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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7화 (97/176)
  • 97화

    윈터가 제 부모에게 지원을 끊은 이후 반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블루밍 공작 부부의 씀씀이는 수도의 귀족들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정도였다. 거의 주마다 티 파티를 열고, 일가의 생일이라도 되었다 하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파티를 열었다.

    윈터가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많아 웬만큼 퍼내도 표가 나지 않는 것이지, 다른 가문이었다면 예전에 무너지고도 남았으리라.

    윈터가 말했다.

    “그거 아나? 블루밍 가문 영지 많은 부분이 내 땅인 거.”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블루밍 가문 영지는 아주 비옥해. 지금까지는 영지민을 죽을 때까지 쥐어짜서 부를 누적했지만 이제는 법이 그걸 막고 있지. 부모님 입장에선 가치가 떨어진 크기만한 땅을 내가 아주 비싼 값에 사주었지. 그래서 지금은 넉넉하게 느껴지겠지만 그 씀씀이로는 얼마 못 버텨.”

    “하지만 블루밍가에는 아직 재산이 아주 많잖아요. 씀씀이를 조금만 줄이면…….”

    “씀씀이라는 게 갑자기 확 늘리는 건 쉬워도, 조금이라도 줄이는 건 어려운 법이거든. 땅은 영원하지만 돈은 사라져. 당신과 달리 남들은 줄어드는 재산에 매우 불안감을 느낀답니다, 공주님.”

    윈터는 비꼬듯이 말하며, 운동다운 운동을 못 하는 게 괴로워 연신 만지작거리던 고무공을 탕 바닥에 튕겼다.

    그리고 장난치듯 바이올렛에게 휙 던져 주자 그녀가 조금 서툴게 그것을 받았다.

    윈터는 한 손으로 잡던 공인데 바이올렛의 손에 들어오니 두 손으로 감싸야 할 만큼 컸다. 그녀가 공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웬 공이에요?”

    “비치 발리볼 할 때 쓸 공. 비치 발리볼 해 봤어?”

    “전혀요. 경기를 본 적도 없네요, 그러고 보니.”

    “여름이 되면 카닉사 직원들과 자주 하거든. 하옐도, 이글린도 여름이면 거의 중독 수준으로 해서 본사 근처에 경기장을 사 놨어. 당신도 하러 가자고.”

    윈터가 책상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별건 아니고.”

    “별건 아니고?”

    “그냥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번 스포츠는 옷을 잘 갖춰 입나요?”

    “보통은. 하지만 당신이 원하면 안 갖춰 입는 걸로 하지.”

    제 농담에 바이올렛이 정색하자 윈터가 세상 불만 없는 사람처럼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곤 묘하게 야한 자세로 등받이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괴며 바이올렛을 보았다.

    “거절하지 마. 당신 생각처럼 질 낮은 스포츠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바이올렛이 대답을 마치고 사뿐사뿐 걸어 그의 옆에 앉았다.

    “좋아요. 갈게요.”

    “잘됐네.”

    “당신은 데이트로 스포츠 경기를 선호하는군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이번엔 목적이 달라.”

    “목적이 뭔데요?”

    “날 가지고 눈요기하다가 마음에 들면 침대로 데려가라고.”

    “…….”

    경악하는 바이올렛의 표정에 윈터는 더욱 못된 얼굴을 했다.

    “솔직히 당신 내 몸 구경하는 거 좋아하잖아.”

    “……뭐라고요?”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히는데도 윈터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내가 옷 벗으면 당신이 힐끔거리는 걸 모를 줄 알아? 그렇게 벗은 몸이 좋으면 그냥 다 벗으라고 해.”

    “내, 내가 언제 그랬죠?”

    “언제나. 특히 돌아서면 등이 따갑도록 보고 있더군.”

    윈터의 짓궂은 놀림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부정하기에는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지극히 육감적인 몸을 좋아했다.

    그녀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그렇긴 하군요. 심미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조금도 흥분되지 않게 대답할 줄은 몰랐네.”

    “마음에 안 드는 평가였나요?”

    “심미적? 당연히 마음에 안 들지. 내 몸이 고작 당신한테 그거야? 심미적으로 아름다워?”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됐어. 당신과는 무슨 얘기를 해도 경건해지니까.”

    윈터가 툴툴거렸다.

    망할 로렌스 가문 성교육 책자를 발견하면 싹 다 찢어버리고 말리라 결심했다.

    *

    조만간 있을 헤스턴 가문의 작위 계승식의 초대장이 도착하자, 바이올렛은 당일에 입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젠이 다양한 종류의 옷을 행거 가득 걸어 바이올렛의 드레스 룸으로 가져왔다. 바이올렛은 젠이 가져온 옷을 보고 신기함에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예뻐라.”

    “드레스 예쁘죠? 그리고 이건 이동하실 때 입을 평상복들이에요. 요즘 수도 유행이래요.”

    젠이 가져온 것은 윈터가 입는 정장들과 비슷한 재질로 만든 여성 정장이었다.

    바이올렛이 키론에서 평상복으로 입던 것과 비슷하면서, 훨씬 고급인 소재로 아름답게 디자인한 것들이었다.

    바이올렛은 얇은 실크 블라우스와 넓게 퍼지는 긴 플레어스커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젠이 안절부절못하고 말했다.

    “작은 마님. 죄송한데요,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좀 입어 보시면 안 될까요? 제가 빨리 작은 마님 머리를 높이 묶어 봐야 되거든요!”

    “그래, 어서 갈아입을게.”

    젠의 재촉에 바이올렛이 못 견디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동용으로 마련한 옷은 단추 근처에 레이스가 있는 크림색 블라우스와 허리 부분을 벨벳으로 덧댄 장미색 플레어스커트였다.

    금방 끝나는 법이 없는 젠은 머리칼을 한 갈래로 높이 올려 묶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질을 마친 젠이 감탄했다.

    “아, 역시 만족스러워요.”

    “그러니?”

    “네. 지금 당장 다른 머리도 시도를…….”

    젠이 눈을 반짝거리며 말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윈터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도대체 왜 매번 그까짓 옷 갈아입는 데 몇 시간…….”

    퉁명스레 말하던 윈터는 머리칼을 높게 묶고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돌아보는 바이올렛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얼었다.

    그러자 젠이 진지하게 말했다.

    “대표님.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저는 대표님이 사진기에 투자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작은 마님 머리 바뀔 때마다 남겨 놓고 싶거든요.”

    그녀의 말에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지금까지 사진기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기자들이나 사용하는 불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다.

    “하늘에 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작은 마님 사진 하나 찍으려면 천 년, 만 년 걸리고 선명하지도 않은데!”

    젠이 진심으로 원통해 하는 말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윈터가 괜히 화내는 것 아닌가, 하는 바이올렛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내가…… 왜 비행선 따위에 투자한 거지? 사고나 당하고 말이야.”

    “제 말이요!”

    젠이 그리 말하고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드레스 룸을 나갔다.

    윈터가 제 투자실패에 충격받아 있는 사이,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돌아다녀요? 이래서 낫겠어요?”

    “안 다친 쪽으로 힘을 실어 다니고 있어.”

    윈터가 뻔뻔히 대답하고는 벽에 기대서서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움직이지만 윈터가 아무 말이 없자 바이올렛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윈터, 무슨 생각 해요?”

    “당신 처음 봤을 때 생각.”

    나 같은 놈이 어떻게 이런 공주님을 아내로 데려왔을까.

    솔직히 결혼 전 그에게 아내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돈을 주고, 작위를 산다는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바이올렛이,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등장했다.

    원래는 결혼을 하고 나면 그냥, 어차피 공주님은 저를 거들떠도 안 볼 테니 원하는 것들이나 사게 해 주며 살아야겠다는 안일한 생각뿐이었다.

    제 상대가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다섯 살 때 제 곁에 있어 줬다면 덜 상처받았을까, 말하던. 저를 동정하여 지옥이라고 말하던 곳으로 돌아와 머물러 버리는 그런 여자란 걸 알았다면.

    요즘 생각해 보니, 바이올렛이 결혼을 대가로 하지 않고 그냥 제 앞에 나타나 나라 빚을 갚아 달라고 말했다면 그냥 줘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윈터.”

    바이올렛이 한 번 더 불러 윈터가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리면 아내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나저나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군.”

    “요즘 유행하는 옷이라고 젠이 가져왔어요. 어때요?”

    “눈부셔.”

    그의 말이 농담인 줄 알고 바이올렛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작위를 승계받을 때, 후계자들이 보통 자기가 후계자라는 걸 드러내려고 하는 암묵적인 행동들이 있어요. 이번에 디에브가 못 온다면 더더욱 당신에게 주목하게 될 테니 꼭 염두에 둬야 해요.”

    “그래서.”

    윈터의 물음에 바이올렛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더니 조금 턱을 들고 어딘지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당신이 사교계에 대해 교육을 받는 걸 미룰 수 없다는 의미예요.”

    “뭐?”

    “가문의 적자인 디에브를 제치려면 어느 정도 사교계에서 통하는 소양을 쌓아야 해요.”

    “난 그런 쓸데없는 예의가 싫어. 애초에 늘 당신이 하는 그 인사치레들도 다 불필요하다고.”

    바이올렛이 수긍하며 윈터를 바라보았다.

    남편의 삐딱한 자세와 눈빛이 시야에 잡혔다. 언제나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경계,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윈터의 말에 동감했다. 제 말은 속이 비어 있을 때가 많았다. 윈터 블루밍의 말처럼 대부분이 인사치레. 아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그녀는 늘 다소 불편한 존재였다.

    바이올렛은 남편 역시 자신에게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속상하던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그에게 아주 편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가 자신에게 아주 편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윈터, 나는 당신이 이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뭘.”

    “내 모든 말이 인사치레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아요. 정말로 보고 싶어서 보고 싶다고 할 때가 있고, 정말로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있어요.”

    “…….”

    “당신은 직설적인 사람이지만 당신이 하는 말이 전부 진심은 아닌 것처럼, 나는 온갖 예의범절을 지키려는 사람이지만 내 말이 전부 인사치레는 아니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윈터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이 자신을 압도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두지.”

    “공부도 해 주겠어요?”

    바이올렛이 단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요즈음, 윈터는 이전처럼 그렇게 큰 권력욕이 들질 않았다. 만약 제가 공작 작위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제 부모에게 아내의 복수를 해 주려는 것이지, 본인이 원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일을 쉬는 동안 제가 바라는 것을 비교적 명확히 알게 되었다.

    만약 지금 그에게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리라.

    그것을 깨닫고 나니 윈터의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이 예의 바른 공주님의 남편이 되려면 그 망할 공부도 해 줘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사내 보듯 하는 그녀의 눈빛은 귀여웠지만, 그건 앞으로 침대 위에서만 즐기기로 했다.

    “그러지. 그까짓 공부.”

    윈터가 허락하자 바이올렛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이해해 줘서 좋네요. 이제 100질의 책과 15편의 연극을 보면 되겠어요.”

    “……잠깐만. 100질?”

    “전에도 얘기했었잖아요. 사교계에서 대화가 통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100질의 책과 반드시 봐야 하는 15편의 연극이 있다고. 기억하죠?”

    “방금 한 말 취소하지. 그건 무리야.”

    ‘그까짓’ 공부라고 부를 양이 아니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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