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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2화 (102/176)
  • 102화

    카닉사 직원들은 헤스턴 가문에서 가져온 ‘조건’들에 신중해졌다.

    야니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정리하자면 작위 승계식에서 윈터 블루밍 경을 블루밍 가문의 후계자로 소개하며, 바이올렛 로렌스 부인을 로렌스 가문의 가주로 대우하겠다는 것이 저희의 조건입니다.”

    의자에 기대앉은 안잘리의 귀에 직원들이 소곤거렸다.

    처음엔 욱하던 헤스턴 가문의 원로들도 카닉사에서 가져온 합의 조건에 급격히 얌전해졌다. 윈터 블루밍은 제 아내를 건드렸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날카롭게 갈린 칼로 헤스턴 가문을 뚫어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안잘리는 그 모든 계획을 기각하게 할 야니스의 조건을 신중히 고려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이방인 아래에서 일을 한다며 얼마나 많은 수치를 당했는지 몰랐다. 사교계에는 아예 발붙이기 무서울 정도의 냉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안잘리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 귀족들의 대우는 천지 차이였다. 그리고 야니스가 내건 조건은 그런 변화에 비해서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윈터의 경우도 그렇지만 로렌스 가문보다 보수적일 헤스턴 가문에서, 첫째 아들과 그 어머니가 버젓이 있는데도, 둘째이며 딸인 바이올렛에게 가주 대우를 하겠다는 것은.

    안잘리는 제 비서가 가져온 막대한 배상금 목록이 적혀 있는 서류를 확인했다. 그리고 담담한 얼굴로 그 서류를 반듯하게 접어 비서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대표님께 연락해. 이 조건 수락하겠다고.”

    “부대표님!”

    직원들은 크게 당황했으나 안잘리는 야니스가 내민 것이 충분한 거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저택에 전보를 보냈던 카닉사 직원이 돌아왔다.

    “대표님께서도 조건 수락하시겠답니다.”

    안잘리가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회의가 끝나자 헤스턴 가문 모두가 질린 한숨을 쉬었다.

    *

    안잘리는 헤스턴 가문에서 선물한 우윳빛의 신비로운 꽃잎을 가진 장미 여섯 송이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집무실에 찾아온 안잘리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윈터가 인상을 쓰고 물었다.

    “가주로 대우하겠다는 게 무슨 의미야?”

    “그건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가 보셔야 알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리고 뭐 이런 쓸데없는 꽃은 받아 왔어?”

    윈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장미를 턱짓하자 안잘리가 담담히 말했다.

    “부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대표님이 아니라.”

    “그래? 그럼 뭐.”

    윈터가 수긍했다.

    보고가 끝나자 안잘리가 물었다.

    “아무튼 그럼 저는 다시 회의로 돌아가겠습니다. 대표님은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하십니까?”

    “아내가 외출 금지 풀어 줄 때.”

    윈터는 정말, 아내가 외출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하던 그에게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안잘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정말 세상 변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군.”

    오늘 안잘리는 많은 세상의 변화를 경험했으나, 그중 가장 충격적인 건 역시 윈터가 아내의 말을 법처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짜 법은 안 따르는 주제에…….

    *

    안잘리가 떠나고, 윈터는 시큰둥한 표정을 한 채 한 팔로 장미 화분을 안고 삐그덕거리며 아내의 서재로 향했다.

    첫 번째 가정 교사가 그만둔 이후 세 명의 가정 교사를 더 쫓아낸 후, 결국 직접 윈터의 교육을 담당하기로 한 바이올렛은 다행히 100질의 책을 다 읽게 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지금은 성실하게 사교계에서 사용할 대화 내용들을 요약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서재에서 살다시피 하는 바이올렛이 책장 사이에서 들리는 지팡이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은 나도 당신이 오는 소리를 구분할 수 있네요.”

    “귀여운 소리 하지 말고 이것 좀 봐.”

    윈터가 화분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바이올렛이 그의 생각보다 놀라며 물었다.

    “이건 헤스턴 장미잖아요? 가문 밖으로는 가지고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어떻게 알아?”

    “문장 속에 그려져 있으니까요.”

    윈터는 처음 그것을 인지했다. 헤스턴 가문과 거래를 해 그들이 가져오는 편지에 매번 인장이 찍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넘겼던 것이다.

    윈터의 흠칫하는 표정을 읽은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다음으로는 가문의 문장들도 외워야겠군요.”

    “이러다 죽겠으니까 그만 고문해.”

    “당신이 조금만 말을 잘 들으면…….”

    “장미에 집중할까, 공주님?”

    윈터가 장미 화분을 가리켜 보이자 바이올렛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가뭄이 들면 호수 개방해 주기로 했잖아. 회의하고, 선물로 받았어.”

    “그랬군요…….”

    바이올렛이 감탄하며 꽃을 보았다.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꽃을 가져온 건…… 당신의 편에 서겠다는 의미겠죠?”

    “아니, 당신에게 잘 보이겠다는 의미지. 당신 선물이야.”

    “내 선물이라니요? 카닉사와 헤스턴 가문의 합의였잖아요.”

    “그게 뭐. 에쉬 로렌스 그놈이 보잘것없는 쓰레기라는 걸 사람들은 결국 알아차릴 거야.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왕의 노릇을 해 주길 바라겠지. 그때를 대비하는 것뿐이야.”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

    “아버지가 라크라운드를 위험에 빠뜨렸으니까요.”

    “그 국책은 해야만 하는 시도였어. 위험했던 것뿐이야. 그리고 당신이 결혼을 통해 라크라운드를 구했지.”

    “아뇨. 구한 건 당신이죠.”

    “라크라운드를 구하려고 한 건 당신이야. 나는 대가를 원해서였잖아.”

    “라크라운드의 역사 속 수많은 영웅들도 다 대가를 받았어요. 당신도 그중 하나가 될 거예요.”

    바이올렛이 단호함에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윈터는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영웅이라는 말처럼 저와 관계없는 단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이 바이올렛의 입에서 나오니 당황스럽고, 갑자기 목덜미에 열이 붙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헛기침을 하고 당황을 농담으로 넘겼다.

    “그럼 그거 어디 기록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후손이 내 활약을 몰라줄까 봐 걱정되는데.”

    “걱정 말아요. 많은 신문들에 기록되어 있고, 은행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바이올렛이 고지식하게 말했다. 그러자 윈터가 한 번 더 농담을 시도했다.

    “그럼 내가 작위를 바랐다는 건 적지 말라고 해.”

    “사실을 왜곡하면 안 돼요.”

    “아, 고지식하긴.”

    그는 억울한 척 말했지만, 표정만큼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 인생이 영웅의 삶이라고는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아마 타인이 보기에도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바이올렛이 이렇게 말했고, 적어도 그녀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이야기니까.

    *

    그렇게 일중독이던 사람이 하루 종일 먹고 자며 휴식을 취하니 사고가 나기 전보다 오히려 더 팔팔해져 있었다.

    한 달이 걸릴 거라던 의사의 말과 달리 윈터는 고작 보름 만에 부목을 풀었다.

    모처럼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나온 윈터가 내내 다쳐 있던 다리로 바닥을 짚어 보더니 씨익 웃었다.

    하옐이 다시 지팡이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대표님, 다 나은 거 아니니까 아직은 지팡이 쓰세요.”

    “귀찮아.”

    그가 지팡이를 거부하고 걸음을 옮겨 보았다. 아직 약간의 통증은 느껴지지만 이제는 지팡이 없이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남들이 저렇게 건성으로 재활을 했으면 영영 낫지 않았을 테지만 의사의 말처럼 윈터의 회복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옐이 그의 걸음을 보며 말했다.

    “지팡이는 그럼 됐는데요, 뛰진 마세요. 나이 들어서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져.”

    “그보다 소장이 비행선 금고 수습했답니다. 거기서 비행 기록 적힌 수첩 찾았고요. 기록이 도움이 돼서 불행 중 다행이래요.”

    그 말에 윈터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 하옐을 보았다.

    “수첩? 거기 내가…….”

    “결혼한 걸 후회한다고 적으신 거요? 당연히 제가 먼저 확인하고 찢어 버렸죠. 이래도 제가 재수 없는 소리만 합니까?”

    “……잘했어.”

    윈터가 안도하며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지 하옐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 원래 겁이 없는 편 아니었나?”

    “너무 없어서 탈이죠.”

    “근데 요즘엔 이런 겁쟁이도 없는 것 같은데.”

    “글쎄요, 저도 시간이 있어서 결혼하면 알아보겠습니다. 결혼하면 이렇게 되는지.”

    “네 조언 따윈 필요 없어.”

    윈터가 비키라는 듯 손을 빠르게 휘저은 후 집무실을 나섰다.

    조금이라도 빨리 바이올렛에게 제 상태를 보여 주려 정원으로 걸어가 보니, 바이올렛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밀짚모자에 옅은 하늘색의 여름 드레스를 입고 바구니에 사과를 담는 중이었다. 함께 하던 젠을 포함한 하녀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까르륵까르륵 웃고 있었고, 바이올렛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꼬리를 휘어 웃고 있었다.

    그러다 바이올렛의 방과 연결된 계단 앞에 불쾌한 얼굴로 서 있는 윈터를 발견한 하녀들이 인사를 하고 서둘러 사라졌다.

    바이올렛이 다가서며 말했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예요. 다들 놀라게.”

    “놀라라고 지은 표정이야. 효과적이군.”

    왜 일부러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일까.

    바이올렛은 한숨을 쉬면서도 윈터의 다리를 가볍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벌써 부목을 풀었군요.”

    “이제 자유야.”

    “잘됐네요.”

    바이올렛이 웃으며 바구니 속의 사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선물로 줄게요.”

    “어어.”

    윈터가 새빨갛게 익은 사과를 제 옷에 슥슥 닦더니 그대로 아작 깨물었다. 이어 큼지막한 사과를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우고는 대부분을 휙 땅에 던져 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바이올렛도 사과 하나를 꺼내더니 바구니를 팔에 걸고 제 치마에 흙먼지를 닦아 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입을 물었다. 그 모습에 윈터가 픽 웃었다.

    “내가 하는 행동을 다 따라 하기로 한 건가?”

    “좋아 보이는 것만요.”

    바이올렛의 대답에 윈터가 슬쩍 웃었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지팡이는 있어야 하지 않나요?”

    “당신이 너무 불쌍해해서 그만 쓰려고. 많이 괜찮아지기도 했고.”

    확실히 윈터의 걸음은 약간 삐그덕거렸을 뿐, 거의 다 나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말했다.

    “계승식 전에, 우린 조금 일찍 북부 별장에 가지. 당신이 앞으로 거길 어떻게 쓸지도 생각해 볼 겸.”

    그러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생각해 봤는데, 북부 별장 말이에요. 평소에는 결혼식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결혼식장? 너무 어둡지 않나?”

    “모든 사람들이 밝고 경쾌한 결혼식을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사제가 있는 조용한 결혼식을 원할 거예요.”

    “그 별장에서 결혼식이라. 귀족적이어 보이긴 하겠군.”

    “그럴까요?”

    “당신은 어느 쪽이 좋은데?”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낮에는 별장이 좋고, 밤에는 정원이 좋겠어요.”

    “웬일로 나와 취향이 같군.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겠다는데 당연히 낮부터 밤까지 길게 해야지. 아니면 식은 별장에서 치르고 피로연은 정원에서 하면 좋겠군. 정원이 넓으니 오고 싶은 사람은 다 오게 하고, 손님들은 원 없이 식사를 하고.”

    “확실히, 음식이 부족한 파티만큼 실패한 파티는 없죠.”

    “이런, 우리 공주님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을 줄은.”

    윈터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손님맞이에 대한 생각은 똑같네.”

    “부부는 닮는다잖아요. 처음엔 달랐어도…… 지금은 닮아 가는 중일지도 모르죠.”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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