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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8화 (108/176)
  • 108화

    바이올렛의 동조를 구한 후, 하옐이 투덜거렸다.

    “대표님이 겉으론 술을 안 마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술도 수면제도 많이 드세요.”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을 마시다니? 언제?”

    “그게 작은 마님께 말씀드리지 못하게 하셨지만요. 침대 아래에 늘 술이 든 상자를 가져다 놓고 계세요.”

    바이올렛은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녀가 하얘진 얼굴로 물었다.

    “늘이라면 얼마나 마신다는 겐가?”

    “없어지는 속도를 보니 정말 힘드실 때는 여러 병도 드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바이올렛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잠시 뒤, 윈터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고 차차 알려 주기로 결정한 후 하옐이 떠났다.

    바이올렛은 아주 늦어진 시각에서야 침대에 누웠으나 바로 잠이 오질 않았다.

    윈터가 밤에 술을 마시고 잠든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서약에 관한 말 역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 끝에는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남았다.

    병을 나누었다는 게 정말이라면 윈터는 분명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제 목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겁을 내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달랐다.

    이 아픔이 거리를 떠돌던 윈터에게 있었다면 생명이 위험했을지 모른다.

    만약 제가 정말 아픈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건 단연코 저의 가장 큰 행복이 될 것이었다.

    *

    여섯 살, 바이올렛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겨울이 막 끝나 가고 있었고, 어린 바이올렛은 창문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거의 외출을 할 일이 없었던 바이올렛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감탄할 따름이었다.

    가정 교사인 유델이 나름 엄하게 다그쳤다.

    “왕녀 전하, 그렇게 창문에 매달려 계시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밖을 볼 기회가 없는걸요?”

    바이올렛이 아기 토끼 같은 눈으로 가정 교사를 바라보자 그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럼…… 밖을 보시는 건 괜찮지만 사람들 눈에 띄면 자연스럽게 손을 흔드십시오. 가르쳐 드렸죠?”

    “네. 이렇게.”

    바이올렛이 장갑을 낀 고사리손을 허공에 우아하게 살살 저었다. 유델은 그녀의 손인사가 제가 가르친 것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됐다고 생각했다. 저걸 보고 싫어할 악독한 인간은 세상에 없으리라. 모두가 평화를 얻고 말 것이라, 유델은 확신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다시 창문에 매달렸다. 꽃샘추위 덕에 봄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들오들 떨며 지나갔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바이올렛은 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가정 교사에게 말했다.

    “유델 선생님, 잠깐만 마차를 멈춰 줘요. 아까 갈 때 본 그 사람이 아직도 누워 있어요.”

    “어머나, 정말 그렇군요.”

    “아픈가 봐요.”

    “조치하겠습니다.”

    “잠깐 내리겠어요.”

    “안 됩니다!”

    유델이 그런 건 생각도 말라는 듯 대답하자 잠깐 곰곰이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말했다.

    “왕족의 말에 안 된다고 대답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왕녀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괜찮습니다. 아직 정확한 판단이 안 되실 나이니까요.”

    “금방 보고 올게요. 네?”

    바이올렛이 두 손을 꼭 모으고 자그마한 고개를 기울이며 가정 교사를 보았다.

    유델은 그런 아이가 천사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천사 같다고 생각하며 별수 없이 말했다.

    “대신 저자에게 가까이 가시면 정말 안 됩니다.”

    “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고 바이올렛이 내리자 바로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오늘 그녀의 호위를 맡은 근위대장 켄제스 역시 말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녀 전하?”

    “저기 사람이 있어요. 아까도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도 있어요.”

    “이런, 그랬군요.”

    바이올렛이 켄제스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요. 켄제스 경이 같이 가면 유델 선생님도 괜찮다고 할 거예요.”

    “그러시겠습니까?”

    켄제스가 미소 짓자 유델이 질색하며 말했다.

    “경께서 무디시니까 왕녀 전하께서 귀여움…… 아니, 설득으로 넘어가시려 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가 뭘 어쨌다는 거요? 부인께서도 왕녀 전하께 약한 건 마찬가지면서.”

    “뭐요? 내가 약하긴 뭘 약해요? 항상 엄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사내 부부가 티격태격 부부 싸움을 시작하는 동안 바이올렛은 쓰러진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살짝 손을 올려 보니 그에게서 가쁜 숨이 느껴졌다.

    “어쩌면 좋아…….”

    걱정하던 바이올렛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말했다.

    “나한테 옮겨도 돼. 내가 대신 아파 줄게. 나에게는 좋은 의사 선생님이 있거든.”

    그러고도 모자라서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하는데 뒤에서 유델의 비명이 들렸다.

    “왕녀 전하!”

    “이리 당장 돌아오세요!”

    뒤늦게 바이올렛을 발견한 두 사람의 성화에 바이올렛이 흠칫 놀라 두 사람에게 돌아왔다.

    그 즉시 유델이 장갑을 벗긴 뒤 하녀들을 시켜 버리게 했다. 그리고 바이올렛을 바로 마차에 태운 후 동행하던 의사에게 혹시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 전염성 있는 병이 없는지 확인하게 했다.

    잠시 후 의사가 소년은 아무 문제도 없고, 그저 잠든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바이올렛이 마차에 타서 따끈한 물로 적신 손을 빡빡 닦아 주는 유델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 괜찮아요? 숨이 엄청 가빴는데.”

    “의사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죠. 그보다…… 왕녀 전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갛죠? 설마 그사이에 감기에!”

    “괜찮아요. 유델 선생님은 가끔 너무 흥분…….”

    말하던 바이올렛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었다.

    “정말로 대신 아프려나…….”

    “와, 왕녀 전하! 의사! 당장 의사 데려와!”

    그대로 마차가 다시 멈추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

    “저기…… 미안하지만 좀 도와주겠어요? 작은 오빠가 장난을 쳐서 마차를 놓쳤어요.”

    열네 살, 비행선을 보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돌아가려던 윈터가 옷깃 당기는 손에 뒤를 돌아보았다. 보닛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엄청 떨고 있는 건 분명했다.

    목이 졸리는 듯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아이였다.

    윈터는 혀를 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와줄 어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인 제가 이 고위 귀족이 분명할 아이를 도와주다가는 강도로 몰릴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근사하게 귀족 도련님처럼 차려입었지만, 평소였다면 귀족들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리라.

    애초에 이 레스토랑 앞에 있으면 위험할 리는 없지만 아이의 목소리도 그렇고, 덜덜 떨리는 몸도 걱정스러웠다. 소녀가 재차 말했다.

    “큰 오빠의 건강상태가 회복되면 금방 데리러 올 거예요. 잠깐만 여기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혀를 차더니 제 겉옷을 벗어 아이에게 둘러 주고, 한 팔로 아이를 안아 든 후 다른 손으로 등을 토닥였다.

    “언제 오는데.”

    “내가 없는 걸 바로 알 거예요. 금방 따듯해지네요…….”

    소녀의 웅얼거림에 윈터가 혀를 차고 말했다.

    “그러게, 부모님 손 잘 잡고 다녔어야지.”

    “앞으로 그럴 예정이에요.”

    뭐지, 이 꼬마 같지 않은 꼬마는.

    윈터는 역시 귀족은 꼬맹이까지도 영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며, 별이 빛나기 시작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프지 마. 나같이 건강한 놈이야 앓고 나면 그만이지만 너 같은 꼬마 애는 그렇게 아프다가 죽는다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른 흉내도 내지 말고.”

    핀잔하던 윈터가 곧 말을 이었다.

    “너 같이 부잣집 꼬마가 어떻게 하면 여기 혼자 있어?”

    “그게, 선생님은 아이를 낳으러 갔고 유모는 손녀를 돌봐주러 갔고 부모님은 나라와 오빠들을…….”

    성실한 성격인지 꼼꼼하게 말하던 아이가 콜록거렸다.

    그렇게 어른 흉내를 내놓고, 손으로는 외로웠던 아이처럼 윈터의 팔을 꼭 쥐었다.

    윈터가 혀를 찼다.

    내가 대신 아파 주는 게 낫겠네.

    윈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꼬마 애가 아프니까 그것도 그 나름으로 엄청, 걱정스러웠다.

    감기는 옮겨주고 나면 낫는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으므로, 윈터는 일단 이 쬐끄만 아이의 고열이 저에게 옮겨지기를 바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려한 마차가 멈추더니 청년 하나가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는 윈터에게 안겨 있는 제 동생을 발견하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윈터는 청년에게 아이를 넘겨주려다가,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를 안아 들기에도 허약해 보여 고갯짓했다.

    “데려다줄게요.”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동생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윈터는 아이를 마차에 앉혀 주었다. 아이가 윈터의 겉옷을 돌려주고,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는데 윈터가 먼저 몸을 돌렸다.

    이 귀족 꼬마에게 그냥 도와준 사람으로 남고 싶지, 제 회색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꼬마의 섭섭한 목소리가 귓전을 지났다.

    윈터가 가려 하자 청년, 웨인이 따라왔다.

    “어느 가문에 계십니까? 추후에 감사의 인사를 다시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윈터가 미간을 좁히고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회색 눈동자를 보았음에도 웨인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윈터가 말했다.

    “그냥…… 됐어요. 한 것도 없는데.”

    “말씀하시기 불편하시면…….”

    웨인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감사의 인사를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갑니다.”

    윈터가 돌아섰다.

    그리고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동생의 그 오빠였다. 지금까지 본 귀족들과 달리 저에게도 예의 바르기 짝이 없었다.

    저 청년을 보니 아까 그 꼬마도 제 눈을 보고 이방인이라 놀리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빨리 도망쳤던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겁쟁이였나.

    윈터는 잠시 멈춰 서서 저를 잡으려던 꼬마의 손을 생각했다. 그런 꼬마가 좀 차별하는 눈으로 볼 수도 있지, 그게 뭐가 무섭다고 도와주고 도망부터 치고 있는지.

    “젠장.”

    역시, 진짜 귀족이 되어야겠다.

    *

    라크라운드의 유일한 왕녀 바이올렛 로렌스와 남부의 종주로 불리는 블루밍 공작가 장남 윈터 블루밍의 결혼식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아주 소박했다.

    부부는 당일에 처음 서로를 보았고, 결혼식조차 속전속결이었다.

    소소한 버진 로드를 걸어 부부는 사제 앞에 섰다. 그나마 사제의 긴 일장 연설이 허겁지겁 치른 결혼식의 쉼표가 되어 주고 있었다.

    사제가 제가 하고 싶은 수많은 축복을 쏟아 내는 동안 오늘 처음 만나 부부가 될 두 사람은 말없이 정면만을 보고 있었다.

    “신랑 신부는 서로를 마주 보시기 바랍니다.”

    사제의 말에, 두 사람이 마차 앞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마주 보았다.

    그러고도 사제의 지루할 정도로 긴 설교가 이어졌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마주 보고 있었다. 신랑도 신부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이내 마지막 줄에 가까워졌다. 사제가 말했다.

    “신부는 기쁠 때처럼 슬플 때도 서로의 슬픔을 나눠지며 사랑할 것을 서약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바이올렛이 머뭇거리다가 윈터를 보았다.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오히려 인상을 쓰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아마도 이 서약에 진심인 것은 자신뿐이리라, 생각하며 조금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서약하겠습니다.”

    바이올렛이 대답하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돈으로 얽힌 결혼이니, 당신은 진심이 아니겠지. 그래도 우리는 언젠가, 언젠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리라.

    바이올렛이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을 때, 사제가 다시 물었다.

    “신랑은 건강할 때처럼 아플 때도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사랑할 것을 서약하시겠습니까?”

    “예.”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한 윈터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오늘 아내가 된 이 공주님은 결코, 자신만큼이나 진심으로 이 서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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