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할린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저택은 손님맞이를 위한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주눅이 들어 책을 꼭 끌어안고 있는 할린을 발견한 하옐이 달려왔다.
“할린 씨, 오셨군요.”
“혹시 지금은…… 상황이 안 좋은가요? 다들 바빠 보이셔서요…….”
윈터와 똑같은 회색의 눈이었음에도 분위기가 달랐다. 윈터의 짜증과 의심 섞인 눈동자가 할린에게 있을 때는 조심스러움으로 가득했다.
하옐이 겁을 먹은 할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표님이 부탁하신 자료를 찾아서 오신 거죠?”
“네. 여기…….”
“일단 제가 먼저 볼게요.”
“네?”
하옐이 잽싸게 서류를 뺏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까지 윈터가 대형 범죄는 일으키지 않고 여기까지 회사를 끌고 온 것은 그의 검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옐이 내용을 확인하고 한 장을 뺀 후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제가 따로 작은 마님께 드릴게요. 대표님과 달리 우리 작은 마님은 한 번 생각하고 행동하시거든요.”
그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할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윈터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에, 하옐은 늘 카닉사의 새로운 직원들을 뽑는 날을 떠올렸다.
윈터가 성질부리는 모습을 보이면 신입 직원의 절반이 도망치곤 했었다. 새 직원을 뽑는 날, 모든 직원들이 윈터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였다.
하옐이 신입에게 하듯이 할린을 달랬다.
“대표님 뵙기 전에 저랑 심호흡 열 번만 하실래요?”
“네, 네!”
할린은 얼떨결에 하옐과 함께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 하옐이 윈터의 드레스 룸 문을 열어 주어 할린이 안으로 들어섰다.
윈터는 윤이 나지 않는 진회색 정장 바지와 베스트를 입고, 말끔하게 다린 셔츠에 군청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하인 하나는 그의 소매 단추를 잠그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깨끗해 보이는 구두에 윤을 내고 있었다.
원래도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막 매무새를 다듬고 난 윈터는 주변의 모든 분위기를 압도했다.
생모의 눈부신 얼굴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생부의 체격을 물려받은 윈터 블루밍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윈터가 몸을 돌려 할린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빈정거렸다.
“뭘 거기서 벌벌 떨고 있어? 성과가 별로면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아, 아뇨! 나, 나쁘지 않습니다!”
할린이 서둘러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그 즉시 윈터가 그가 준 것을 낚아채서 내용을 확인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카닉 일족이 말하는 반려라는 것이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고, 기회를 주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윈터는 무심해 보이는 눈으로 그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 그리고 뒤로 읽어 내려가 보니, 상대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한정적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마 어느 정도 자살을 반복해 버리면 그대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의미 같았다.
‘이제 어차피 그런 짓은 안 해. 무슨 정신으로 그랬었는지 모르겠군.’
윈터가 바로 얼마 전의 자신을 부정하며, 몸이 바뀌는 주술에 관하여 마저 읽어 내려갔다.
몸이 바뀌는 주술을 사용하기 전에는 반려의 아픔을 나누겠다는 세 번의 진심이 담긴 서약이 필요하다.
윈터가 그것을 비웃으며 뒷내용을 살폈지만 사고가 난다고 해서 서로를 구할 수 없다는 내용은 더 이상 없었다.
애초에 자살로 바뀐다는 말 자체가 없었다.
곧이어 몸이 바뀌는 방법 칸을 본 윈터가 혀를 찼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부부는 알리카의 신전에서 몸을 바꿀 수 있다.
“쓸모가 없잖아!”
윈터가 버럭 성질을 내자 할린이 움츠러들었다.
“바, 방법을 알아 오라고 하셨…….”
“주제에 말대꾸를 해?”
윈터가 하인들에게 전부 나가라고 손짓한 후, 걸어가 할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내에게 몸이 바뀌는 약초가 있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그건 있는 거야. 알겠어?”
자기가 거짓말해 놓고 왜 남에게 책임을 묻는 걸까.
할린은 억울했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온 변명을 꺼내 놓았다.
“제가…… 말씀드릴까요? 몸을 바꿀 수 있는 횟수가 끝났다고……. 야, 약초로도 못 바꾼다고…….”
“…….”
윈터가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뺨을 긁적이더니 손으로 슥슥 할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드레스 룸을 나서며 따라오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리고 얼떨결에 자신을 따라나서는 할린에게 말했다.
“아내를 만나면 떨지 말고 말해. 거짓말하는 거 보이지 않게. 떨지 않는 게 쉽진 않겠지만.”
할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이 남자 앞보다 더 무서운 곳이 있겠는가. 아무래도 윈터는 제가 남들 보기에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윈터는 옥외 계단을 걸어 정원으로 나섰다. 바이올렛은 사용인들과 블루밍 공작 부부와의 저녁 식사 준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돌아보았다.
할린은 이 무시무시한 이부 형과 저기 서 있는 반듯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눈부신 여자가 부부라는 게 선뜻 믿기질 않았다.
바이올렛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할린이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할린이라고 합니다.”
“내 이부동생.”
윈터가 말하며 할린의 등을 퍽 치자 바이올렛이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소.”
할린이 서둘러 악수를 했다.
그것으로 바이올렛의 반응은 끝이었다. 윈터는 뒤늦게 아내가 제 이부동생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싸늘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윈터는 그런 그녀가 확실한 제 편처럼 느껴져 입꼬리가 당겨 올라갔다.
할린이 우물쭈물하더니 바이올렛에게만 들리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그러니까…… 약초가 더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서를 찾아보니 두 분께서 몸을 바꾸는 횟수는 이제 끝이라더군요.”
“아, 그랬소.”
바이올렛이 수긍해 윈터도 할린도 안심하기 무섭게, 그녀가 물었다.
“확실한 거요?”
“예, 예?”
“그냥 확인차 묻는 거요. 그 말이 확실한가, 하고. 숫자는 정확히 센 거요?”
“그, 그게…… 조,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할린이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에게는 윈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압도감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다정다감했으나, 제가 원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고, 숙이게 할 수도 없을 곧음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와 함께 있던 사용인들이 동시에 저를 보는 것도 사람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들은 우리 작은 마님 심기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윈터가 인상을 쓰고 할린의 멱살을 잡았다.
“알아보긴 뭘 알아봐! 이 자식이 빈대 붙으려고 작정…….”
습관적으로 위협을 가하던 윈터가 한발 늦게 바이올렛을 보았다.
어두워진 그녀의 낯빛에 윈터는 제 이 난폭한 행동으로 그녀가 바로 제 편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폭력은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바이올렛의 생각이었다.
그걸 아는 윈터가 혀를 차며 손힘을 풀어 버리자 목이 졸려 까치발을 들었던 할린이 풀썩 바닥에 내려섰다.
윈터는 놨는데 어쩌란 거냐는 듯한 얼굴로 바이올렛을 보았고, 바이올렛은 미간을 조금 좁히고 그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싸한 분위기가 흐르자, 눈치를 살피던 젠이 슬쩍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작은 마님, 도련님 모시고 가서 다과를 대접할까요?”
그러자 바이올렛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부탁하려 했는데 고맙구나.”
젠이 손짓해 다른 사용인들도 후다닥 그녀를 따라 자리를 피했다. 할린 역시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 준 젠에게 감사하며 그들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떠나자 윈터가 능청스레 제 빈손을 보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실수했어. 당신 앞에선 그러면 안 되는데.”
“내 앞에선, 이라니요? 어디서도 안 돼요.”
“제 주제에 이부동생이라잖아. 얼굴만 봐도 열이 받는다고. 애초에 내 돈이 없었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놈인데 멱살도 못 잡나? 당신 앞만 아니면 되는 거지.”
“내 앞이 문제가 아니라…….”
“아, 그건 그렇고.”
윈터가 바이올렛의 말을 끊고 대충 살펴도 화려한 만찬을 준비 중인 정원 쪽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고작 우리 부모님 오는데 뭘 저렇게 준비해?”
“남부에서 수도까지 오시니 식사는 해야죠.”
“식사는 무슨. 당신은 지나치게 참고 살아. 나였으면 골백번 멱살을 잡았을…….”
말하던 윈터가 짜증내며 손으로 제 입을 툭툭 쳤다. 멱살 잡은 걸 피하려고 딴 얘기를 꺼냈는데 또 멱살로 돌아왔다.
윈터가 한숨을 쉬더니 아예 정면 돌파 하겠다는 듯 바이올렛을 보고 섰다.
“애초에 내가 이런 놈인 건 알았을 거고. 당신은 누굴 때리기는커녕 멱살 잡아 본 적도 없지?”
“없어요. 앞으로도 없을 거고.”
“단정하지 마. 언젠가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누굴 두들겨 패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폭력은 속이 시원한 일이 아니에요.”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솜씨 좋게 짠 비단처럼 비는 데가 없었다.
윈터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전부 어딘가에 담아서 보관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 나갔다.
“당신의 생각은 훌륭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선 나 같은 놈이 성공할 확률이 높지.”
바이올렛은 그의 말에 답변할 말이 없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은 그의 성공으로 증명되어 있었고, 바이올렛마저 난폭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확률이 높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뜻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윈터의 두 손을 잡더니 제 목을 감싸게 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윈터가 멈칫하고 물었다.
“……무슨 짓이지?”
“혹시 모르죠, 그 폭력이 나를 향하는 날이 올지.”
“…….”
“감정적인 행동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요? 언제 누구를 향할지 모르는 거.”
제 손이 바이올렛의 목을 감싼 것을 보는 순간부터 윈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수로라도 힘이 들어갔다간 이 가는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윈터는 두려움이 들어 다급하게 손을 치웠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다행이네요.”
“이렇게 무섭게 가르칠 건 없었잖아. 당신은 나쁜 선생이야.”
“그래도 받아들여 준 것을 보니 당신은 좋은 학생이군요.”
윈터는 바이올렛을 놓았음에도 덜덜 떨리는 제 손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칠 거라는 가정만으로도 이렇게 겁을 먹었다는 게 기가 찼다.
윈터가 중얼거렸다.
“그래, 빌어먹게 좋은 학생이지. 세상에 이렇게 말을 잘 듣는 놈도 없어.”
그의 말에 잠시 윈터를 보았던 바이올렛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외출 금지도 따라 줬고. 당신이 정말 들어줄 줄은 몰랐어요. 당신을 위해서였긴 하지만요.”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나도 외출 금지를 시켜도 되나?”
윈터가 그새 살짝 들떠서 묻자 바이올렛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절대 안 돼요. 난 당신이 빨리 나아야 해서 외출 금지를 한 거지만 당신은.”
“난 뭐.”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목소리를 낮췄다.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거잖아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놀리고 싶은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난 전혀 그런 생각 없었는데.”
“거짓말 말아요.”
“진짜야. 우리 공주님은 야한 생각밖에 안 하나 봐. 어머, 어쩜 좋아.”
윈터가 바이올렛의 말투를 따라 하며 놀리자, 그녀의 눈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깜빡였다.
“그렇지 않아요.”
“물론 우리 공주님의 야한 생각에는 한계가 있겠지. 내가 공부를 한 것처럼 당신에게도 공부가 필요해. 당신이 읽는 그런 옛날 사람들의 책 대신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연극을 보거나 소설을 읽었다면 키스에도 깜짝깜짝 놀라시진 않았겠지.”
“그런가요? 아, 자랄 땐 왕실용으로 엄선한 것만 볼 수 있었어요. 이젠 왕녀도 아닌데, 유행을 따라볼 수 있는 걸 시도도 안 해봤네요.”
바이올렛의 보석 같은 눈망울에 호기심이 번졌다. 의외의 반응에 윈터가 인상을 쓰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보면 무례하다고 할 것 같은데.”
“무례하다는 게 내 입버릇은 아니에요. 무례하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할 이유가 없죠.”
“아니, 이건 무례하지 않은데 당신이 무례하다고 할 것 같다고.”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