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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8화 (98/176)

98화

아무래도 100질의 책을 읽는 건 무리였다.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리는 기분이라 윈터가 손으로 관자놀이를 꽉 누르며 말했다.

“다른 도련님들이 평생 살면서 읽었을 책을 지금 당장 어떻게 다 읽어. 요약본 없어?”

“요약본은 없지만…… 무엇이든 하나씩 차근차근 해 나가면 언젠가 끝날 거라고 생각해요.”

윈터는 순간 아내의 예쁜 얼굴에 홀려서 그녀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잊고 말았다.

“이봐, 난 차근차근이 정말 안 맞는 사람이야.”

“그래도 당신이 유리해요. 승마 같은 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나보다 잘하게 될걸요. 어쩌면 평생 해 온 에쉬도 이길지 모르겠어요.”

“……그건 좀 내키는군.”

윈터의 승부욕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극한 바이올렛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섰다.

“내 방에서 책 가져다줄게요.”

“같이 가.”

윈터는 그녀의 온기가 잠깐 제게서 떨어지자마자 불쾌감을 느꼈다. 병에 걸린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확고한 감정이었다.

결국 아픈 다리를 억지로 끌고 바이올렛의 방, 책장 앞 소파에 앉았다.

그사이 바이올렛이 책장에서 책을 한 아름 꺼내다 윈터의 앞에 쌓아 주었다.

“이 책은 재미있으니까 마음에 들 거예요. 외출 금지 기간 동안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일중독에서도 벗어나고.”

윈터는 책 냄새만 맡아도 짜증이 날 지경이었지만 좋아하는 책을 공유할 생각에 표정이 잘 드러나지도 않는 얼굴로 들떠 있는 바이올렛을 보니 이제 와 실망시킬 수 없었다.

“이 책부터 읽어 봐요.”

윈터가 괴로워하면서도 순순히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몇 장 읽지 못하고 성질을 내며 말했다.

“무슨 등장인물 이름이 이렇게 길어?”

“옛 귀족들은 원래 칭호가 길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왜 다 쓰냐고. 왜 이렇게 비효율적이야? 그리고 쉬운 단어 놔두고 굳이 어려운 단어를 골라 쓰는 건 읽는 놈들 열 받으라는 의도지?”

“어느 게 어려운 단어인데요?”

바이올렛이 상냥하게 물으며 의자를 끌고 왔다. 윈터는 제가 있음에도 아내가 힘쓰는 일을 하는 모습에 슬슬 제 다리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배부르면 마음이 달라진다고, 처음에는 아내가 저를 불쌍히 여겨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마음이 놓이고 나니 불쌍해 보이는 게 싫었다. 그는 아내에게 제가 남자인 것이 더 중요했다.

이제 그만 돌아다니고 낫는 데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터의 소파 앞에 의자를 놓은 바이올렛이 자리에 앉았다.

“어서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요. 알려 줄게요.”

“가정 교사시군. 월급 드려야겠어.”

“비꼬지 말고요.”

윈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차고, 대신 바이올렛이 의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려는 듯, 바이올렛이 앉은 의자 다리에 제 다리를 뻗어 넣었다. 바이올렛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무슨 짓이죠?”

“편한 자세.”

“불편해 보이는데요.”

“어떻게 늘어진 자세가 불편해? 당신같이 꼿꼿한 게 불편하지.”

“…….”

“불만 가지지 마.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 내가 맞다고 할걸.”

그는 그리 말하며 한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 바이올렛이 보기엔 완전히 자세를 무너뜨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윈터의 다리가 제 다리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게 신경 쓰여 바이올렛이 움직이려 하자 윈터가 그녀의 무릎을 손으로 꽉 눌렀다.

“집중하잖아, 가만히 있어.”

“……정말이에요?”

어쩐지 미심쩍었지만 윈터가 집중을 하겠다니 바이올렛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제가 꺼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기 시작하자 중간부터 바이올렛은 책에 빠져들었고, 윈터는 책에 별 관심이 없으니 아예 고개를 들어 대놓고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재미있었다. 웬만한 스포츠 경기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햇살이 닿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내용이 재미있는지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졌다가. 거의 움직이지 않던 입술도 가끔 살짝 물고.

그게 야하고 귀여워서 눈은 아내에게 고정하고, 그녀가 확인할까 봐 손으로는 적당히 책장을 넘겼다. 예상대로 어느 정도 책을 읽던 바이올렛이 허리를 숙여 그의 책을 확인했다.

“아, 꽤 많이 읽었네요? 읽다 보니 재미있죠?”

“아니. 지긋지긋해.”

문제학생의 대꾸에 모범생 출신인 바이올렛이 당황하면서도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 수 있죠.”

“당신 추천이 잘못됐어.”

“미안해요. 다른 책 꺼내 올게요. 그럼 이제 문제를 낼까요?”

윈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곧 이실직고했다.

“……안 읽었어요, 선생님.”

“정말.”

“당신이 읽어 주든지.”

윈터가 뻔뻔하게 말하며 책을 내밀었다. 바이올렛은 별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한 번 쉬고 그의 책을 받아 들었다.

“어디부터 읽을까요?”

“첫 글자부터.”

“…….”

“내가 얘기했나? 당신이 그렇게 못마땅하다는 듯이 보고 있으면 엄청 야한 생각이 든다고.”

“윈터!”

빈정거리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툭하면 성질내는 평소의 윈터 블루밍으로 돌아오고 나니 바이올렛은 함께 다혈질이 되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문제는 그렇게 장난을 쳐 대며 자신을 바라보는 윈터의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달콤하다는 것이었다. 회색은 의심의 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빛은 꿀색처럼 달았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지, 그가 그렇게 느끼도록 의도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바이올렛은 그의 이상야릇한 꼬임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려 눈과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내가 읽어 줄 테니까 잠들면 안 돼요. 끝나고 문제를 열 개 낼 거예요.”

“다 맞히면 상이라도 주나?”

“받고 싶은 것이 있나요?”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벅지 중간 정도를 가리켰다.

“여기 입 맞추고 싶은데.”

그의 행동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감추듯 책으로 덮으며 말했다.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내 상인데 나만 알면 되지.”

윈터의 태연한 말에 당황에 빠져 있던 바이올렛이 곧 이성적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건 당신을 위한 일인데 왜 내가 상을 줘야 하죠?”

“내가 다 맞으면 오히려 당신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건가?”

“그렇죠.”

“뭐가 받고 싶은데.”

“한 권을 더 읽고 열 문제를 맞혀 줬으면 좋겠는데요.”

“당신은 소원 세 개 들어준다고 하면 마지막 소원으로 소원 세 개를 더 달라고 할 사람이군.”

윈터가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둘 다 하자. 당신도 상을 받고, 나도 상을 받는 걸로.”

“싫어요.”

“나에게 상이 없으면 난 문제를 다 맞힐 이유가 없어. 한 권 더 읽는 건 끔찍하니까.”

윈터의 말이 반박하기 어려워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이내 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왜 허벅지에…….”

“그렇게 싫으면 여기.”

윈터가 말하며 검지로 제 목을 가리켰다.

“골라.”

“……그럼 목에 해요.”

바이올렛이 애써 평정심을 되찾은 후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애초에 입을 맞추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벅지였다가 목을 제시하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아 넘어가 버린 것이 아닌가.

제가 속았다는 건, 윈터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신 저 남자랑 내기 안 할 거야. 절대로.’

바이올렛이 다짐했다.

*

처음 열 장 정도 읽어 준 이후, 윈터는 나머지 책을 스스로 읽었다.

한 권을 마치고 바이올렛이 문제를 냈다.

윈터 블루밍은 매우 까다로운 학생이었다.

학습태도가 문제투성이인데 머리는 좋아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문제를 맞췄다.

게다가.

“내 생각에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지적하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사람마다 관점이 다른 거잖아.”

라고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답이었고, 어떤 문제의 답은 바이올렛의 마음에 지나치게 쏙 들었다.

바이올렛 입장에서도 그를 사교계에 적응시켜 작위를 받게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므로, 이번 열 문제는 전부 맞은 걸로 해주기로 했다.

목에 입맞춤을 하는 것도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넓게 보면 손등에 입 맞추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니겠는가.

바이올렛이 마지막 문제를 끝으로 책을 덮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책은 이걸로 하죠.”

바이올렛이 책을 꺼내 보이자 윈터가 소리 내 비웃더니 그 책을 소파 뒤로 던져버리고 바이올렛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바이올렛이 별수 없이 일어나 윈터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대고 반듯하게 앉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바이올렛의 눈이 절로 감겼다.

긴장이 되어 바이올렛이 꿀꺽 침을 삼키는 것이 윈터의 눈에 보였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귀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당장 발목을 쥐어 당겨 아내를 소파 위에 눕혀 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의 목덜미 근처로 입술을 가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눈 떠.”

“싫어요.”

별 상관없는 문제였는지, 바이올렛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뽀얀 목에 입술이 닿았다.

바이올렛이 우려했던 것처럼 그의 입술이 바로 떨어지지 않고, 옆에서 뒷목 쪽으로 옮겨 갔다.

바이올렛은 몸을 흠칫거리다가, 못 견뎌 두 손으로 입을 꼭 막았다.

온몸에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윈터는 목덜미를 한 입 베어 물듯이 입술로 훑었다.

그대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윈터의 손이 입을 막은 바이올렛의 손목을 잡아끌어 내리더니, 그대로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허락하지 않은 행위에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무 놀라서 밀어내지도 못하는데, 윈터는 그녀의 손을 당겨 아예 제 목을 감게 하고 야릇하게 입을 맞춰 왔다.

놀라서, 그래서 밀어내지 않는 거라고 바이올렛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바이올렛은 그렇게 자신을 달래면서도 저도 모르게 윈터의 넓고 단단한 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속에 간절함이 피어났다.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멈추게 해야 하는데…….’

바이올렛의 이성이 연신 그렇게 말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은 윈터가 저를 놓아줄 때까지.

입술을 뗀 윈터가 가까이에서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은 그가 예상한 경악과 놀람 대신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제발 그런 표정 하지 마. 여기까지도 겨우 참았어.”

신음 섞인 윈터의 낮은 목소리에 마찰로 붉어진 바이올렛의 입술이 열렸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어요. 당신은 나쁜 학생이에요.”

“일찍도 알았군. 그래서 포기하게?”

“다른 예법 선생님을 붙여 줄게요. 내 말은 잘 안 듣는 것 같으니까.”

“다른 선생이 나에게 상이라도 주려 들면 어쩌려고 그래?”

“당신의 가정 교사는 남자로 할 거예요.”

“그래도 주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 고지식하긴.”

“받고 싶으면 받아요.”

바이올렛의 침착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윈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받아? 난 당신이 그러면 절대 안 되는데.”

“난 그럴 일 없어요.”

“난 뭐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혹시 당신이 바람을 피우면 그 망할 쥐새끼 팔다리를 부러뜨릴 거야.”

“나도 마찬가지예요.”

“……하긴, 그런 면에선 당신이 나보다 보수적이지.”

마찬가지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윈터의 표정이 풀어졌다. 바이올렛이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역시 가정 교사가 필요해요.”

윈터가 대답 없이 미간만 좁히고 있다, 마지못해 대꾸했다.

“마음대로 해.”

“좋아요, 그럼 난 이제…….”

바이올렛이 겨우 진정해 일어나려다가 윈터에게 팔이 잡혀 다시 앉았다.

“여기까진 검사해야지, 선생님.”

윈터가 유혹하듯 하는 말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교습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비록 머릿속은 바이올렛이 알면 너무 놀라 뺨을 때릴 상상으로 가득했지만 뻔뻔한 얼굴로 감추면 그만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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