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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5화 (105/176)
  • 105화

    윈터가 왜냐고 따지기 전에, 바이올렛이 그에게 살며시 팔짱을 꼈다.

    “이제 시장 구경할까요?”

    윈터가 목덜미를 문지르더니 성질을 못 참고 투덜거렸다.

    “완전히 이해를 못했단 거지?”

    “네. 나머지는 문제로 낼게요.”

    “또?”

    “주관식 잘 맞추잖아요. 온갖 억지를 부리면서.”

    “내가 무슨 억지를 부렸다고.”

    윈터가 말하며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그 약쟁이, 멀리서 기척만 느껴져도 도망쳐.”

    “그럴게요.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우린 따로 만나질 않아요.”

    “안다니까. 당신보다 더 확실하게 알아.”

    윈터의 말이 바이올렛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보다 괜한 걱정이 먼저였다.

    “당신은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우잖아요. 저런 일에 빠지면 안 돼요.”

    “마음에 안 들면 끊으라고 해. 끊을 테니까.”

    “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내가 그런 말 해도 안 끊을 거잖아요.”

    “끊어. 난 당신 남편이잖아. 그 이후로 내 몸은 원래 당신 거야. 잘라내든 부려 먹든 당신 마음대로 할 일이지.”

    “……그런 건가요?”

    바이올렛은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바이올렛은 확실히 제 맘을 알았다.

    자신은 윈터 블루밍을 사랑했다. 자존심 강하고, 예의를 중시하던 제가 변할 만큼.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은 자신이었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사랑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 성질 급한 남자는 제 마음을 알자마자 저에게 달려오리라.

    바이올렛은 어쩌면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미소를 짓게 되었다.

    *

    보름 만에 열린 이 시장은 소상인들이 가지고 나온 자그마한 수공예품이 가득한 곳이었다.

    바이올렛은 다양한 사람들이 만든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윈터가 닥치는 대로 사들이지만 않았으면 좀 더 행복했으리라.

    바이올렛은 하인들이 마차에 싣고 있는 물건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장을 새로 열어도 될 양이네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불만이 느껴지는 게 황당한지 윈터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당신이 귀엽다며.”

    “그게 다 사자는 말은 아니에요.”

    “사고 싶지도 않으면서 왜 귀엽다고 하는 거야, 여자들은?”

    “귀여우니까요.”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두 사람이 티격태격 거리고 있을 때,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바이올렛에게 풀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공주님!”

    그러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아이의 고사리손에서 꽃을 받아 들었다.

    “세상에, 예뻐라. 너는 이름이 뭐니?”

    “소피아예요!”

    “안녕, 소피아. 나는 바이올렛이야. 선물을 줘서 정말 고맙구나.”

    바이올렛의 다정한 인사에 소피아가 부끄러워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고 다시 제 부모에게 달려갔다.

    윈터가 실소하며 말했다.

    “뭘 꼬마랑 통성명을 하고 있어?”

    그러자 풀꽃의 향을 맡아 보던 바이올렛이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통성명을 잘 안 하더군요.”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놈들은 죄다 어떻게든 쉽게 돈 좀 벌어 보려는 놈들뿐이야.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접근해야지.”

    “당신은 참…….”

    바이올렛이 말끝을 흐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윈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뭐.”

    어떨 때 보면 자만한 것 같고, 어떨 때 보면 오히려 너무 자존감이 낮은 것 같고.

    바이올렛은 제가 비교적 단순한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지식하고, 거의 다 남들에게 공개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윈터는 복잡했다. 그는 바이올렛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바이올렛은 반대였다.

    바이올렛이 풀꽃의 부드러운 꽃잎을 톡 건드리고 있을 때, 꽃을 주고 간 소피아가 폴짝폴짝 뛰며 자기 동생 좀 봐 달라는 듯 인기척을 냈다. 바이올렛은 포대기에 싸여 제 어머니에게 들려 있는, 이제 태어난 지 1년 남짓할 아기를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심장이 찌르르 아파 왔다.

    윈터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말했다.

    “아이까지는 이해해 주지.”

    “네?”

    “다른 남자와 손잡고 도망치지만 않으면. 아이까지는 괜찮다고, 나는.”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절대 안 돼요.”

    “너무 보수적으로 생각하지 마. 우리 둘의 피가 다 섞이지 않은 아이를 어디서 데려오는 것보다는 공주님 혈통이라도 있는 아이가 낫잖아.”

    “당신은……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죠?”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이야. 당신은 아이를 간절히 원했잖아. 나도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겠고.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테니, 둘 중에서는 당신 혈통이 낫다고. 어차피 내 입장에서도 회색눈을 가진 아이는 싫으니까.”

    “…….”

    “그러니까 내 말은.”

    “그만해요.”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

    윈터의 무덤덤한 말에 바이올렛이 입술을 물었다.

    동화 속에서 갑자기 확 끌어 당겨져 현실로 나와 버린 기분이었다.

    이런 남자였었지. 예쁜 말도 꼭 밉게 하는 남자. 가끔은 본인에게 상처가 되는 비하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버리는.

    바이올렛은 서러운 얼굴의 윈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마차를 따로 타죠.”

    “……그러든지. 먼저 타고 가.”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휙 돌아서서, 제가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타 젠과 함께 떠나 버렸다.

    잠시 후 달려온 하옐이 한숨을 푹 쉬고 윈터에게 말했다.

    “아이 얘기를 하셨다면서요?”

    “그게 뭐. 아이가 없다고 날 떠날 거라면 다른 자식과의 아이라도 있는 게 낫잖아.”

    “설령 그렇게 생각하셔도 그걸 굳이 말하시는 건 너무하셨죠.”

    윈터가 혀를 차더니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고 물었다.

    “이번에도 내가 문제야? 어느 정돈데. 흑자 전환이랑 비교해서.”

    “음. 비슷하게 나쁜 수준입니다.”

    “젠장!”

    윈터가 짜증스레 욕설을 내뱉었다.

    예전엔 제 말을 곡해해서 상처받는 공주님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을 종합해 보니 제 문제가 훨씬 큰 모양이었다.

    *

    주인 부부가 싸움을 하고 나니 저택 분위기가 냉랭했다.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저택이 조용해져 있었다.

    윈터는 이번만큼은 확실히 제가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바이올렛의 침실로 가 그녀의 문을 두드리는데,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옥외 계단 쪽을 보니 바이올렛이 잠옷 차림으로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윈터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조금 떨어져 걸으며 말했다.

    “덥군.”

    “…….”

    바이올렛이 대답이 없어, 윈터가 표정을 찡그렸다가 곧 구두로 흙을 툭툭 차 보며 말했다.

    “무릎 꿇기엔 흙이 좀 축축한데.”

    “…….”

    그의 갑작스러운 말이 아주 조금 웃겼는지 바이올렛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그 순간을 포착한 윈터가 말했다.

    “불안해서 그랬어. 아무 말이나 한 거니까 열 받으면 무시해.”

    “……무시할 만했어야 무시를 하지.”

    바이올렛이 혼잣말인지 대꾸인지를 했다.

    그게 귀여워서 웃음이 터질 뻔했던 윈터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에 대한 것도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해. 이렇게 덮어 놓기만 할 순 없어. 내가 불안해서 안 돼.”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해요. 계승식 끝나고 난 후에.”

    “그래. 그 전까진 이야기 꺼내지 않는 걸로.”

    “그렇게 해요.”

    이어 바이올렛이 바닥을 발로 톡톡 다져 보며 말했다.

    “오늘은…… 흙이 축축해서 봐주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웃음을 터트리자 바이올렛이 웃을 일이 아니라는 듯 그를 흘겼다.

    어느 정도 화해를 하고 돌아오니, 룰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풀어진 것에 안심한 룰루가 윈터에게 말했다.

    “대표님, 큰 마님과 주인어른께서 사흘 뒤 저녁에 수도에 도착하신답니다.”

    “그렇군.”

    남부에서 북부 별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수도가 있었으므로, 블루밍 공작 부부는 당분간 예전에 윈터가 선물한 수도 바닷가 별장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수도의 사교계 파티들을 다니려는 계획이 분명했다.

    그야 당연했다. 작위 문제가 걸린다면 그들 역시 지지층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며 윈터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겠군요.”

    “당신은 그동안 없어도 돼. 젠과 외출하고 와.”

    “그럴 수는 없어요.”

    “돈 얘기 할 거야. 당신 듣기에는 무례한 얘기들일 테니 나중에.”

    “디에브의 이야기도 하실 거예요. 당신이 못 올라오게 했으니 분명 블루밍 가문 쪽에서 많이 화가 났을 거고요. 그러니 내가 있는 게 좋아요.”

    “…….”

    윈터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해, 그럼.”

    “고마워요.”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윈터는 아내가 옆에 있으면 제 마음껏 성질을 부릴 수 없기 때문에, 바이올렛이 없는 편이 윽박지르기에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그녀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혼을 취소한 이후 그는 중요한 걸 느꼈다.

    저와 아내가 함께 있으면 더욱 견고하고 대응하기 힘든 상대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윈터가 그렇게 생각하고 제 방으로 향하려는데, 그의 뒷모습을 보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걸음걸이를 연습했나 봐요?”

    그러자 윈터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러면 몸 바꾸자고 할 거 아냐.”

    “싫어요?”

    “싫어. 당신 몸은 늘 아프고 약하잖아.”

    “너무해요.”

    “애초에 어떤 안전한 방법이어도 더는 몸을 바꾸고 싶지 않아. 무서운 게 너무 많아졌거든.”

    윈터가 대꾸하고는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오면 죽음이 열 걸음 물러서고, 그녀가 웃으면 마음에 햇빛이 든다.

    점점 더 살고 싶어졌다.

    그녀가 저를 버리지만 않으면 아마도, 줄곧 그렇겠지.

    *

    책에서 필요한 내용을 상당 부분 번역한 할린이 한숨을 쉬고 책을 덮었다.

    “이 정도면 돈값 한 거겠지?”

    내내 앓아누워서 쌍둥이 동생과 책을 읽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던 할린에게 이것은 상당한 성취감을 주고 있었다.

    제 손으로 무언가 해냈다는 생각에 그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시 제가 찾아낸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지금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일부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윈터에게 질문해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다시 제가 쓴 것들을 확인한 할린이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다시 내용을 살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두 분 사이에선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는 잠시 생각했지만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었고, 혹시 정말이라고 해도 거의 없을 확률이었기 때문에 괜한 희망 고문을 하지 않기 위해 그런 사족은 적어 넣지 않기로 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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