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무심코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묘사하자면 가장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해서 말해 버린 것뿐이었다.
윈터는 제 말이 죄책감을 느낄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이올렛이 왜 저렇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내가 뭐 못 할 말 했어? 왜 그렇게 기겁을 해?”
윈터가 되레 인상을 썼다. 정작 천사 같은 소릴 한 본인은 태연한데 바이올렛만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제 와서…… 왜 그런 소리를 하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걸 어떡해?”
윈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 순간은 강렬해서, 그 이후 3년 동안 그를 쫓는 기억이 되었다.
마차가 당도하기 직전까지도 별것이겠냐, 생각하던 윈터는 아내의 천사 같은 눈빛 속에 제가 어떻게 비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아내가 저를 돈에 집착하는 미치광이나 비천인 이방인 사생아로 본 것이 아니라 첫사랑이라 여겼음을 알았다면. 그랬다면 달라졌을까.
윈터는 회의적이었다.
그랬어도, 저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윈터가 별일 없었다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책이나 좀 읽다 갈까.”
“……그래요.”
윈터가 화제를 전환해주자 안도한 바이올렛은 손부채질을 하고 폭 한숨을 쉬었다.
*
카닉사 별장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카닉사 직원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별장 안에는 아직 헤스턴 가문 여덟 사람만이 자리했다.
그들은 헤스턴 가문에서 합의를 마치고 여기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윈터 블루밍은 포악한 자요. 힘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되오!”
“나도 동의하는 바요.”
야니스는 다시 뒤집힌 회의 분위기에 인상을 썼다.
이제 곧 카닉사 직원들이 나타날 텐데, 별장에 자리 잡은 헤스턴 가문 원로 셋은 아직도 야니스의 의견에 반대만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원로가 결정하지 않으니 영지 관리관들 역시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미래에는 아버지를 이어 헤스턴 가문을 잇게 될,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야니스는 일단 그들이 멋대로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윈터 블루밍이 넙죽 호수를 가져다 바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그와 계약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사실이었다.
불리한 상황임에도 가문 사람들은 그 천한 이방인, 사생아에게 예의를 갖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카닉사 직원들이 도착하기 직전 그들이 결정한 것은 권력 행사였다.
“무장은 안 됩니다.”
기사 가문인 헤스턴 가문 사람들은 가문에서 내려오는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검은 무장 이상의 의미였다.
그런 그들 중 하나인 야니스의 결정에 원로들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라고? 야니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리고 권력으로 누르려고 하는 것도 전 반대입니다. 유혈 사태는 당연히 안 되죠.”
야니스가 몸을 일으켜 제 가문의 자존심인 검을 꺼내 제 부하에게 맡겼다.
“물론 우리 가문은 강하고, 왕실과 끈끈한 연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야니스!”
“가문의 현재는 아버지가 책임지시겠지만 미래는 제가 책임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권력 행사, 유혈이 아니라 최대한 손해를 덜 보는 합의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그 장사치에게 이것보다 더 뜯어먹히자는 게냐!”
“그러니까 최대한 덜 뜯어먹히자는 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야니스가 버럭 소리쳤다.
“우리가 손잡아야 하는 건 자기 여동생을 내 아버지와 결혼시키려는 에쉬 로렌스가 아니라, 그 여동생이신 바이올렛 부인이십니다. 우리가 타협해야 하는 그 장사치의 아내 되시는 분이고, 그 장사치가 유일하게 꼼짝 못하는 상대이며 우리 중 누구도 비할 수 없이 의로운 분이십니다. 원래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퇴색되기 마련이라지만 가문의 정신까지 빛이 바래는 건 지나친 수치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나머지 일곱 명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이 가문의 새로운 가주, 카르잔 헤스턴이 있었다.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부리고 살던, 심지어 부리기도 싫어하던 이방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 상황을, 그 거센 변화의 물결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웠다.
“검을 내려놓는 게냐.”
카르잔의 말에 야니스가 담담히 대답했다.
“예. 지금은 오히려 제 수치니까요.”
“야니스.”
“아버지. 우리는 영지민뿐 아니라 바이올렛 부인께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한 겁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 그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야니스의 부탁에 언제나 바위 같던 카르잔이 끊어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그로부터 30분 후, 별장 입구에 안잘리가 도착했다.
어두운색의 정장 차림에 서류를 한 아름씩 챙겨 든 여덟 명의 직원들이 그와 함께했다.
직원들은 검푸른 빛의 정복 재킷을 입고 있는 헤스턴 가문 사람들과 마주했다.
안잘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중을 나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헤스턴 가문 여덟 명은 모두 무장하지 않고 있었고,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카르잔은 불쾌한 표정으로 다시 들어갔고, 야니스가 대신 인사했다.
“그럼 시작하시죠.”
“예.”
회의에 참여할 사람들이 모두 건물로 들어갔다. 안잘리 역시 가져온 총을 제 비서에게 건넸다.
“다시 마차에 가져다 둬.”
“예, 부대표님.”
솔직히, 안잘리는 본인도 귀족이지만 윈터 밑에서 일하다 보니 다른 귀족들의 돈을 빼내는 건 아이 손에서 사탕 뺏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쩐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생각보다 헤스턴 가문에서 많은 준비를 해 왔습니다.
헤스턴 가문에서 거래 조건이 있다고 하여 들어 보려 합니다.
안잘리의 연락에 윈터가 혀를 찼다.
거래 조건이 무언지, 윈터가 고민하고 있을 때 하옐이 윈터의 집무실에 들어서서 말했다.
“대표님, 블루밍가에서도 전보가 왔습니다.”
“지긋지긋하군.”
윈터가 말하며 전보를 받아 들었다.
내용은 그가 예상한 것들이었다. 네가 너무 화가 났을까 봐 직접 찾아가지 못했다, 우리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주렴, 실언을 용서해라, 뭐 이런 것들.
윈터가 혀를 찼다. 가문에서 쫓아내겠다며 제 아내를 협박해 놓고 잘도 사과를 한다.
윈터는 블루밍가에 입적된 이후 내내 이런 것들에 쉽게 넘어갔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가족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블루밍가 사람들뿐이었으니까. 부모가 없어 식당에서 두들겨 맞으며 일하다가, 갑자기 그의 삶의 질을 상승시켜 준 사람들이니까. 그는 아내에게 몹쓸 약을 먹인 이후부터 부모를 증오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부모에게 완벽히 모질어질 수가 없었다.
그가 하옐을 보았다.
“젠을 불러와. 바이올렛 모르게.”
“네, 대표님.”
하옐이 대답하고 나갔다가 곧 젠과 함께 돌아왔다. 젠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사진기를 사시기로 결심을…….”
“그게 뭐 결심씩이나 필요해. 이미 나와 있는 건 전부 샀으니 제작이 끝나는 대로 가져올 거다.”
“감사합니다!”
젠이 화색이 돌아 인사했다. 윈터가 본론을 꺼냈다.
“조만간 내 부모님들이 여기로 올 거야. 그리고 작위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지.”
“으으, 그러시군요.”
“부모님이 수도에 도착하면 넌 바이올렛을 데리고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다녀와. 아내가 부모님과 더 이상 마주치지 않게 하고 싶으니까.”
“아, 네! 지금부터 미리 계획 세워 놓겠습니다!”
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옐과 함께 집무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고서야 젠이 내내 걱정하던 말을 꺼냈다.
“비서님, 아직…… 그러니까 대표님께서 부모님께 약하시잖아요.”
“그건 그렇죠.”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완전히 모르는 젠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윈터가 또 제 부모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버릴까 불안해했다.
“혹시 또 대표님이 부모님 말만 듣고 우리 작은 마님께 못되게 구시는 건 아니겠죠?”
“에이, 이제 안 그럴 거예요. 완전히 척을 지셨거든요.”
“그러니까요. 그게 왜 그런 거예요? 그렇게 부모님을 따르시더니. 작은 마님 떠나신 거랑도 관계가 있는 거죠?”
“비밀이에요.”
“좀 말해 봐요!”
“미안해요.”
하옐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대표님 많이 변하셨어요. 이제 무작정 부모님만 편들고 그러지 않을 거예요.”
하옐이 달래듯 말했지만 젠은 마음이 전혀 놓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일단 이혼을 안 하신다니까 제가 어떻게 할 수야 없는 건데. 그래도 이혼을 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요, 저는.”
“나도 그래요.”
“전 아직도 대표님을 믿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우리 작은 마님 임신하신 줄 알았을 때…… 그때가 정말 최악이었어요. 자기 마음대로 불륜이라고 우기질 않나, 임신했다는 사람 놓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오해가 있었어요.”
“그때 제가 작은 마님 옆에 있었잖아요. 아직도 기억나요. 작은 마님께서 임신이 아니란 걸 알게 되시던 날이요.”
“……아, 그날 젠이 같이 있었죠.”
윈터의 비밀을 냉정하게 함구하던 하옐이 그제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날 일은 평생 못 잊을걸요. 작은 마님께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지낼 방을 보고 계셨단 말이에요. 작은 마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방을 아기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날…… 아휴, 그날 아침에 아기 신발만 안 받으셨어도 고작 임신 두 달째에 그렇게 아기 방 걱정을 하시진 않으셨을 거예요.”
“아기 신발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옐이 멈춰 서서 묻자 젠이 엄지와 검지로 아기 신발 크기를 만들며 말했다.
“요만해서는 정말 앙증맞은 신발이었어요.”
“아니요. 누구한테 아기 신발을 받으셨냐는 말이에요, 제 말은.”
“그게 중요해요? 큰 마님한테 받았는데요.”
“큰 마님이…… 작은 마님께 아기 신발을 보내셨어요?”
“네…… 임신을 했다고 챙겨 주셨어요. 하여튼 제가 그 집 살면서 큰 마님이 작은 마님한테 뭐 챙겨 주는 건 그거 하나 봐서 기억에 남아요.”
하옐이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 하다가 집무실 문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블루밍 공작 부부는 바이올렛에게 먹인 약이 그런 약인 줄 몰랐다고 우기는 중이었다.
“젠, 미안한데 그 얘기는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특히 대표님한테는 더더욱이요!”
“왜요?”
윈터의 심리 상태가 완전히 안정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혼을 취소했다는 건 그저 한 고비를 넘긴 것뿐이었다.
하옐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냥요. 일단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표님을 위한 거예요?”
“뭐……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죠?”
만약에 그런 약을 먹이고 아기 신발까지 보낸 걸 알게 되면 윈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하옐조차도 예상할 수 없었다.
윈터는 지금 블루밍 가문이 자멸하고, 알아서 작위를 가져올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지 별로 건드리지 않을 생각으로 보였다. 그리고 하옐 입장에서는 그가 심정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가장 적은 손해를 보는 결정을 했다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윈터의 분노는 임계치에 가까웠고, 여기서 더 감정적인 일이 끼어들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하옐은 윈터가 오로지 재산을 불리는 것에만 몰두해 있는 것을 오랜 시간 보아 왔다. 그러나 지금 같지는 않았다. 그에게 그의 아내는 재산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였다.
하옐은 적어도 제 상사가 범죄는 저지르지 않게 할 의무가 있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