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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4화 (104/176)

104화

칼슨이 바이올렛의 근처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윈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걸 왜 지금 말해!”

그러자 하옐이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지금 알았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뭐 별일 있겠습니까? 그냥 같은 극장에 있다는 것뿐이고, 작은 마님과 칼슨 로우는 이제 적대 관계라고밖에 볼 수 없잖아요.”

하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게다가 바이올렛은 부드러운 성정과 달리 상대의 잘못을 그냥 넘어가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으니 불안해하거나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윈터는 이상하게 드문드문 칼슨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물론 제 스스로를 망가트려 버린 것은 칼슨 본인의 탓이지만 그 망가진 계기에는 바이올렛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끔씩, 윈터는 제가 바이올렛의 용서를 받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에 빠질 때가 있었다. 아내가 이혼을 취소했음에도 그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임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바이올렛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윈터가 그대로 집무실을 나서자 하옐이 재빨리 뒤따랐다.

“극장으로 가시려고요?”

“그걸 말이라고 해!”

윈터가 버럭 소리를 치고 곧바로 마차로 향했다.

*

모닥불에 관한 이 연극은 라크라운드의 대표적인 연극으로 나이 지긋한 관람객이 유난히 많았다.

모처럼 극장으로 들어서던 바이올렛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즐거워하던 표정을 굳혔다. 그녀와 함께 온 젠이 동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칼슨 로우 아니에요?”

“그러네.”

칼슨이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경쾌하게 손을 흔들자 젠이 더욱 놀라워하며 물었다.

“자, 작은 마님. 칼슨 로우와 아는 사이셨어요?”

바이올렛이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칼슨이 자신을 둘러싼 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와, 오랜만이네.”

그러자 바이올렛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해? 에쉬와 손잡고 남편이 나에게 준 돈을 빼돌려 놓고.”

“정말 미안해. 안 그래도 그날 내가 얼마나 맞았는지 알아? 코뼈가 부러져서 한동안 무대에도 못 섰다고.”

칼슨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겉에 드러나 보일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충격을 애써 감추고 물었다.

“요즘…… 술을 많이 마셔?”

“아니, 별로 안 마셔.”

칼슨이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예전에 윈터가 했던 말이 생각나 칼슨의 팔을 붙잡아 소매를 올려 보았다. 팔 여기저기에 약을 투약하려 바늘로 찌른 상처들이 보였다.

바이올렛이 그 팔을 바라보자 칼슨이 해맑게 웃었다.

“경께서 일렀나 보네. 바이올렛이 이런 나쁜 걸 알 리가 없는데.”

“칼슨.”

“걱정돼?”

“한심해.”

“걱정해 줘. 나 아파.”

애교스럽게 말하는 칼슨의 얼굴에는 미소가 달라붙어 버린 것처럼 어떤 말을 할 때에도 사라지질 않았다.

“왜 그 남자에게 돌아갔어? 3년 동안 널 봐 주지도 않고, 너의 부정을 의심하기까지 했다면서.”

그의 질문에 바이올렛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서로 알던 사이라 칼슨은 비교적 바이올렛에 대하여 정확히 알았다. 칼슨이 입으로는 웃으며, 좀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런 일을 했다면 넌 영원히 내 얼굴도 보지 않았을 거잖아. 그런데 왜 그 남자는 용서해?”

칼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바이올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남편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

“…….”

“사랑해서. 그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있었던 모양이야.”

바이올렛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네. 그 사람 앞에서만 평소의 내가 아닌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그녀의 말에 칼슨이 어처구니없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깨달은 거지, 그거?”

“응.”

바이올렛이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슨이 두 손으로 제 반짝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 열 받아. 차라리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때가 나았어.”

“어떻게 그런 말을.”

“정말이야. 너는 불행하고, 그 이방인이 너에게 미움받을 거라고 믿었던 때가, 나에겐 훨씬 나았어.”

칼슨이 웃으며 말하더니 크게 심호흡하고 물었다.

“식사 같이 하자고 하면 거절할 거지?”

뻔뻔하다고, 바이올렛은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칼슨은 뭐라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더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팬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며 돌아가자 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작은 마님,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별 이야기 아니었어. 그런데…….”

“네?”

“아니야. 들어가자.”

바이올렛은 칼슨이 사라진 곳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알던 건강하고 낙천적이던 칼슨의 눈빛이 아니었다. 피로와 분노가 느껴지는 눈빛에 바이올렛은 묘한 섬뜩함을 느꼈다.

*

윈터는 곧바로 극장에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며 바이올렛을 찾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가장 찾기 쉬운 것은 칼슨 로우였다. 그가 걸어가는 곳에 언제나 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근처에 바이올렛이 없다는 걸 확인한 윈터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바이올렛을 찾았다.

그때 저 멀리서 바이올렛과 옆에서 재잘거리는 젠이 보였다.

“연극 정말 끔찍했어요.”

“그 정도니?”

“네! 저 중간에 잠들었어요! 대표님이 보러 오셨으면 중간에 버럭 소리 지르셨을걸요. 지겹다고.”

“아, 그러고 보니 다행이구나. 미안하니 우리 맛있는 걸 먹으러 갈까?”

“당연히 그래야죠! 제가 굉장히 맛있는 식당을 알아 놨으니 같이 가실래요?”

“응, 그러자. 기대되네.”

반대로 바이올렛은 연극을 보며 즐거웠던지라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서던 두 사람은 곧 윈터를 발견했고, 젠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 마님과 식사하려고 했는데…… 아, 비서님 같이 오셨네요.”

“어머, 그러네.”

“전 그럼 비서님이랑 식사하면 되겠네요!”

젠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오해를 하고 있기도 했지만, 실제로 젠과 하옐이 요즘 들어 자주 붙어 다니고 있기도 했다. 젠이 하옐을 찾아가자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다가섰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회사에 있을 시간이잖아요.”

“칼슨 로우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만나면 두들겨 패려고.”

윈터의 무덤덤한 말에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때렸다면서요?”

“만족스럽게 팼으면 벌써부터 돌아다니지 않았겠지.”

“화가 난 건 알지만 사람을 때리면 안 돼요.”

“그 자식과 인사했어?”

“했어요. 잠깐…… 이야기도 했는데.”

바이올렛이 살짝 입술을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팔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어요.”

“거봐, 약쟁이라니까.”

“미우면서도 가엽네요. 왜 그랬을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윈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이올렛이 저에게, 그보다 더 많이 사랑할 남자는 있을지 몰라도 더 많이 애틋할 남자는 없을 거라고 했었다.

윈터는 그 말에 만족했었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부족했다.

가여운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동정심만으로 자신은 버틸 수 없었다. 동정심은 누구에게나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가여워하지 마.”

“물론 칼슨이 당신에게 손해를 입힌 건…….”

“그런 이유가 아니야. 불쌍해 할 거면 버려진 아이나, 굶고 있는 개를 불쌍해 해. 남자는 안 돼. 특히 저 자식은 더더욱.”

바이올렛이 무슨 의미냐는 듯,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자 윈터가 탁한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저 자식은 당신을 원하잖아.”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리고 충격받은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그 이야기는 예전에 끝나지 않았나요? 설마 아직도 나와 칼슨을 의심하는 거예요?”

“전혀. 당신이 저 자식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아직도 약쟁이일 리가 없지.”

“……무슨 의미죠?”

“아무 의미도 없어. 그저…… 당신은 이상하게도, 가끔 사람을 서럽게 해.”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물끄러미 윈터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따지고 싶은데, 이상하게 윈터의 표정이 어딘가 정말로 서러워 보였다.

바이올렛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고 서 있었더니, 윈터가 곧 그녀에게 걸어와 손을 잡았다.

“가자, 집에.”

“윈터, 나는 아직 당신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도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윈터가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극장을 나서다 보니 해가 져 있었다. 윈터가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이 앞에 보름에 한 번 서는 시장이 열린다더군. 들렀다 가지.”

“그건 좋아요. 하지만 윈터,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내가 칼슨과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지금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죠?”

“화 안 났어.”

“났잖아요.”

“말했잖아, 화가 난 게 아니라 서러운 거라고.”

“그러니까 왜 서러운 건데요?”

“내가 그 자식처럼 될까 봐.”

윈터가 돌아보며 말하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하긴, 이미 다를 바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윈터의 옆모습을 바이올렛은 조금 멍해져서 바라보았다.

윈터는 감정이 격해져 있었고, 그래서 그의 말이 외국어라도 되는 것처럼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이상하게도 맥박이 점점 더 빨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윈터는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있었고, 보름에 한 번 선다는 그 시장을 향해 말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칼슨이 아니에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이 똑같이 불쌍해하잖아.”

“그게 싫어요?”

“좋아. 좋아 미치겠어. 근데 난 그 놈이나 나나 당신에게 똑같이 불쌍한 건 싫어. 애초에 당신이 동정심으로 내 옆에 있는 게 싫지만 그래도 나만 불쌍해했으면 좋겠어.”

“잠깐만요. 동정심…… 혹시 내가 동정심만으로 이혼을 취소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잖아.”

윈터의 투박한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윈터.”

“뭐.”

“당신이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불쌍하죠?”

“……응?”

“그렇잖아요. 자만하네요. 당신이 크게 다치긴 했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나보다 건강한 것 같은데.”

“…….”

“게다가 이 거리를 지나면서 보니 건물 태반이 당신 거던데요. 내가 왜 당신을 동정해야 하죠?”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

“내 옆이 지옥 같다며.”

“거듭 말하지만 지옥 같은 건 당신 옆이 아니라 상황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윈터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과 난 사이가 틀어졌으니 당신에게 상황이 나아졌겠군. 이제 완전히 이해가 갔어.”

“……완전히, 이해가 갔어요?”

바이올렛이 하는 말이 살짝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윈터의 예상이 맞았는지, 바이올렛이 조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예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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