.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무서운 농담인가요?”

    “아까부터 난 진심인데 왜 자꾸 농담이라고 생각해?”

    윈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슬리퍼를 신기고 윈터가 힘을 풀어 주자마자 바이올렛이 그의 무릎을 벗어났다.

    “난 이제 준비를 해야 해요. 5시가 되면 당신 부모님이 여기 도착할 거예요.”

    “그렇겠지.”

    “당신에게 작위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온갖 말로 설득하실 거예요.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요?”

    “난 더 이상 내 부모에게 무르게 굴 생각이 없어.”

    윈터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인 바이올렛이 제 침실 책장에 두었던 책을 꺼냈다.

    “작위 경쟁에 도움이 될까 하고 블루밍 가문 역사에 관해 찾아보았어요. 블루밍 가문은 지금까지 서자가 가주 자리에 앉은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반대로?”

    “입적했던 적도 없었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가문에서 서자가 작위를 물려받은 일이 없었다고 주장해 오면, 당신을 입적했던 것도 최초라고 반박하면 될 거예요.”

    “음.”

    윈터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전부 낳아 놓고 내팽개쳤다는 거군. 대단한 가문의 피가 내 몸 속에 흐르고 있었네.”

    그렇게 비꼬고, 윈터가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어느새 비행선 사고가 먼 과거의 일이었던 듯 말짱해져 있었다.

    바이올렛은 제 쪽으로 다가오는 그의 동작이 무척이나 단정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삐딱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것은 귀족가 도련님들에게서 느껴지는 삐딱함이었다.

    그래도 예법 선생을 붙여 준 게 아주 돈 낭비는 아니었던 게라고 바이올렛이 생각하고 있을 때 윈터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책장에 등을 붙이고 선 바이올렛의 손에서 책을 뺏어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꽂았다.

    “무슨 짓이죠?”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되물었다.

    “그래서, 미성숙한 거 말고는 그 책에서 배운 게 없나?”

    “배울 점이라면…… 여자 주인공의 성공에 대한 욕망이 매우 본받을 만했다고 생각해요.”

    “여자 주인공이 옷을 벗고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고?”

    “본받는 건 바람직한 행동을 본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남자 주인공과의 화해를 위한 그 행동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야?”

    “자기가 잘못해 놓고 몸으로 상대방을 홀리는 건…… 당신이나 할 법한 짓이죠.”

    그녀의 핀잔에 윈터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윈터가 그녀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우리 공주님은 내 몸이 좋아 죽겠지? 항상 벗고 다닐까? 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죠?”

    바이올렛이 정색하며 놀리듯이 웃는 윈터를 밀어냈다.

    “빨리 나갈 준비 해요.”

    “정말 만나도 돼? 우리 부모님.”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어요.”

    윈터가 높이 꽂았던 책을 다시 꺼내며 말했다.

    “읽고 회의에 임하지. 우리 공주님이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하셨다니, 나도 조금은 해야지.”

    “고마워요.”

    윈터가 대답 대신 손을 흔들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젠이 바이올렛의 옷을 갈아입히러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윈터가 예고한 화려한 구두가 들려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작은 마님!”

    “어머나…….”

    화려한 보석이 빼곡하게 박힌 구두는 화려함에 눈이 부셨다.

    젠이 일단 바이올렛의 옷을 갈아입히며 말했다.

    “구두 너무 예쁘죠?”

    “응, 정말 예쁘구나.”

    “구두 보니까 생각났는데요. 예전에…… 큰 마님께서 아기 구두 선물하신 적이 있잖아요, 왜.”

    젠이 말을 꺼내는 순간, 바이올렛은 묻어뒀던 그즈음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젠은 그걸 가여워하면서도 못 참고 말을 이었다.

    “제가 비서님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절대 대표님께는 말씀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바이올렛에게는 웬만하면 숨기는 것 없이 다 말하는 젠이 재잘재잘거리자 바이올렛이 멈칫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랬구나. 그래.”

    “왜 비밀로 하자는 거예요? 작은 마님은 아시죠?”

    “으음…….”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갑자기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도록 괴로웠던 그 순간이 떠올라 떨리는 숨을 쉬었다.

    “내 생각에도 비밀로 하는 게 좋겠구나.”

    젠은 바이올렛의 얼어붙은 표정에 인상을 썼다.

    분명 그 아기 구두를 선물한 것이 큰 문제였던 게다. 안 그래도 윈터가 제 부모에게 무르게 굴까 봐 걱정하던 젠은 바이올렛의 서러운 얼굴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이올렛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에 쓸 보석을 가져오겠다고 잠시 나가서는 곧장 윈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두들겨서 들어오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바이올렛이 표시해 준 책을 읽던 윈터가 말했다.

    “사진기 다 샀다니까.”

    “그게 아니고요. 작은 마님께서 아기 구두를 받았어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옆에 서서 서류를 정리해 주고 있던 하옐의 눈이 커졌다. 젠이 말을 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말해야 될 것 같아서요. 오늘 주인어른과 큰 마님께서 오시니까요, 걱정돼서요. 그때…….”

    하옐이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갔다.

    “젠, 다음에 얘기해요.”

    “다음에 언제 얘기해요? 지금 일단 얘기해야겠어요. 우리 작은 마님 또 상처받는 거 제가 못 보거든요. 대표님이 작은 마님께 부정으로 생긴 아이라 다그치시고 본 척도 안 하셨잖아요. 그때 작은 마님 아이가 어떻게 될까 봐 화도 못 내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냥 가만히 삭이기만 하셨다고요. 약도 안 드셔서 매일 두통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시고, 정말 아이 걱정만 하셔서…….”

    생각해 보니 서러워 죽겠는지 젠이 훌쩍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긴 해서 왔어요. 제가 그날 들었거든요. 주인어른도 큰 마님도, 그러니까 대표님과 작은 마님께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작은 마님께 아기 구두를 선물하신 건 분명히 상처를 입히려고…….”

    “……뭐라고 했어, 지금. 누가 아기 구두를 보내?”

    윈터가 확연히 거칠어진 목소리로 묻자 젠이 움찔했다. 그제야 그녀는 하옐이 비밀로 하라고 했던 게 합리적인 생각이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온 젠도 그리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큰 마님께서요.”

    윈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 윈터는 주변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기에 유난히 더 체구가 크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바이올렛 데리고 나가. 싫다고 하면…… 그래, 오겔 화원으로 데려가.”

    그가 말을 이었다.

    “엔나 테시아 오겔 부인께서 몸이 안 좋다고 하면 바이올렛도 여길 포기하고 그곳으로 갈 거야. 부인께는…… 내가 내 부모를 못 만나게 하려 그랬다고 미리 전신드리고, 집에 손님용으로 사다 놓은 좋은 와인 전부 챙겨 가져가서 내 부탁이었다고 사과드려.”

    “네, 네…….”

    젠이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그곳을 나갔다.

    잠시 후 실내가 조용해지자, 하옐이 뭔가 던지겠구나 생각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윈터는 아무것도 던지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돌아서서 찬장을 열었다.

    “대, 대표님!”

    “바이올렛이 나갈 거잖아.”

    윈터가 시큰둥하게 말하고 장에서 꺼낸 술병을 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심각한 갈증이라도 느끼는 듯, 병이 빠르게 비는 것이 보였다. 하옐이 다급하게 술병을 뺏었다.

    뺏기고도 잠시 멍하니 있던 윈터가 중얼거렸다.

    “아내는 날 용서해 주지 않을 거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작은 마님이 얼마나 아량이 넓으신 분인데요.”

    “……절대로 용서를 받지 못할걸.”

    그는 죽은 사람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

    바이올렛은 샤론의 외조모이며 오겔 화원의 주인인 엔나 부인이 아프다는 소식에 얼굴이 새하얘져서 정신없이 마차에 올랐다.

    “얼마나 아프시다는 건지 들었니?”

    “아뇨, 못 들었어요. 그냥 누워 계신다고만 하더라고요.”

    “어쩌면 좋아. 돌아오자마자 찾아뵐걸.”

    바이올렛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걱정해 젠은 매우 양심이 아팠으나 별수 없었다.

    그 망할 아기 구두. 그게 뭐가 문제였기에 바이올렛도 윈터도 그렇게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건지.

    젠은 하옐의 말처럼 윈터가 심한 충격을 받는 것을 보았으나 별수 없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바이올렛의 편이었다. 그녀가 임신이라고 믿고 있었던 즈음 벌어진 일들을 바로 옆에서 봐 온 젠으로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전제였다.

    마차가 어느 정도 달려 오겔 화원 앞에 도착했다. 바이올렛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들어서자 미리 전신을 받고 환자 흉내를 내던 엔나가 그녀를 반겼다.

    “바이올렛, 오랜만이구나.”

    “할머니,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바이올렛이 눈물을 글썽이며 묻자 거짓말에 취약한 엔나가 멋쩍게 말했다.

    “이 나이 되니까 그냥 여기저기 다 아프지 뭐니…….”

    “하지만 쓰러지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아, 그래.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더니…… 눈떠 보니 침대더구나.”

    엔나 역시 바이올렛을 그토록 아프게 하던 시부모에게서 떨어뜨려 놓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꾸며 낸 말이 바이올렛에게는 너무 충격이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바이올렛이 엔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누우세요. 옆에 있을게요.”

    “그래, 좀 누워야겠구나.”

    엔나는 핑계 대는 김에 바이올렛이 찾아와 부축해 주는 것이 싫지 않아 그녀의 손에 이끌려 침실로 향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