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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0화 (100/176)

100화

잠시 후 목욕을 마친 할린이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대한 저택에 짓눌려 있었다.

게다가 꺼내 준 옷도, 차려진 식사도 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할로도 데려왔다면 좋았을걸, 잠시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 분명했다.

눈치를 살피며 식사를 시작하는데, 지팡이를 딱딱거리며 나타난 윈터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너.”

윈터의 말에 할린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험악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돈 갚겠다고 왔다고 했지?”

“예. 무엇이든 시켜 주시면 다 할 겁니다!”

“몸을 바꾸는 법을 알아 와.”

“아! 안 그래도 경께서 그걸 궁금해하신다는 소식을 어머니께 들어서요. 필요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할린이 가방에서 자그마한 책자를 꺼냈다.

“알리카가 대부분 불탄 후 재건된지라 이 책자를 찾는 데 정말 오래 걸렸어요.”

“주제에 생색내는 건가?”

윈터가 어이없다는 듯 하는 말에 할린은 움츠러들었다. 그의 거친 성격은 두려웠으나, 여전히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

할린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카닉 일족은 몇 가지 주술을 사용할 수 있기도 합니다.”

“금시초문이군.”

“……죄송해요. 아무튼 대부분이 알리카에서 멀어지면 사용할 수 없는 것들뿐인데요. 그중 하나가 이 반려와 몸이 바뀌는 주술입니다.”

“아, 반려.”

윈터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할린이 말을 이었다.

“이 책에 적힌 반려라는 건 꼭 부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고요. 음…… 아주 친한 친구나 형제나 부모 자식 간도 포함하는 의미인 것 같아요.”

“그건 넘어가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몸을 바꾸는 방법이 뭐냐고, 죽는 거 말고.”

“그, 그건 아직 제가 이 책을 해석을 못 해서…….”

“좋아. 그럼 네놈 일거리가 생겼군.”

“네, 네?”

“그 책 해석해. 생활비와 필요한 돈은 지원해 주지.”

“그렇게…… 몸을 바꾸어야 할 일이 있는 건가요?”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할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정말 감사합니다. 동생인 할로는 아직 누워 있지만 덕분에 저는 아주 건강해졌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당장 해석이나 시작해. 시간이 없으니까.”

윈터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할린이 따라 일어서며 물었다.

“그런데…… 경께서는 한 번도 심장이 안 좋았던 적이 없으세요?”

“무슨 소리야?”

“저희 쌍둥이도, 어머니도, 어머니 형제들도 다들 심장이 안 좋아서 한 번씩은 문제가 생겼었거든요.”

“전혀. 그런 적 없어.”

그렇게 대답하던 윈터가 미간을 좁혔다.

“어릴 땐 드문드문 아팠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심장이 안 좋은 건지야 전혀 몰랐지. 그냥 어디가 안 좋구나, 정도만 알았지. 사느라 바빠서.”

“그러셨군요.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윈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할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어릴 때 종종 지나치게 숨이 차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것도 그렇게 튼튼하다가 갑자기 심장이 이러다 멈추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도하게 뛰어 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증상은 그가 열두 살, 식당에서 뛰쳐나온 이후부터 완전히 사라져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정도가 되었다.

할린이 말했다.

“하지만 전 이제 아주 건강해졌습니다. 알리카에 좋은 약이 있거든요.”

“그걸 가져왔어야지. 내 아내가 심장이 안 좋으니.”

“안 그래도 가져왔습니다!”

할린이 물어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 허브가 듬뿍 담긴 보자기를 꺼냈다.

“혹시 경께서도 심장이 안 좋으실까 하여 이렇게 말린 허브들을 챙겨 왔습니다! 구하기 어려워서 가격이 정말 높았지만 경께서 돈을 넉넉히 주셔서…….”

“지금 그따위 믿을 수도 없는 풀을 내 아내에게 먹이란 건가?”

“아, 알리카의 허브는 유명해서 의사들도 알 겁니다! 확인하시고 우려서 차로 드시면 됩니다!”

윈터가 휙 손을 뻗어 보자기를 뺏었다.

그리고 하인을 시켜 의사에게 허브를 확인하고 오게 했다. 잠시 후 하인이 돌아와 말했다.

“알리카의 허브이고, 심장에 좋은 것도 맞다고 하십니다.”

“다른 의사에게도 물어보게 해. 내 아내에게 아무거나 먹일 수는 없으니까.”

할린은 제가 그만큼 못 미더운 게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윈터는 의사에 대해 심각한 수준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

할린을 수도 호텔에 반 감금해 책자를 해석하게 해 놓고, 윈터는 검증의 검증의 검증을 거쳐 바이올렛이 허브를 차로 마실 수 있게 했다.

두 사람은 티타임을 가지기 위해 정원에 앉았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이부동생과 인사 정도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윈터가 먼저 권하지 않는다면 제가 먼저 말할 생각은 없었다.

바이올렛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으며 미소를 지었다.

“와, 향이 참 좋네요.”

“그까짓 게 그렇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뭐 모르지, 그 이방인 놈들이 알 수 없는 주술을 부려 댈지.”

바이올렛이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윈터를 보며 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좋은 것 같아요.”

“한 모금 마시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윈터는 그렇게 말했으나, 보기 드물게 눈꼬리가 완전히 휘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곧 묘하게 짜증이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친어머니 쪽으로 대부분 심장이 안 좋다더군.”

“그래요? 당신은 괜찮아요?”

“아주 괜찮은 게 이상하다는 거지.”

윈터가 대꾸를 하더니 괜히 투덜거렸다.

“꼭 당신이 대신 아파 주기라도 하는 것 같잖아.”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 모금 마시고 심장이 좋아지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소리네요. 난 어릴 때부터 원래 심장이 안 좋았어요.”

“그야 그렇지만.”

윈터가 단어 꺼내기도 민망한지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몸이 바뀌는 게 반려 뭐 어쩌고저쩌고 하니까 신경이 쓰였어. 평생 한 명과만 몸이 바뀐다더군. 꼭 부부가 아니더라도 그냥 한 명.”

“그랬군요……. 신기하네요.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요?”

“그걸 내가 아나.”

“그리고 몸이 바뀌는 약초는 언제쯤 구할 수 있나요?”

“그러게. 지금 내 이부동생이 열심히 찾고 있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윈터는 아무렇지 않게 둘러대며, 그 이부동생의 등장에 거듭 안도를 느꼈다.

바이올렛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중얼거렸다.

“한 명이군요. 몸이 바뀌는 게.”

“응. 한 명.”

윈터가 대답해 주자 바이올렛이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좋네요. 어쩐지. 반려라는 말이.”

“별걸 다 마음에 들어 하는군.”

윈터는 투덜거렸으나 겉보기보다 속이 쓰라렸다.

그 역시 세상에 단 하나인 반려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은 여전히 아내에게 아이를 안겨 줄 수 없고, 그러므로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그냥 내가 공부를 하지.”

“네?”

“공부한다고. 그 망할 신사 노릇, 인사치레.”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어요?”

“당신은 건강이 안 좋잖아.”

“그게 상관이 있어요?”

“난 당신이 그 차를 마시는 것도 솔직히 불안해. 그런데 다른 약초를 어떻게 먹여.”

뭐 약초를 찾아온다면 말이 딱 맞겠지만, 혹시 할린이 다른 방법을 찾아오더라도 윈터는 그걸 바이올렛이 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죽음으로 몸을 바꿔 왔던 것은 그에게 커다란 트라우마였고, 죽는 순간까지 못 잊을 상처였다.

“또 그러네요. 난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웃기지 마. 난 가끔 당신이 걷는 것도 불안해.”

바이올렛이 웃으며 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장 이야기를 하니, 어릴 때 일 중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여섯 살쯤, 바이올렛에게는 제 심장이 좋지 않은 이유가 ‘다른 사람의 대신 아픈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었다. 그러니까, 길을 가다 쓰러진 사람을 보고 제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기도한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는 믿음이었다.

아이가 그런 말을 하니 부모는 바이올렛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왕족은 여섯 살이든, 몇 살이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정 교사와 유모 역시 아이에게 단단히 일렀다.

아이들은 그런 착각에 종종 빠진다고 했다. 제 병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는 듯한 이상한 착각.

바이올렛이 생각에 빠져 있으니 윈터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해?”

그러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허무맹랑한 생각이요.”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윈터가 요 며칠 꺼낼까 말까 고민하던 말을 꺼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결혼식을 다시 하는 게 좋겠군.”

“네에?”

“온 세상이 우리가 이혼하는 걸로 알고 있잖아. 그러니 결혼식을 다시 하자. 이전의 결혼식은 물만 떠 놓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결혼식은 신부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신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고. 게다가 중간에 신랑이 나가 버리기까지 했지.”

“그건 확실히 그랬었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곤 웃음을 지었다.

윈터가 제 생각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디어를 쏟아 냈다.

“정원에서 하면 좋겠어. 가운데 길이 있으니 버진 로드로 완벽할 거야. 봄이 가장 좋겠지만 그건 너무 많이 남았으니 가을도 괜찮지. 공작도 스무 마리 정도 데려오고, 루비를 장미꽃처럼 수로에 쏟아 놓고…….”

“아, 농담이었군요.”

바이올렛이 웃었다. 윈터는 제 진지한 계획의 어느 부분이 농담으로 들렸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초여름의 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이혼 취소를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 줄 걸 몰라서 괜히 가슴앓이했네요.”

윈터가 씨익 웃었다. 그녀가 좀 더 일찍 이 얘기를 했다면 자신도 좋았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결혼식은 차차 하더라도 정원에서 파티는 해야 해. 수도는 여름에도 아주 덥진 않으니.”

“그러네요. 손님을 초대해야겠죠.”

바이올렛이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파티 준비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게 왜? 당신이 할 게 뭐 있다고.”

“할 게…… 없나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기가 차다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룰루는 명문가 하녀장이었던 사람이야. 내가 직접 수도 호텔로 데려와서 VIP를 담당하게 했어. 손님을 편안하게 해 주는 일을 룰루만큼 잘하는 직원이 없지. 거기에 투린은 수도 호텔 주방장이었고, 플립은 직원 교육을 담당하고 있잖아. 이 셋만 해도 접객, 음식, 직원 교육을 라크라운드 최고 수준으로 해 줄 텐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

“……그런 사람들이 왜 다 여기에서 일하는 거죠?”

“아마도 내가 그 사람들에게 웬만한 집 한 채 살 정도의 연봉을 주니까?”

“그렇군요.”

“도스 공국의 그 친구에게도 도움을 청해. 이번엔 제대로 결혼식을 하지.”

바이올렛은 거절할까도 생각했으나, 가슴 한구석에서 잔잔한 바람이라도 일어난 듯한 기분에 제가 축복 속의 결혼식을 늘 바랐음을 알아차렸다.

윈터가 투덜거렸다.

“이제 라크라운드 웬만한 귀족들은 다 내 호텔에서 결혼을 하는데, 정작 내 아내만 그런 결혼식으로 끝나는 건 말이 안 돼.”

그녀와 윈터의 결혼식은 그의 말처럼 신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심지어는 드레스조차 간소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웃었다.

“결혼식 날에는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할 정신이 없었어요.”

“왜?”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신에게 반해 있었잖아요.”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몇 번이고 했던 말이라, 조금 가슴이 아프긴 해도 대수롭지 않은 말이 되었다.

그러나 윈터 입장에서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그 말을 해 줄 때마다 그 말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들을 때의 기분도 점점 좋아졌다. 어쩌면 지금 결혼식 이야기를 꺼낸 것도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윈터가 입을 열었다.

“나는…… 경외였었나.”

“무슨 의미죠?”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여전히, 제가 처음 바이올렛과 마주한 순간을 공포로 기억했다. 너무나 고귀한 공주님을 천한 제 옆으로 끌어내렸다는 공포. 이 눈부시고, 태어나서 처음 만난 올바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

“내가 바라던 작위라는 게 그런 건 줄 몰랐잖아. 당신을 보는 순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았으니까. 100질은커녕 실용서들밖에 읽지 않았고, 당신처럼 그렇게…… 오만하게.”

“……오만해 보였나요?”

“세상 아무것도 당신 위에는 없는 것처럼 보였어. 내가 생각한 왕족이란 건 그냥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지고 산 멋모르는 철부지였는데, 당신은.”

“…….”

“…….”

윈터는 이제야 그때의 제 기분을 명확히 알고 실없이 웃었다.

“……마치 천사 같더군.”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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