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수법이라뇨?”
남편을 경주마 취급했다는 것을 들킬 수 없어 바이올렛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른 척을 했다. 그러자 윈터가 바이올렛이 만진 목덜미를 감싸 쥐며 표정을 구기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편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야니스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물었다.
“두 분…… 이혼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이혼이란 단어에 예민한 윈터가 정말로 싸움을 하려 들어 뒤에서 사용인들이 바쁘게 말렸다.
“대, 대표님. 진정하십시오!”
“참으세요!”
“저 자식 당장 쫓아내!”
윈터가 버럭 소리를 쳤다. 야니스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꿋꿋하게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 들었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떠밀며 말했다.
“분위기를 풀려면 술을 한잔 하는 게 좋겠군요. 자리를 옮기죠.”
그녀의 노력으로 다행히, 세 사람은 잠시 진정한 상태에서 칵테일 재료를 가득 채워 둔 다른 응접실로 향했다. 널찍한 의자에 앉아 바이올렛은 하인이 따라 준 달짝지근한 술에 물과 얼음을 넣어 희석시킨 것을 한 모금 마셨다.
야니스가 말했다.
“그건 처음 보는 술이군요.”
“카닉 일족의 전통주예요. 입에 맞아서 종종 마시게 됐어요. 한 잔 드시겠어요?”
“시도해 보겠습니다. 저는 희석하지 않은 걸로 주시지요.”
그러자 하인이 야니스에게도 전통주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그사이 참다못한 윈터가 테이블을 탕 쳤다.
“망할 귀족들은 도대체 본론 얘기하기 전에 왜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가 긴 거지? 인사치레라면 아까도 했을 거 아냐!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군!”
안 그래도 제 아내와 결혼하려 드는 놈팡이가 보낸 사람과 한 공간에 있는 게 불쾌했던 윈터는 야니스 쪽으로 테이블을 엎어 버리기 직전이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의 야니스도 지지 않고 팔걸이를 쾅 내려쳤다.
“어떻게 호수 가격을 열 배를 받겠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경께서는!”
“안 판단 소리잖아!”
“존대해 주십시오! 제가 비록 경에 비해 어리지만 헤스턴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닥쳐!”
“이렇게 입이 험하시니 이혼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지금 여기서 이혼 얘기가 왜 나와, 이 미친 개…….”
이혼 소리가 나오자마자 못 참고 윈터가 욕설을 퍼붓자 바이올렛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격 나쁜 두 사람이 충돌하니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죠. 내가 발언권을 줄게요. 발언권이 없으면 입 다무세요, 두 사람 다.”
“하지만, 부인!”
“저 핏덩이가 열 받게 굴잖아!”
“그러지 않으면 저는 두 분과 대화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두 사내가 선생님에게 주의받은 아이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았다.
“먼저 말해요. 연장자고, 이 집의 주인이니까.”
“헤스턴 가문에서 나에게 그 호수가 있는 일대를 팔았어.”
“일대라는 게 얼마만큼이죠?”
“그 호수 전체.”
“……네에?”
바이올렛이 놀라 있는데 야니스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바이올렛이 야니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허락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윈터 경께서 이전에 왕실의 빚을 갚아 주셨죠?”
“그랬죠.”
“그때, 저희 헤스턴 가문도 왕실의 빚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저희는 왕과 나라를 지키는 기사 가문으로서 충절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니까요.”
“어머, 몰랐어요…….”
“처음엔 숲을 팔면 갚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헤스턴 가문에는 질 좋은 나무가 수도 없이 많고, 그것을 베어 팔면 가문은 휘청거리겠지만 라크라운드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무턱대고 빚을 받은 후 확인해 보니 나무를 전부 베면 홍수가 났을 때 마을 전체가 잠기게 될 거라더군요. 그래서 결국 호수를 먼저 팔게 된 겁니다.”
“그래서 파셨군요. 남편에게.”
“호수가 없어도 강이 흐르니 물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몰랐습니다. 작년부터 북부에 그렇게 큰 가뭄이 들어 강물이 마를 거라고는…… 그리고 저 장사치가 호수의 물값을 받아 낼 거라고는!”
“……윈터.”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자 내내 억울한 표정을 짓던 그가 생각해 보니 별로 할 말이 없는지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도 내가 가진 건물을 전부 담보로 잡혀서 겨우 산 거야. 위험 부담 엄청 안고. 여차하면 나도 망할 뻔했어.”
“…….”
“장사가 다 그런 거지.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거.”
윈터가 아예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는지 고개를 들고 뻔뻔히 말했다. 바이올렛이 야니스를 보자 그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올해는 봄부터 가뭄이 너무 심해, 이렇게 물을 사서 쓰다가는 북부의 삼림이 다 말라 버릴 겁니다.”
“저건 천 배로 과장한 거야. 말라 버리긴 뭘 말라 버려. 북부 가운데로 흐르는 강만 세 개야.”
“실개천입니다.”
“강이다, 인마.”
“제 여동생도 뛰어넘을걸요.”
“네 여동생 키가 5m쯤 되는 모양이지?”
발언권이 뒤섞이자마자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했다.
윈터는 카르잔의 아들인 야니스가 눈엣가시였고, 야니스는 원래도 윈터를 싫어했던 데다가 기사 가문의 사람다운 기백으로 체격도 나이도 크게 차이 나는데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윈터가 바이올렛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원래 우린 거래는 하지만 사이가 안 좋아. 그래서 그까짓 별장 하나 안 빌려주는 걸로 저쪽에서 북부 전체가 우리랑 거래를 끊어 버리겠다고 나온 거지.”
“헤스턴 가문에서는 나와 꼭 결혼을 하려는 마음이 컸고요. 돈이 필요하니까.”
바이올렛이 수긍하며 야니스를 보았다. 야니스는 그녀의 눈빛이 제 아버지보다도 서늘하다고 생각하며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봤습니다, 헤스턴 가문을. 이해는 하지만 가문의 이득을 위해서 제 뒤통수를 칠 줄은.”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라크라운드의 빚을 갚으시려고 윈터 경과도 결혼을 하신 분이시니 이것도 받아들여 주실 줄 저희끼리 멋대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야니스는 말하면서도 다급한 마음에 멋대로 생각한 것이 수치스러워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문 회의에서는 바이올렛의 애국심에 기대 보자는 식으로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 가문과 가문의 일로 생각하고 그녀의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게 맞았다.
야니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래서 두 분은 이혼을 안 하시는 겁니까?”
“네. 안 해요.”
바이올렛이 대답하자 옆에서 윈터가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그러자 야니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래도 미리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이올렛이 담담한 얼굴로 윈터를 보며 물었다.
“이제 호수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위자료로 줬으니.”
“아쉽게도 당신에게 준 건 별장 근처 일부분이지, 호수 전체가 아니야. 별장은 적자가 나지만 호수는 엄청난 흑자를 내거든.”
“정말 돈에 관해선 치밀하군요.”
“뭘 새삼.”
윈터는 유언장에도 제가 죽고 10년 뒤에나 바이올렛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는 바이올렛을 영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효율적인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야니스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헤스턴 가문이야 빚을 나눠서 책임지겠다고 나설 때부터 파산도 각오했습니다만, 숲이 줄어들면 앞으로 영지민들의 생계도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윈터 경께서 선심 써서 우리에게 호수의 물을 그냥 제공해 주실 것 같지도 않고요.”
야니스의 말에 윈터가 혀를 찼다.
이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가 호수의 물을 북부에 그냥 내줘야 할 분위기였다. 바이올렛은 영지민 걱정이 우선일 테니 야니스의 편에서 저를 설득할 것이고, 자신은 그런 바이올렛을 이길 자신이 조금도 없었다.
그냥 대가로 조만간 파티나 좀 화려하게 하자고 요구해야겠다 생각하는데, 바이올렛이 무서운 얼굴로 야니스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남편의 호의를 얻어야 할 상황인데 그렇게 무례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거군요.”
“……예?”
“라크라운드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영지의 상황이 안 좋아진 건 명백히 영주의 실책입니다. 내 남편과 합의를 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자존심만 내세우죠. 나를 한 인간으로 본 게 아니라 위자료를 담은 상자로 본 것 아닙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야니스는 수치스러움에 울기 직전이었지만 바이올렛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헤스턴 가문이었다면 이딴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겁니다. 합의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카닉사와 헤스턴 가문이 합의를 하셨어야지요.”
왕족이던 바이올렛의 적합한 비판에 아무리 명문가의 도련님인 야니스라도 소리 한 번 못 내고 혼나고만 있었다. 제 아내의 위세에 매우 기분이 좋아진 윈터가 야니스의 빈 잔을 가득 채워주고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 애 울겠군.”
야니스는 그렇게 말리는 윈터가 얄미워 미칠 지경이었지만 모든 부분에서 바이올렛의 말이 맞았다.
야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바로 돌아가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윈터를 보며 아까보다 어른스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카닉사에서 헤스턴 가문의 영지 관리관들과 회의를 열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윈터 경.”
“장소는 카닉사 별장으로 하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이혼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야겠군요.”
야니스가 목이 타는지 윈터가 다시 따라 준 카닉 일족의 전통주를 한 잔 더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북부까지 오며 소문이 많이 와전된 모양입니다. 저는 그저 두 분 사이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틀어진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완전히 잘못…….”
그렇게 말하던 야니스가 비틀거렸다. 바이올렛이 뒤늦게 윈터가 든 술병이 거의 빈 것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카닉 일족의 전통주는 단 맛에 비해 독한데, 윈터가 계속 따라주어 멋모르고 들이켰던 모양이다.
윈터가 술병을 곧바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북부 사람은 다 술을 잘 마시는 줄 알고 안 말렸지.”
그때 야니스가 비틀비틀하다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윈터가 재밌어하며 바이올렛의 팔을 당겼다.
“놔둬, 깨면 집에 가겠지.”
“손님을 이대로 두자는 건가요?”
바이올렛이 윈터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야니스의 팔을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침실이 많으니 자고 가도 되지만 헤스턴 가문에 연락부터 해야죠.”
“……바이올렛, 당신이 더 모진 거 아니야? 만취한 사람한테 연락하고 자라고?”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라온 야니스는 해롱해롱한 상태로 펜을 들고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그럼 적어 보겠습니다.”
감정이 폭발해서 할 말, 안 할 말 모두 쏟아붓고 난 야니스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잠시 후, 그의 부하들이 야니스를 부축해 그를 침실에 재웠다.
윈터가 삐뚤빼뚤한 글씨의 편지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가관이군.”
“왜요? 뭐라고 적었어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편지를 보았다.
헤스턴 원로회 귀중.
잘 들으십시오!
바이올렛 블루밍 부인을 만나 뵈었더니, 부인께서는 윈터 경과 이혼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답니다.
그러나 설령 이혼을 하실 거라고 해도 한 번 나라를 위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신 바이올렛 블루밍 부인을 제 새어머니로 모시려 했다니요? 심지어 부인의 의중도 묻지 않고, 부인의 따듯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이용하려 하시다니요? 제가 부인께 얼마나 혼났는지 아십니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것은 헤스턴 가문의 수치입니다. 저는 가문에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아마 너무 취해서 본인이 세 번이나 적은 것을 모르는 듯하다.) 실망했습니다!
분노하신 선조들의 망령이 찾아올 겁니다.
다행히 윈터 블루밍 경께서 성정은 더러우시지만 부인께만은 꼼짝을 못 하셔서 호수 문제에 관하여 헤스턴 가문과의 회의에 응하셨습니다.
헤스턴 가문의 후계자로서 부탁드립니다. 당장 여기 응해 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가문에서 나갈 겁니다!
카르잔 헤스턴의 아들
야니스 헤스턴 배상
엉망인 글씨와 반 토막 난 예의, 제멋대로인 감상을 보며 바이올렛은 한숨을 폭 쉬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하면 헤스턴 가문이 우리와 적대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