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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7화 (107/176)
  • 107화

    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혀를 찬 윈터는 다시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에 나올 때부터 느꼈지만 아내는 고작 제 부모와의 만찬에 너무 공을 들이고 있었다.

    윈터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도대체 뭐 하러 저렇게 돈을 들여? 작위 놓고 진흙탕 싸움을 하는 것이 고작일 텐데.”

    그러자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싸우자는 거 맞아요. 그저…… 보여 주고 싶었어요, 당신의 재력.”

    “정말 당신답지 않은 소리군.”

    그의 핀잔에도 바이올렛은 대답이 없었고, 시선마저 피해버렸다. 그 행동으로 바이올렛이 유난히 만찬에 공들이는 이유를 알아차린 윈터가 픽 웃었다.

    “아, 그러니까 내 부모는 나에게서 돈만 필요로 했으니, 그분들에게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부를 잃었는지 보여 주겠다는 심산이로군.”

    윈터가 상처받을까 봐 바이올렛이 하지 못한 말을,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바이올렛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훌륭해. 정말 당신 같은 직원 하나만 있으면 좋겠어.”

    그러자 바이올렛이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 주변은 이미 훌륭한 직원으로 가득해요.”

    윈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내 맘에 차게 일을 하는 놈이 없는데. 그보다 내 재력을 보여 줄 거라면 당신도 보석을 주렁주렁 달 거지?”

    “그럴 생각이에요.”

    “음, 목걸이는 내가 무거운 걸 해 봤더니 안 되겠더군. 목이 너무 아프더라고.”

    그가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질색하자 바이올렛이 웃었다.

    “당신같이 덩치 큰 남자가 그걸 느꼈다니. 몸이 바뀌는 것도 좋은 일이로군요.”

    윈터가 동의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녀의 구두를 가리켰다.

    “구두를 장식하지.”

    “구두요?”

    “응. 어차피 신을 거라면 구두에 보석을 한가득 붙여 주는 게 좋겠어.”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바이올렛이 동의하며 제 구두를 내려다보자 윈터가 말했다.

    “구두 신고 하루 고생하고 나면 내가 마사지해 주지.”

    그 말에 바이올렛은 그리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윈터가 아무리 아귀힘을 뺀다고 해도, 그의 손에 잡히는 것만으로도 압력이 느껴졌다. 플립이 해 줄 때처럼 나른하고 편안하지 않았다.

    “왜 플립은 호텔 직원으로 보내 버려서…….”

    참았던 바이올렛의 불만이 터지자 윈터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를 호텔 직원으로 보내 버린 건 온전히 질투심 때문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외간 남자가 아내의 발을 만지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여 플립의 직업의식이 투철해도 안 되는데 심지어 바이올렛을 보는 눈빛이 애틋하기까지 했다. 적은 가까이 두랬다고, 자르지는 않지만 대신 집에도 못 오게 할 생각이었다.

    그가 입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말이 없으니, 바이올렛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하는 건 너무 아팠어요. 향유도 마음대로 쏟아 붓고.”

    “아프게 안 해. 연습할게.”

    “아주 많은 연습을 해야 할 거예요.”

    바이올렛의 원망 섞인 허락에 윈터가 믿음직스럽지 않게 고개를 까딱여보였다.

    그러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했다.

    “아까 할린 녀석이 가져온 자료 말인데. 읽어 보니 전혀 도움 되는 내용이 없더군.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적혀 있지 않고 서약 따위 소리만 가져왔어.

    “서약이요?”

    “응. 뭐 서로의 아픔을 나누겠다는 그런 서약. 진심으로 서약을 하고 한 번은 내가, 한 번은 당신이, 한 번은 동시에 아픔을 나누겠다는 세 번의 서약, 반려 어쩌고저쩌고가 몇 장에 걸쳐 적혀 있더군. 어디서 동화책이라도 가져왔나.”

    윈터는 그런 내용들이 취미에 안 맞는다는 듯 질색했으나 바이올렛은 이상하게도 감동이라도 받은 얼굴이었다.

    “나도 읽어보고 싶군요.”

    그 말에 윈터는 할린이 둘러 댄 것이 들킬까 움찔해 다급히 말했다.

    “저런 헛소리를 뭐 하러 읽어. 저런 꿈같은 소리만 하니까 통째로 망해서 빌빌거리는 거지.”

    그는 아내가 관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부러 더 매몰차게 말했다.

    애초에 제가 원하는 자료가 없고, 위기도 넘겼으니 윈터는 책에 완전히 관심이 사라진 후였다.

    그런 그가 의심스러워 바이올렛이 추궁하려는데 때마침 룰루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작은 마님. 칼리본에서 편지가 한 통 왔는데 지금 드릴까요?”

    “아, 물론! 고맙네.”

    칼리본이라는 소리에 바이올렛이 반색하며 편지를 받아 들었다.

    바이올렛이 편지를 뜯어 읽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자 윈터가 물었다.

    “누구에게서 온 건데?”

    “낸시를 기억해요?”

    “이름으로 말하면 모르지.”

    “왜 있잖아요, 칼리본 광산에서 도움 청하러 왔던 사람이요. 마지막으로 구조된 광부 아내.”

    “여전히 모르겠는데, 그 여자가 왜?”

    “낸시가 편지를 보냈어요. 임신을 했다고.”

    타인의 임신 소식에 윈터의 입매가 굳었다. 반면에 바이올렛은 그저 들뜬 얼굴이었다.

    “이렇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다니 고마워라…….”

    그 반응에 정말 상처를 받는 건 정작 제가 걱정하던 아내보다 본인 스스로라는 걸 깨달은 윈터가 뒤늦게 아내가 건네준 편지를 받아 읽어 보았다.

    편지는 구구절절했다. 남편이 살아 돌아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렇게 행복한 삶을 되찾은 건 전부 바이올렛의 덕분이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편지는 즐거운 희망 사항으로 마무리되었다.

    혹시 태어날 아이가 딸이라면 부인의 성함을 따서 바이올렛이라고 짓고 싶어요. 물론 무례하겠지만요!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실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래도 부탁은 드려 보고 싶어요. 부인께서 주신 희망의 씨앗…….

    읽다 말고 윈터가 편지를 구기려 들자 바이올렛이 화들짝 놀라서 말렸다.

    “뭐 하는 거예요?”

    “어딜 감히 공주님 성함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어? 미친 거 아냐?”

    “그게 뭐가 어떤가요? 고맙기만 한데. 내 이름이 그렇게 독특한 이름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어쨌든 당신 이름을 따겠다는 거잖아. 버르장머리 없이, 어딜 공주님 이름을 가져다 써?”

    “이게 왜 버르장머리라는 말씩이나 나올 이야기죠? 게다가 몇 번을 말하지만 난 공주가 아니에요. 물론 공주여도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요.”

    바이올렛이 다시 편지를 뺏어 들었다.

    “허락해 줄 거예요.”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하고 편지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는데, 어느새 모여든 사용인들로부터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님, 혹시 저희 손녀도…….”

    “제가 이번에 임신 계획이 있는데요, 작은 마님!”

    다들 말 나오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이름을 탐내자 윈터가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저리 꺼져! 하여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도나도 공주님 이름으로 하려고 난리들이군.”

    윈터가 쫓아내는 바람에 다들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 바이올렛이 뒤늦게 두 손으로 긴장한 뺨을 감쌌다.

    그러더니 편지를 꼭 쥐고 말했다.

    “정말 내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짓는다면…… 열심히 살아야겠네요. 나쁜 짓 안 하고.”

    “당신이 언제 나쁜 짓을 했다고 그런 결심을 해?”

    “안 했나요?”

    “내가 아는 한은. 앞으로도 할 것 같지 않고.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면, 그건 내가 대신 해 줄 테니까.”

    “그러면 안 돼요.”

    “왜 안 돼? 난 그냥, 당신처럼 올곧은 사람이 세상에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해. 그 사람 손이 깨끗했으면 좋겠어. 그게 다야.”

    그의 별 의미 없는 듯한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았다.

    하여튼 천사니 공주님이니.

    처음엔 저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저를 제일 대단히 여기는 게 이 남자였다.

    *

    윈터가 구두에 보석을 달아야겠다며 떠난 후에도 바이올렛은 만찬 준비로 바빴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부자처럼 보일까 머리를 굴리느라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그녀가 정원에 놓인 테이블과 그 옆에 놓인 반짝이는 실을 꼬아 만든 밧줄을 보았다. 그녀의 방 발코니와 멀리 떨어진 나무를 묶고 그 중간까지 전선을 끌어다 전구를 달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마무리한 바이올렛은 천천히 옥외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녀의 침대 위에 윈터가 두고 간 책이 놓여 있었다.

    표지만 봐도 바이올렛이 알던 교양용 서적과는 완연히 달랐다.

    들뜬 표정으로 침대에 올라앉은 바이올렛이 세련된 디자인의 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책은 시작부터 흡입력이 있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책을 읽다 보니 주연 등장인물들의 초야에 대한 대목이 나왔다.

    생각보다 구체적인 묘사에 바이올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세상에 끔찍해라!”

    바이올렛이 기겁을 해서 책을 덮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다시 책을 펼쳐 보고는 더 큰 충격을 받아 책을 침대 멀리 던져 버렸다.

    “어, 어떻게 연인에게 저런 무례한 짓을…….”

    두 손으로 입을 감싸고 충격에 휩싸여 있던 바이올렛이 살그머니 손을 뻗었다.

    무례는 무례고, 이 남녀가 도대체 어떻게 될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행복하게 잘 살게 되는 건지, 아닌지.

    바이올렛이 책을 제 무릎으로 가져와 다시 펼쳤다.

    “결론만 보는 거야, 결론만.”

    바이올렛이 그리 생각하며 제가 읽던 잠자리 부분을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 다시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두 번째 나오는 잠자리 대목에서는 충격이 조금 덜했다.

    윈터가 가져다준 책을 다 읽고 났을 땐 바이올렛 기준으로 너무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님.”

    이번엔 젠의 목소리였다.

    “들어오렴.”

    바이올렛의 허락에 침실로 들어온 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아서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머…… 미안하구나. 걱정을 끼쳐서.”

    바이올렛이 당황하며 제가 읽던 책을 들어 보였다.

    “남편이 가져다줘서 읽어 보느라.”

    “그러셨구나! 그 책 재미있죠?”

    “아, 으응…… 재미있었어. 젠도 읽었니?”

    “네! 그 책이라면 이해돼요. 시작하면 도저히 끊을 수가 없죠.”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리퍼를 신으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었어. 좀…… 많이 야하더구나.”

    “네에? 이게요?”

    젠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다 은유로 표현하잖아요. 건전하죠.”

    “이, 이 책이?”

    “네. 아, 요즘 엄청 유행하는 책 있는데 가져다 드릴게요!”

    젠은 대답도 듣지 않고 침실을 나갔고, 바이올렛 역시 워낙 책이 흥미로웠던 터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책을 찾아온 젠이 하옐과 함께 돌아왔다.

    “작은 마님, 비서님이 보여 드릴 게 있대요.”

    젠의 말에 바이올렛이 하옐을 보았다.

    하옐은 아까 할린에게서 회수한 종이를 들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피해 줬으면 하는 그의 눈빛을 알았는지 젠이 책을 책꽂이에 꽂아 두고 말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르세요!”

    “응. 고마워, 젠.”

    바이올렛이 다정히 대답했다.

    젠이 떠나고, 바이올렛이 하옐에게 물었다.

    “들어오겠나?”

    “아뇨! 괜찮습니다. 전 대표님께 이상한 오해 받고 싶지 않거든요.”

    하옐이 질색을 하며 거절해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져온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아까 할린 씨가 가져온 건데요. 대표님 보시면 안 좋을 것 같아서 빼 두었습니다.”

    “아…… 늘 신경 써 줘서 고맙네.”

    “고맙기는요, 그 성격 파탄…… 아니, 대표님이 성을 내시면 저도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할린 씨가 가져온 걸 보니 혹시 어릴 때 두 분 만나실 기회가 있었나, 하는 질문을 하려던 모양이더군요. 하필 심장이…… 안 좋으신 게 영 걸렸나 봐요.”

    “나와 같은 생각을 했네.”

    “그렇습니까?”

    한 장의 종이를 보니 반려는 진심이 담긴 서약의 증거로 상대의 아픔을 나누고, 대신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윈터가 아닌, 바이올렛의 심장이 약한 것에 대한 의문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바이올렛이 말했다.

    “여섯 살 때…… 이상하게 내가 길에 쓰러져 있던 청년의 아픔을 나눠 갔다는 생각을 했네. 그땐 그 사람이 청년 같다고 생각했는데, 열두 살의 남편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예에? 그럼…….”

    하옐이 난감해하는 사이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냥 생각일 뿐이고. 확실하지도 않은데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없죠. 절대로요. 아, 물론 언젠가는 아셔야죠. 당연히요! 몸도 바뀌는 마당에 병을 나누는 게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이긴 하는데요! 그래도 작은 마님께서 대신 아파 주신 거라면 감사한 줄 알아야!”

    하옐이 생각해 보니 열 받는지 언성을 높이려 해 바이올렛이 확실한 것도 아니라며 서둘러 달랬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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