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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6화 (96/176)
  • 96화

    야니스가 사라지고 윈터는 마찬가지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살짝 취기가 오른 바이올렛의 상태를 살폈다.

    어쩐지 말하는 게 평소보다 거칠다 했더니, 그녀 역시 거칠게 말할 작정으로 조금 취한 모양이었다.

    윈터가 일어나 바이올렛의 곁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감쌌다.

    “이건 취해서 열이 나는 건가, 그냥 몸이 안 좋은 건가?”

    “취해서 그래요.”

    바이올렛은 취해서 그런 거라 주장했으나 윈터는 이미 그녀가 아픈 것으로 결정한 후였다. 그가 서 있던 하인을 보며 명령했다.

    “가서 의사 데려와.”

    “예.”

    하인이 곧바로 의사를 데리러 떠나자, 윈터는 바이올렛의 얼굴을 살피며 혀를 찼다.

    “몸이 성한 날이 없군, 이 공주님은.”

    “당신 생각만큼 약하지는 않아요.”

    바이올렛이 아이 타이르듯 말했으나 여전히 윈터는 고집이 강했고, 아내가 바람 불면 깨질 듯 허약하다는 고정관념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듯 보였다.

    윈터가 손가락으로 바이올렛의 심장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망할 심장들은 왜 다들 안 좋은 건지.”

    “다들이라뇨?”

    “우리 친어머니. 결혼해서 낳은 쌍둥이가 둘 다 심장이 안 좋다더군.”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많이 들겠네요. 나도 가장 상태가 안 좋을 땐 의사가 바로 옆방에서 상주했었거든요.”

    “그러니 나에게 찾아와 돈을 받아 갔겠지. 뻔뻔스럽게도.”

    “…….”

    아무리 윈터에게 모질게 행동한 사람이어도 그의 친어머니였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앞에서 그런 그녀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녀의 편을 들 수는 더더욱 없어 그저 위로하듯 미소를 지었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마시던 전통주 잔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일부러 내 혈통을 이해해 주려 들 필요 없어.”

    “당신도 나에 대해 더 알려하지 않을 건가요?”

    바이올렛이 술기운이 녹진하게 달라붙어 야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묻자 윈터의 손이 멈췄다.

    “……그건 해야겠지.”

    윈터가 불퉁하게 대답하고, 다시 그녀에게 술잔을 돌려주었다.

    그때, 곧바로 달려온 의사가 바이올렛을 살피기 시작했다.

    *

    외출을 하지 않아도 윈터는 평소처럼 일찍 눈을 떴다.

    다만 격식을 갖춘 정장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고, 포치의 의자에 앉아 얼음을 가득 넣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윈터가 다리만 허락한다면 미치고 팔짝 뛸 표정으로, 커피를 두고 가려던 하옐에게 말했다.

    “……일 좀 가져와. 바이올렛 몰래.”

    “엇, 대표님.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뭘.”

    그러자 하옐이 지금껏 본 적 없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 대표님보다 작은 마님 명령을 더 따릅니다.”

    “네 급여는 내가 주잖아!”

    “작은 마님이 저보고 급여 이상으로 일한댔어요! 대표님이 직원 멱살 잡거나 그러면 작은 마님이 화내실걸요?”

    어차피 윈터가 쫓아오지도 못했으므로, 하옐은 그렇게 그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윈터는 제가 급여 주는 직원들이 다 작은 마님 타령만 하고 있으니 짜증이 나면서도, 제가 바이올렛의 하인이었다면 더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인이었으면, 이라니.”

    무심코 가정하던 윈터가 실없이 웃었다. 아마 여전히 제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남편…….”

    윈터가 곧 말끝을 흐렸다.

    그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전날 일이 수치스러워 부하들과 살금살금 도망치려 하고 있는 야니스 헤스턴을 발견했다.

    “거기, 도련님. 우리 공주님한테 인사는 했나? 안 하면 혼날 텐데.”

    윈터가 묻자 야니스가 움찔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제 적은 편지는 헤스턴가로 보내 드렸네.”

    “……전신으로 보내셨죠?”

    “무슨 소리. 진정성을 담은 편지인데, 내 사람이 직접 가서 전달해야지. 그랬더니 바로 답장을 들려 돌려보내더군. 회의에 응하겠다고.”

    누가 봐도 술 마시고 쓴 그 감정 섞인 편지를 그냥 보냈다는 말에 야니스의 순진한 얼굴에 수치스러움이 번졌다.

    반대로 유쾌해진 윈터가 말을 이었다.

    “헤스턴 가문에는 꼬장꼬장한 자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럭저럭 웃기는 자도 있었네.”

    “웃기려고 한 적 없습니다만.”

    “그거 천부적이군.”

    윈터가 비꼬는 말에 야니스의 꾹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윈터가 느긋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아내가 나오기 전에 도련님은 돌아가지 그래? 내 아내가 귀엽다고 입양하자고 들지도 모르니까.”

    “경!”

    야니스가 버럭 소리쳤으나 윈터는 어깨를 들썩이며 좀 웃고 그만이었다.

    그 소란이 전해졌는지, 하녀 하나가 바이올렛이 배웅을 나올 거라며 야니스를 막아 세웠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바이올렛을 기다렸다.

    *

    바이올렛은 급히 떠나려는 야니스에게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며, 저택 가까운 시장으로 그를 데려갔다.

    도망치려던 야니스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바이올렛과 함께 나온 사용인들이 헤스턴가에 들려 보낼 좋은 특산품들을 사는 동안, 상인들이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밝고 애정 가득한 태도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작은 마님, 무슨 일로 나오셨어요?”

    “이 도련님은 누구시래? 윈터 씨가 화 안 내세요?”

    “윈터 씨 엄청 다쳤다면서요?”

    사람들의 소문이 신경 쓰였는지 자꾸 윈터에 대해 물었다. 그가 정말로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은 사람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해 주느라 자꾸 자리에 멈춰 섰다.

    “남편은 당분간 조심하면 나을 거라고 들었소. 북부 헤스턴 가문의 도련님인데 손님으로 잠시 들른 것이고. 그리고 우리 집에서 일하질 않는데 왜 자꾸 작은 마님이라고 하는 게요?”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부르니 입에 붙었어요.”

    “그보다 시원한 거라도 한 잔 드릴까요?”

    바이올렛이 사정해도 작은 마님 호칭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공주님이라고 부르겠다니, 차라리 작은 마님이 나았다.

    블루밍 가문 영지도 아닌, 분가한 부부의 저택 가까운 시장이었다. 야니스는 어딜 가도 바이올렛을 반기는 사람들을 보며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에쉬가 바이올렛을 마음대로 흔드는 것처럼 보여도 추후에는 그러지 않으리라.

    만약 라크라운드 사람들이 누군가를 왕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바이올렛 로렌스가 될 것이었다.

    이번 방문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야니스는 헤스턴가로 돌아가자마자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

    윈터는 열여덟 살짜리를 사내랍시고 질투하기엔 지나치게 마초적인 남자였다.

    그래서 바이올렛이 배웅을 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굴었지만, 그녀가 떠난 후에는 성질머리를 가라앉히느라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공동 부대표인 안잘리가 저택에 찾아왔다.

    두 사람은 곧장 윈터의 집무실로 들어가 회의를 시작했다.

    귀족이 아닌 손님들의 비율이 유의미하게 늘고 있었으므로, 대중적인 회사의 이미지는 조금씩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호수를 독점해 북부가 말라 죽었다는 책임을 무는 것은 카닉사 입장에서도 손해였다.

    책상에 걸터앉아 앞에 둔 소파에 발을 걸친 윈터가 뒷짐을 지고 선 안잘리에게 말을 이었다.

    “이벤트성으로, 심한 가뭄이 들 때마다 단기적으로 호수를 무료 개방 하는 걸로 하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기부금 내듯이 말씀이십니까?”

    “어. 모양새가 좋잖아. 가뭄이 들면 해결해 주는 기업.”

    “괜찮군요.”

    “기자 부르고, 가뭄 들어서 고생하는 농가 꼬마들 몇 불러서 장학금도 쥐여 줘.”

    “예, 그렇게 헤스턴가와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대가는 그럼 역시.”

    안잘리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에쉬 로렌스 전하와의 공모를 취소하라는 걸로 하는 겁니까?”

    “어차피 우리가 이혼을 안 하는 것으로 헤스턴가와 에쉬 로렌스의 거래 자체가 어그러졌잖아. 그러니 그건 당연하고 그 이상 받아 내.”

    “그 이상이요?”

    “그럼 위자료에 내 아내까지 건드리려 했는데 그냥 놔둬?”

    “…….”

    “그 가문 자체는 망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회사 이미지 훼손되지 않는 한에서 창고에 바닥을 내.”

    “예.”

    평소의 윈터 그대로였기 때문에 안잘리는 별말 없이 그의 명령에 수긍했다. 그리고 이어서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보다 대표님. 진심으로 블루밍 가문 공작 작위 후계자 자리싸움에 끼어드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내가 투자한 돈이 아깝잖아. 아내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바이올렛 부인께서는 정말…… 신기한 분이십니다. 왕성에서 자라신 분의 머릿속에서 어쩌다 그렇게 급진적인 생각이 나오게 된 건지.”

    “급진적인가? 바이올렛은 서자들이 작위를 받은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지금까지 라크라운드에서 서자가 작위를 받았다면 그 이유는 대부분 세 가지 중 하나일 겁니다.”

    “세 가지?”

    “경쟁자가 없었거나, 본부인보다 정부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그 꼬임에 넘어가는 경우, 마지막으로 작위 경쟁자들을 전부 다 죽여 버린 경우죠.”

    그의 말에 윈터가 픽 웃으며 손가락을 접었다.

    “내 경우에는 경쟁자가 있고, 친어머니는 나를 낳은 이후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없을 거고. 그러니 난 마지막 방법을 선택해야 하나?”

    “설마요. 부인께서 그런 방법을 계산하신 건 절대로 아닐 겁니다.”

    “알아. 농담이야.”

    윈터가 손으로 등 뒤를 짚어 뒤로 기댔다.

    “가서 회의 준비해.”

    “예, 대표님.”

    안잘리가 인사하고 막 집무실을 나서려다, 때마침 돌아온 바이올렛과 마주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바이올렛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다가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윈터를 흘겼다.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 건가요?”

    “당신이 잔소리할까 봐 바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타이밍을 놓쳤어.”

    “애초에 안 올라가면 되잖아요. 그보다 무슨 일이었어요?”

    “헤스턴가와 회의할 거 간단히 얘기했어. 이 회의는 안잘리가 알아서 할 거야.”

    윈터가 대꾸했다.

    그리고 차마 열여덟 살짜리도 남자라고 질투가 난다, 는 유치한 말을 꺼내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부모님께 내 작위를 받아 낼 생각인데.”

    “정말요?”

    “해야지. 원래 난 이만하면 부모로서 할 만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투자한 건 받아 내야지.”

    그 말에 바이올렛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윈터가 놀랍다고 느낄 만큼 힘 있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럼 당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뭔데.”

    “헤스턴 가문 같은 대귀족들이 작위 계승식을 할 때, 대부분 가문을 대표해서 후계자들이 악수를 하고 간단히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어요. 후계자가 불확실한 가문들은 그 자리에서 경쟁자들끼리 치열하게 경쟁을 하죠.”

    “디에브를 못 오게 할 건데. 당신 근처에 못 와, 그 자식.”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윈터, 마음은 고맙지만 디에브는 블루밍 공작 가문의 유일한 적자예요. 그런 중요한 행사에 못 오게 할 수는 없어요.”

    여전히 제 남편이 어디까지 냉정할 수 있는지 모르는 바이올렛의 순진한 말에 윈터가 느긋한 얼굴로 입꼬리를 늘였다.

    “내가 오지 말라고 하면 오지 않는 거야. 그 정도는 해.”

    “하지만…….”

    “이건 고려의 여지가 없어. 당신을 그딴 범죄자 새끼와 마주치게 두지 않아.”

    윈터가 서늘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바이올렛이 물었다.

    “그럼 남부에 다녀올 건가요? 급한 일이면 잠깐은 외출 금지 풀어 줄게요.”

    “됐어. 살면서 누가 이렇게 못살게 굴었던 적이 없어서 재밌네.”

    말은 저렇게 해도 저 불같고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성격에 외출 금지는 짜증나는 일이 아닐지…….

    바이올렛이 걱정하는데, 윈터가 인상을 썼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화라도 냈어?”

    “지금은 냈네요.”

    “화내는 거 아냐. 그리고 난 누가 그렇게 쉽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필요하면 자기들이 와야지. 아마 조만간 자기들 발로 오게 될 거야.”

    “무슨 의미예요? 찾아올 거라니.”

    “블루밍 가문 재정은 부모님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하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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