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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9화 (99/176)
  • 99화

    다음 날 바이올렛의 부탁으로 하옐은 곧바로 윈터에게 유명한 예법 교사를 붙여 주었다.

    그 후 며칠간, 하옐은 윈터 대신 바이올렛이 해결할 수 있는 일거리들을 그녀의 서재 겸 집무실에 쌓아 두기 시작했다.

    “제 인생에 이런 봄이 올 줄 알았나요. 제 상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저는 작은 마님께 보고를 드리면 된다니!”

    삶의 질이 향상된 그의 들뜬 목소리에 젠이 버럭 소리쳤다.

    “봄은 무슨! 작은 마님한테 더 이상 일거리 가져오지 말아요! 작위 계승식에서 할 장식 고르는 것만으로도 바쁘단 말이에요!”

    “지금 회사 일이 쌓였는데 그까짓 장식이 문제예요?”

    “그, 그까짓 장식? 지금 말 다 했어요?”

    두 사람이 싸우려 들자 서류를 읽던 바이올렛이 달래듯 물었다.

    “젠, 얼른 일 끝내고 장식을 고를까?”

    “어휴, 이렇게 마음이 약하셔 가지고 어떡하나 모르겠어요.”

    젠이 투덜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젠은 지금 바이올렛이 해야 할 일들을 쭉 종이에 적어 벽에 걸어 두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우리 작은 마님 꽃 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이날 쓰실 화환 디자인하실 시간도 없네요.”

    “이렇게 바쁠 줄은 정말로 몰랐구나. 그보다…… 젠은 어쩜 이렇게 일을 잘하니? 네가 없었으면 난 아예 별장 일을 엄두도 못 냈을 거야.”

    바이올렛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을 찾은 듯이 바라보자 젠이 부끄러운지 헤헤 웃었다.

    “비서님한테 좀 배웠어요. 비서 일하는 법.”

    “어머나, 그랬구나. 하긴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늘었으니.”

    바이올렛이 감탄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원인과 결과가 반대였다. 둘이 같이 있다 보니 비서 일을 배운 게 아니라, 비서 일을 배우다 보니 둘이 같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바이올렛의 행복한 상상 속 로맨스를 건드릴 마음이 없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하옐이 제가 가져온 커다란 상자를 들어 보였다.

    “일거리 드린 대신 제가 이런 걸 가져왔습니다.”

    “그게 뭔가?”

    바이올렛이 묻자 하옐이 상자를 가까운 테이블에 놓고 상자를 열었다.

    “별장 건물은 보셨겠지만 대강당 건물이 하나 있고, 호수를 둘러싸고 레이크하우스 열일곱 채가 있습니다. 레이크하우스 구조는 전부 같은데, 대표님이 성질내셔서 작은 마님이 이번에 못 보고 오셨으니…….”

    하옐이 상자에서 근사한 미니어처를 꺼냈다.

    “레이크하우스의 미니어처를 가져왔습니다. 앞으로 집무실에 두고 구상하시라고요.”

    인형의 집 같은 아기자기한 모형에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어머, 귀여워라…….”

    옆에서 젠이 같이 감동해서 맞장구쳤다.

    “웬일로 비서님이 이런 좋은 걸 다 가져왔어요?”

    “내가 무슨 나쁜 소식만 가져오는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

    하옐이 입술이 삐죽 나와서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어차피 여긴 원래 적자가 나는 곳이라 매출 낼 걱정도 없습니다, 작은 마님. 마음껏 운용하세요!”

    “아, 적자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이곳이 행사가 없을 땐 내내 비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 이렇게 크고 좋은 곳을.”

    바이올렛은 갑자기 생긴 일에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미니어처가 마음에 들었는지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정숙한 결혼식이 어울린다고, 잠시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젠과 하옐이 마음 편한 분위기 속에서 이것저것 의견을 내고 있을 때, 구조 요청하듯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바이올렛 부인!”

    “들어와요.”

    바이올렛이 허락하자 윈터에게 붙여 주었던, 사교계에서 이름깨나 날리지만 늘 급전이 부족해 예법 교사 일을 받아들인 귀족 청년이 울상이 되어 들어왔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못 하겠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서워 죽을 것 같습니다…….”

    그의 겁에 질린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당황해서 말했다.

    “남편이 무슨 짓이라도 했나요?”

    “저와 얼굴 마주치실 때마다 기분 나빠하시고, 비꼬시고, 사흘 내내 제 트집을 잡으십니다!”

    하옐이 옆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이해해요. 우리 대표님이 좀 그렇죠.”

    “그, 급여 따위 필요 없으니 나 좀 내보내 주게!”

    “그래도 급여는 챙겨 드려야죠.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 맘 다 이해합니다.”

    하옐이 울먹이는 가정 교사를 달래며 데리고 나갔다.

    겨우 사흘이었다. 사흘 만에 그 커다란 급여를 마다하고 도망치게 만든 것이었다.

    *

    바이올렛이 응접실에 가 보니 윈터는 소파에 늘어져 앉아서 벽에 고무공을 튕기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다가오자 윈터가 이실직고했다.

    “그 망할 도련님이 날 가르치려 들잖아.”

    “그게 가정 교사의 역할이니까요.”

    “그냥 당신이 가르쳐 주면 안 되나?”

    윈터가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나 바이올렛에게는 잘 먹히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윈터에게 걸어갔다.

    남편이 제 말을 유난히 안 듣는 줄 알았더니, 반대로 제 말을 제일 잘 듣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를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

    “윈터, 그렇게 공부가 싫어요?”

    “싫어.”

    “정 그러면…… 우리 계승식 당일에 몸을 바꿀래요? 그날은 그 정도로 중요해요. 유력 가문들이 다 모일 테니까.”

    그녀의 말에 윈터가 멈칫했다.

    그는 제가 목숨을 끊음으로써 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바이올렛이 제 앞에서 죽었을 때의 트라우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영원히 그 악몽에 발목을 담그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었다. 그런 악몽을 아내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었다.

    문제는 바이올렛이 제 옆에 머물 것이라는 안도감이 생기자마자 죽음을 각오하기는커녕 제 몸에 상처도 내기 싫은 기분이라는 것이었다.

    윈터는 나중에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이 상황을 얼버무리려 적당히 대답했다.

    “그러든지.”

    “좋아요. 약초가 있다고 했죠?”

    “당연히 있지.”

    “나에게 줘요. 내가 먹을게요.”

    예상하지 못한 바이올렛의 함정에 윈터가 움찔했다.

    “무, 무슨 소리야. 당신은 몸이 약해서 그런 정체 모를 풀을 먹으면 안 돼.”

    “괜찮아요.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요. 지금 남은 게 있다면 실험해 보는 게 어때요?”

    함정에 빠진 윈터는 점점 바이올렛의 수사망에 조여지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전, 기차에 탄 이방인 청년은 불안하고 낯선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얼마 전 이부 형의 도움으로 높은 수준의 치료를 받은 후 제가 살던 알리카를 떠나온 열여덟 살의 청년, 할린이었다. 그는 얼마 뒤 병약한 몸을 끌고 라크라운드 수도 인근 역에 내렸다.

    그는 카닉 일족의 모든 특성이 드러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얼음이 쌓인 듯한 은발과 함께 얼어 버린 듯한 회색 눈은 병약해 보였고, 한편으로 아름답기도 했다.

    쌍둥이 동생인 할로는 할린보다 심장의 상태가 훨씬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할로가 누워 있는 사이, 쌍둥이가 해야 할 일을 할린 혼자 책임지기로 했다.

    그는 낯선 대륙, 낯선 교통수단, 낯선 길을 걸어 거대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되지 않는 저택의 문 앞에 섰다.

    어머니에게 듣던 것보다도 어마어마한 부자인 이부 형의 집 앞에 도착한 할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에 쫓겨날 거야…….”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러나 제 수준에서는 많은 돈을 들여 여기까지 도착한 이상 그는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열린 저택 문 안으로 들어선 청년의 모습에 저택의 문지기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오?”

    그러자 할린이 얼른 대답했다.

    “저는 윈터 경의…… 말하자면 이부동생인 할린이라고 합니다. 경께서 저와 제 동생 쌍둥이의 약값을 주셨는데 그냥 받는 건 너무 염치가 없어서! 하인으로 일해서라도 갚아 드리려고 왔습니다! 내쫓지 말아 주세요!”

    할린이 있는 힘껏 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문지기가 난처한 표정으로 포치의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좀 앉아 계세요, 도련님. 들어가서 물어보고 올 테니까.”

    “도련님이라고 하실 이유가 전혀…….”

    그가 말끝을 흐렸다. 문지기가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저 때문이 아니라 제 이부 형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문지기가 문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어쩌다가 이렇게 말랐을까.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다닌 게지.”

    그 말에 할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확실히 저택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잘 먹고 지내는지 건강해 보였고, 쌍둥이의 마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좋은 옷들을 입은 사람들뿐이었다.

    기다리는 중에 오며 가며 들은 이야기라고는 윈터 블루밍의 성격이 개차반이니 맞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들뿐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할린이 몸을 달달 떨었다.

    *

    굳어 있던 윈터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은 다 떨어져서 구해야 돼.”

    “그래요?”

    “안 그래도 차차 구해 보려고. 구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서.”

    “그랬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묘한 의심에 윈터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표정을 구겼다.

    “곧 구해 오겠다니까.”

    “알았어요. 기다리죠.”

    그렇게 말하는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윈터가 힘주어 이를 물었다.

    그녀는 분명히 의심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야 그녀를 믿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응접실에 들어온 룰루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어…… 이걸 어떡하나.”

    “무슨 일인가, 룰루?”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의 눈치를 살피던 룰루가 결국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이부동생 되시는…… 그…… 쌍둥이 중 하나가 왔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윈터가 벌떡 일어섰다. 역시 화내겠구나, 룰루가 예상하는데 윈터가 화색이 돈 얼굴로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거봐, 내가 구해 온다고 했지? 내가 불렀어, 내가.”

    “정말…… 이에요?”

    “그렇다니까. 여기 있어. 내가 나가서 보고 올 테니까.”

    윈터는 제 어머니가 결혼해 쌍둥이를 낳았다는 사실마저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찾아오기까지 했다는 사실에 더더욱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윈터는 점점 더 몸이 바뀌는 것에 관련된 많은 일들이 저를 위한 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때마침 동생이 나타나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영원히 바이올렛에게 제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비행선에서 추락한 것은 완전히 제 부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절벽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내가 제 곁을 지옥으로 여긴다는 사실이 끔찍해서 떨어졌던 것이다. 달리 이유가 없었다.

    천운으로 위기를 모면한 윈터가 바이올렛에게 거만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안 그래도 조만간 그 약초가 필요할 것 같았어. 내가 진작 불러 놨지.”

    타이밍이 지나치게 좋았는지, 바이올렛의 눈빛이 의심에서 혼란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서, 동생이 찾아왔다고요?”

    “응. 꼴보기 싫지만 일단은 필요하니까.”

    윈터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순간 아픈 것도 잊고 빠른 걸음으로 제 이부동생을 만나기 위해 저택 앞으로 향했다.

    윈터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앞에서 기다리던 할린의 몸이 크게 떨렸다. 잘 못 먹고, 심장까지 약한 그로서는 눈앞의 거대한 남자를 제 어머니가 어떻게 낳은 건가 놀랍기만 했다.

    할린이 정말로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는데 윈터가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지?”

    “아, 그게…… 저희를 도와주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너무 면목이 없어서…… 하, 하인 일을 주시면 주신 돈만큼 일하겠습니다!”

    할린이 소극적으로 말하자 윈터가 누가 보아도 무서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돈만큼? 네놈이?”

    할린이 오들오들 몸을 떠는데 윈터가 퍽 그의 어깨를 때렸다.

    “의외로 염치가 있군.”

    “네, 네?”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너는 내가 부른 거야. 알았어?”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말대꾸하지 말고.”

    “아, 네! 그, 그리고 선물로 가져온 것들이…….”

    “나중에.”

    윈터가 앙상하게 마른 팔을 콱 쥐어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곤 로비에 서 있던 룰루에게 제 동생을 밀쳐 주며 말했다.

    “일단 씻기고 옷 갈아입혀. 밥 좀 먹이고 있으면 곧 돌아오지.”

    “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말랐담.”

    룰루가 빨리 오라고 손짓하며 제 남편을 불렀다.

    “투린! 여기 도련님 먹을 든든한 것 좀 만들어 줘!”

    “든든한 거? 뭐가 좋을까요, 여보?”

    “소화가 잘 되는 걸로!”

    룰루가 말하며 할린의 등을 떠밀었다. 할린은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박력에 밀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끌려갔다.

    제 이부동생이 혼란을 겪거나 말거나, 윈터는 제가 죽었던 것을 영원히 바이올렛에게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을 마련할 생각에 싱글벙글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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