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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3화 (103/176)
  • 103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저희 둘이 닮아 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그런 그의 속을 모르는 바이올렛은 확연히 나아진 윈터의 다리를 살피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외출해도 돼요. 출근하고 싶었죠?”

    “미칠 정도로. 내가 이렇게 일을 좋아하는 줄 몰랐어.”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겠군요.”

    “그럴 생각이야.”

    한동안 윈터가 집에 있어서 그를 기다릴 일이 없었던 바이올렛은 약간의 섭섭함을 숨기며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었다.

    “원하면 지금 바로 출근해도 돼요.”

    “지금 당장은 말고.”

    “그래요?”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얼굴이었다. 이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윈터가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도 과일을 딸 생각인지 소매 단추를 풀어 셔츠를 팔뚝까지 접어 올렸다.

    그러더니 바이올렛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따던 사과나무에 손을 뻗어 과일을 땄다.

    바이올렛은 그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정말 제가 윈터의 말대로 그의 몸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어깨를 돌릴 때, 셔츠가 비틀어지며 보이는 근육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저 셔츠를 벗기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므로, 바이올렛은 제 문란한 생각에 놀라 서둘러 돌아서고 말았다.

    바이올렛이 뒤돌아선 채 윈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바라는 게 있나요?”

    “그래 보여?”

    “그래 보였어요.”

    그러자 윈터가 바이올렛 쪽을 보았다. 그러더니 돌아선 바이올렛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가 두 손으로 쥔 한 입 베어 물고 남은 사과를 보았다.

    “다 먹었어?”

    “다 먹었어요. 아까 너무 많이 먹었는지…….”

    “변명할 거 없어. 옆에서 예쁘게 깎아 줘야지 드시겠지, 우리 공주님은.”

    윈터가 그리 말하며 바이올렛의 사과를 뺏어 들고 그녀가 베어 문 곳을 일부러 찾아서 베물어 으적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과즙이 그의 손목을 타고 흘러 윈터가 입을 가져가자 바이올렛이 멈추게 했다.

    “손수건 있잖아요.”

    “나도 알아.”

    윈터가 태연히 대꾸했다. 그에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물었다.

    “유혹하는 건가요, 혹시?”

    그러자 윈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면 뭐로 보여?”

    “그랬군요.”

    윈터가 손수건으로 팔을 닦아 내며 말했다.

    “그래도 웬일로 알아차렸네.”

    “당신이 하도 신호를 보내서.”

    “나만 공부한 건 아니었다니 억울하진 않군.”

    윈터가 말을 마치고 한 팔로 바이올렛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밖이잖아요. 우선 침실로 돌아가요.”

    “내가 왜 그래야 돼.”

    윈터가 거절하고 바이올렛의 손바닥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녀가 놀라 손을 치우자 이번엔 입술을 맞부딪쳤다. 사과 향이 달콤하게 먼저 퍼지고, 혀가 섞여 들어왔다. 그의 무게에 밀려 바이올렛의 걸음이 뒤로 물러나자 윈터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받쳤다. 그녀의 얇은 드레스를 타고 윈터의 손의 열기가 느껴졌다.

    바이올렛은 머릿속이 핑핑 도는 기분이 들었다.

    ‘……더워지네.’

    그녀는 날씨 탓을 했다. 갑자기 땀이 나도록 더운 기분이 들었다.

    윈터가 입술을 떼고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손으로 그녀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내 몸이 심미적으로 괜찮다고 했지? 나에게 당신 몸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어떻죠?”

    “벗겨 놓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핥고 깨물고 싶어. 이마와 발꿈치까지 전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는 정말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한 그녀의 눈을 마주한 윈터가 말을 이었다.

    “내가 요즘 책을 많이 읽었잖아? 그래서 당신의 언어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많이라니, 양심이…….”

    “아무튼, 당신과 내가 쓰는 언어에도 합의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이제 생각해 보니 심미적 아름다움과 하루 종일 물고 빨고 싶다는 말은 같은 뜻인지도 모르겠어.”

    “전혀요. 난 그렇게 불건전한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당신도 차차 알게 될걸. 같은 뜻이란 걸.”

    “아니라니까!”

    갑갑할 정도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바이올렛이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윈터가 오히려 그녀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물었다.

    “왜 아니지? 당신 지금까지 살면서 다른 사람의 신체를 칭찬한 적 있어?”

    “아뇨, 그건 무례한 짓…….”

    바이올렛이 뒤늦게 뭔가를 느꼈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윈터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해했군. 당신 수준에서 그 정도로 음탕한 말이었던 거지, 심미적으로 아름답다는 말이.”

    윈터는 바이올렛이 하는 말들을 제 언어로 바꾸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녀가 첫사랑이라고 말했던 것도 어쩌면 마주치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제가 느낀 감정과 같은 걸지도.

    세상 모든 것이 새카맣게 변하고, 모든 소리는 침묵에 삼켜지고.

    그저, 천사 같은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던 그 순간.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저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다. 그녀는 영원히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살아온 날들의 차이였다. 집요정에게 쿠키와 우유를 나누어 주던 바이올렛 로렌스와 외로움에, 집요정이 존재한다면 움켜쥐어 가둬 두겠다고 생각하던 윈터 블루밍은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만약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여도 그 뜻은 반드시 다르리라.

    윈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도 룰이 필요한 것 같아.”

    “무슨 룰이요?”

    “이제부터 화해는 잠자리로 하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화해의 문제가 아니면요? 내가 화가 났을 수도 있고, 당신이 화가 났을 수도…….”

    “당신이 화나면 내가 무릎 꿇고 빌고, 내가 화났으면 당신이 날 침대로 끌고 가. 그리고 둘 다 잘못했으면 잠자리로 화해하자는 룰이지.”

    “…….”

    “합의해.”

    “합의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뭐.”

    “당신이 화난 걸로 해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무슨 의미인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제 손목을 붙잡아 침대로 향하는 것을 보며 뒤늦게 의미를 알아차렸다.

    계단을 올라 침대에 들어서자마자 윈터가 셔츠를 벗어 던졌다.

    바이올렛은 먼저 커튼부터 꼼꼼하게 쳐서 창문을 단속하려 했으나, 그 전에 윈터에게 붙잡혀 침대로 끌려갔다.

    *

    윈터는 그날 밤 바이올렛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바이올렛과 함께 잠들기만 하면 정말이지, 어린아이처럼 달게 숙면을 취했다.

    그래서인지 바이올렛이 먼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바이올렛이 끙끙거리고 상체를 일으키더니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잠들어 있는 윈터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왜 이런 표정일까.”

    자고 있을 때 만지지 말라고 듣긴 했지만, 잠든 그를 보면 이상하게 자꾸만 만지작거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조금은, 그 손길에 정욕이 쏟아져 괴롭게 저를 보는 윈터의 눈빛이 싫지 않았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윈터가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군.”

    “잘 잤…….”

    바이올렛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윈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그대로 침대에 잡아 눕혔다.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짓이에요?”

    “잠든 사람 만지는 게 버릇이야, 아주.”

    “당신이 지나치게 싫어하는 거예요.”

    “지나치게 좋아하는 거야. 당신이 그렇게 깨워 놓고 책임을 안 지는 걸 싫어하는 거고. 밤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태반은 못 하게 하면서.”

    “당신이 이상한 걸 원하니까 그렇죠.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해요? 당신이 아기예요?”

    “남자들이 가슴 앞에서 좀 미성숙해지는 경향이 있지.”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고 하는 말에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또 그런 음란한 말 하려고 들지 말고 출근해요.”

    “이게 음란해? 내가 원하는 걸 다 말하면 기절하겠군.”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요.”

    바이올렛은 남편이 이 이상 저에게 무슨 무례한 짓을 하려 할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윈터가 그런 그녀의 표정을 즐거워하며 물었다.

    “그보다 당신은 오늘 뭐 할 건데.”

    “연극을 보러 갈 거예요. 당신이 보기 싫다고 했잖아요. 내가 보고 와서 요약해 줄게요.”

    “당연한 것 아닌가? 누가 모닥불 하나 피워 놓고 하는 말장난 연극 따위가 보고 싶겠어? 그것도 세 시간 동안 한다며.”

    아내와 떨어지는 건 싫지만 세 시간짜리 모닥불에 대한 고찰보다는 고대하던 출근을 하는 게 나았다.

    윈터가 혹시 연극을 보러 가자고 잡을까 봐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더 누워 있어. 아침 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던 윈터가 멈칫하더니 바이올렛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남편이 아침 차려 주면 무례한 건가?”

    “농담인가요?”

    “진담이야.”

    “아뇨,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물론 웬만큼 가난하지 않으면 제 손으로 아침을 차리는 귀족 자체가 없을 테지만, 그게 무례는 분명 아니었다.

    진지하게 말하고 난 바이올렛이 곧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설마 브로콜리만 가득 삶아 오려는 건 아니죠?”

    그녀의 걱정에 윈터가 큽 하고 웃음 참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조금 민망해하며 말했다.

    “농담 아니었어요……. 왜 그렇게 웃는 거예요?”

    중간부터 결국 윈터가 큰 소리를 내며 폭소하자 바이올렛이 한숨 쉬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다행히 윈터는 달콤한 치즈를 듬뿍 바른 토스트를 아침 식사로 가져왔다.

    *

    할린은 하루라도 빨리 책을 해석하려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책은 대륙 공용어로 적혀 있는 부분보다 카닉 일족의 고어로 되어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

    단어 하나하나를 번역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할린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객실로 플립이 들어섰다.

    “할린 씨.”

    할린을 불렀던 플립이 흠칫했다. 밤새워 책을 보느라 눈 밑이 거뭇거뭇한 할린이 그를 반겼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플라이트 씨.”

    윈터와 바이올렛의 몸이 바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셋이었다. 하옐과 젠과 플립.

    그중 수도 호텔에서 근무하는 플립이 할린을 종종 돌봐 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플립은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이목구비 곳곳에 윈터와 닮은 부분이 박혀 있는 할린에게 친근히 말했다.

    “시간이 아주 부족한 건 아니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작위 계승식까지는 한 달이 남았으니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도 좀…… 빨리하고 싶어서요. 신세 지는 것 같고…….”

    확실히 성격만큼은 윈터와 정반대였다. 아마도 긴 시간 병석에 있었던 탓에 낯을 많이 가리는 듯했다.

    할린이 정리한 노트를 내밀었다.

    “아, 여기 조금 번역한 부분이에요. 경께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플립이 인사하고 봉투에 노트를 담는 사이, 할린이 물었다.

    “이건 책에 있는 건 아닌데요. 바이올렛 부인께서 심장이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아, 예. 종종 의사가 약을 챙겨 드립니다.”

    “혹시 언제쯤부터 아프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아프셨습니다만.”

    플립이 그건 왜 묻냐는 듯, 부드러운 얼굴로 할린을 보았다. 그러자 할린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무것도요! 아, 가져다주신 빵 맛있게 먹을게요.”

    “예. 다시 오겠습니다.”

    플립이 인사하고 객실을 나갔다.

    *

    모처럼 윈터가 출근하자, 한동안 행복해하던 직원들이 일시에 경직되었다.

    윈터는 그걸 당연히 여기며 제 집무실에 앉았다.

    오랜만에 일을 하려니 너무 행복했다.

    윈터는 의욕이 넘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회의에 참여하고,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때 하옐이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방금 플립이 할린 씨가 번역한 내용 일부를 가져왔어요.”

    윈터가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반려로 맺어지는 방법에 대한 챕터인 모양인데, 많은 단어를 몰라 공란으로 비워 두었다.

    공란을 제외하고 보면 대충, 서로가 상호 동의를 한 후에야 인연이 맺어진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상호 동의한 적이 있나?’

    윈터가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는데 하옐이 물었다.

    “중요한 내용입니까?”

    “별로.”

    “그럼 조금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뭔데.”

    윈터가 묻자 하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칼슨 로우.”

    “당연하지. 롱 리우드 땅 빼돌린 그 망할 자식 말하는 거 아냐.”

    “그 칼슨 로우가 한동안 잠적해 있더니, 오늘 작은 마님 계시는 극장에 나타났답니다.”

    “뭐?”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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