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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2화 (92/176)
  • 92화

    그가 대답이 없는 걸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바로 거절하지 말고 좀 더 생각해 줘요. 조건을 말하면 들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들어줄 테니까.”

    “……심지어 조건을 말하라고?”

    “그래요. 물론 싫겠죠.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대신 이번에 이혼을 취소해 주면, 그 이후에 이혼에 대한 결정권은 온전히 당신에게 줄게요. 약속해요. 당신이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하게 해 주죠. 당신이 이혼을 취소하는 걸 허락한다면 당장 계약서를 쓰겠어요.”

    “…….”

    “윈터, 내 말 듣고 있는 건가요?”

    바이올렛이 걱정스럽게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제가 말하는 사이에도 윈터의 표정은 수십 번이 바뀌었는데, 특히 이혼에 대한 결정권을 온전히 주겠다고 했을 땐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지를 않은 것 같았다.

    이러다 숨 막혀 죽는 것 아닌가 불안해 숨을 다시 내쉬도록 등이라도 두드려야 할까 싶었다.

    바이올렛은 역시 아픈 사람을 붙잡고 너무 과한 이야기를 한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급했어요. 아픈 사람 붙잡고 이게 무슨 소리인지.”

    바이올렛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야기하면 나가 주기로 했으니 나갈게요. 더 자요.”

    그녀가 일어서려다가 어지럼증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윈터만큼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많은 비를 맞은 데다가 밤새 가슴앓이를 한 탓에 몸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 덕에 겨우 멍한 상태에서 벗어난 윈터가 바이올렛의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표정을 굳혔다.

    “의사는 뭐 한 거야. 왜 이렇게 열이 심해?”

    “단순한 감기예요.”

    “단순한 감기가 어디 있어? 라크라운드에서 어린이가 가장 많이 죽는 병이 감기야.”

    “나는 어린이가 아니니까요. 가장 건강할 나이라고요.”

    “내 생각은 다른데. 이게 가장 건강한 상태면 나이 들어서 어쩌려고.”

    바이올렛은 안 그래도 지쳐 있었고, 윈터의 드센 기를 꺾고 이야기하고 나니 완전히 탈진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윈터는 완전히 반대였다. 죽을 힘도 없다고 생각하며 늘어져 있던 몸에 갑자기 펄펄 힘이 끓어올랐다. 다리가 다쳐 있는 것이 유감이었다.

    “나가지 않아도 돼. 내가 아파서 만사가 짜증난 거니까.”

    “아…… 많이 아파요? 진통제 가져다 달라고 할…….”

    말하던 바이올렛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려 하자 윈터가 욕설을 하며 고개를 제 품으로 당겼다.

    “우리 중에 누가 위급한 환자인지 모르겠군.”

    “나는 환자가 아니에요.”

    “큰일 났네. 열이 너무 심해서 헛소리를 하는가 보군.”

    바이올렛은 그 와중에 제 고개가 꺾일까, 품으로 당겨 주는 윈터를 보며 어느 정도 희망을 느꼈다.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고려는 해 줄 건가요?”

    “이혼 말인가?”

    “으응. 이혼이요.”

    “맘대로 해. 대신 이번에 취소하면 당신 말대로, 다시는 당신 쪽에서 이혼 얘기 꺼내지 않는 거야.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시간 아까우니까.”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필요 없어.”

    그의 귀찮다는 듯한 대꾸에 바이올렛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당신은 시간을 중요시 여기니까.”

    그녀가 고개를 들고 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해요, 흑자 전환.”

    “아직 정확히는 이해 못 했지만 그게 여자들이 좋아할 말이 아니란 것쯤은 알아, 이제.”

    바이올렛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가 부모와 멀어지면 사실상 바이올렛이 반드시 이혼하기로 결심했던 이유 중 많은 것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그를 마음에서 밀어내는 일을 포기하기로 했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문을 잠그고 온몸으로 막았는데도 넘쳐흘러 들어오던 그였다. 이제는 그 문을 그냥 열어 버리기로 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잠겨 버릴까. 섞이게 될까.

    문을 열기로 마음먹고 나니 바이올렛은 슬프면서도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마음에 걸렸던 것을 해결해 보기로 했다. 돈을 주고 사랑을 사려는 버릇이 있는 이 남자의 못된 사랑법부터 고칠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겠다는 걸 알려 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에게 부채감이 있었다. 돈으로 그 부채를 갚아주는 건 마음에 안 드는 듯하니,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윈터가 일어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걸려 있는 지팡이를 찾아 들고 바닥에 내려섰다.

    “아, 아직 일어나지 말아요!”

    바이올렛이 한발 늦었는지 윈터가 다시 침대에 주저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못 견디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리며 말했다.

    “누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해, 도대체.”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힘없는 와중에 실소하며 물었다.

    “반성하는 건가요?”

    “후회하는 거지.”

    “반성도 하세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픽 웃더니 손으로 제 머리칼을 슥슥 쓸며 말했다.

    “아, 중요한 얘기 하는데 머리가 무례해서 거울 좀 보려고 했더니.”

    그가 빈정거리는 건지, 자기 비하인 건지, 그냥 농담인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바이올렛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도 잘 어울려요.”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민망했는지 입술을 힘주어 닫았다. 그러자 윈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자기는 빗질 안 하면 나와 얘기도 안 하려 들면서?”

    그러자 바이올렛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안 그러잖아요. 당신이 빗질도 안 하면 얘기도 못 하는 게 무슨 부부냐고 한 게 신경 쓰여서. 그래서 요즘은 젠에게 일부러 잔머리를 내 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바이올렛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윈터를 보며 말했다.

    “사족 붙이지 말라고 했죠. 미안해요.”

    “뭐? 당신 머리 묶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얘기가 왜 안 중요…… 아니다, 그 전이 이혼하지 말자는 얘기였구나. 그러네. 본론에 비하면 확실히 사족이군.”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몸이 무거워 제대로 가누지를 못하는 바이올렛을 힐끔 보며 말했다.

    “자고 일어나서 마저 이야기하지. 당신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이니까.”

    “그래야겠어요.”

    그렇게 대답한 바이올렛이 그의 옆에 눕자 윈터가 돌아보며 물었다.

    “왜 누워?”

    “당신을 혼자 재울 수가 없어서요.”

    바이올렛이 그리 말하고는 베개를 당겨다 베고 윈터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쌌다. 그녀가 눈을 감으며 사과했다.

    “내가 당신 부모님에 대해 한 말 때문에 많이 화났죠? 미안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했어요.”

    “뭐라는 거야. 어머니가 날 내쫓는다고 말했다는 거 다 들었어.”

    “내가 먼저 작위 얘기를 꺼내서…….”

    “내가 사족 붙이지 말라고 했잖아.”

    “이건 또 사족인가요?”

    “지금 기분에 들을 얘기가 아닌 건 다 사족이지.”

    “아…… 그러네요.”

    바이올렛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잠을 청했다.

    그녀는 많이 피곤했던지라 금방 흔들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윈터는 아직 바이올렛이 한 말을 확실히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 계약서에 적혀야 직성이 풀렸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하니 재워 주지만 눈을 뜨면 억지로라도 손에 펜을 쥐게 해서 영원히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

    윈터는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자신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에게 제 선택을 이해시키려 들었다. 그녀가 제 유산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배워놓고도.

    윈터는 지금 제가 왜 죽겠다는 쓰레기 같은 생각을 했나 강력하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제가 다쳤다는 것만으로도 바이올렛은 울고 두려워하며 곁에 있으려 들었다. 제가 죽었다면 바이올렛은 더 크게 슬퍼했을 것이다.

    “이혼을 하지 말자니. 어처구니없는 소리군.”

    윈터는 입꼬리가 너무 끌려 올라가 뺨에 난 긁힌 상처에 통증이 올 정도였다.

    이제 이 여자가 다시 제 것이 되리라는 생각이 그의 몸을 덥게 했다. 그동안 그는 바이올렛에게 아무런 욕구도 가지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다. 체념해야 한다고 스스로의 감정을 죽였다. 그래야 그녀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제 발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윈터는 처음으로 제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인생을 돌이켜 보니 사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운이 좋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돈을 벌 수 있을 리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제 반쪽이 공작 혈통이라는 건 정말 드물고도 드문 확률이지 않나. 세상은 귀족 비슷한 피만 닿아도 젠체하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그런 거 다 차치하고, 아내가 수세에 몰려 결국 이혼을 포기하고 제 발로 여기 돌아와 머문다는 것은 윈터에게 천운이었다.

    그는 원래도 욕구가 남들보다 수배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 강한 욕구로 세상의 돈을 전부 긁어모을 기세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오며 느꼈던 그 강한 욕구들과도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인 열망이 그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윈터는 저도 모르게 바이올렛에게 잡혀 있던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움켜쥐려 들었다가 가까스로 힘을 풀었다.

    “……당신은 논리적이지만 마음이 너무 약해.”

    그녀는 제가 불쌍했던 것이 분명했다. 침실도 꼭 따로 써야 예의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제 발로 남편의 침대 위에서 잠든 데에 동정심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다리가 최대한 천천히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바이올렛은 아주 깊이 잠들어 윈터가 천천히 손을 빼내는 동안에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윈터가 다시 지팡이를 찾아 들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머리까지 지끈거리는 통증에 속으로 제 멍청함을 욕한 후 침실을 나가 다급하게 하옐을 찾았다.

    하옐이 불만이 가득해 한 소리 하려고 다가오다가 갑자기 안색이 싹 달라진 윈터를 보고 곧바로 물었다.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커피와 진통제 가져와. 둘 다 독한 걸로. 그리고.”

    “소장과 연구원들이라면 당연히 입막음했어요. 대표님 다치신 이유는 술 마시고 계단에서 구른 걸로 했고요.”

    “그게 아니라.”

    윈터가 제 입으로 말하는 게 믿기지 않아 잠깐 뜸을 들인 후 작게 얘기했다.

    “헤스턴과 재혼을 하기 싫어하잖아, 바이올렛이.”

    “예.”

    “그 해결책으로 나와 이혼을 취소하는 게 어떠냐고 하더군.”

    그 말에 하옐의 눈이 커졌다. 제 입으로 말하고서야 실감이 나는지 윈터가 순간 아픈 걸 잊고 실실 웃었다. 멍하니 그를 보고 있던 하옐이 뒤늦게 이해하고 들뜬 얼굴로 펄쩍 뛰었다.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잖아요!”

    “뭐…… 그래, 솔직히 좋은 소식이군. 이대로 헤스턴 가문 작위 어쩌고를 진행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어. 그 망할 에쉬 로렌스와 카르잔 헤스턴이 뒤통수 맞는 꼴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체증이 가라앉는다고.”

    “아휴, 아무렴요.”

    하옐은 적당히 호응해 주며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아내가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하던 윈터는 폭우 속에 비행선을 끌고 나가는 정신 나간 짓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유서에는 제 부모 탓이라고 적었지만, 진짜 이유는 바이올렛이 그를 떠날 것이기 때문임을 하옐은 알았다.

    하옐은 들떠 있다가 금방 심각해져서 그에게 말했다.

    “대표님, 마음 놓으실 때가 아닙니다. 이런 말 죄송하지만…… 주인어른과 마님 두 분께서 한 번 작은 마님을 해하신 적이 있잖아요. 두 번은 못 그럴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자 윈터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하옐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 오늘따라 쓸 만한 말만 골라 하는군. 필요한 건 안 가져오지만.”

    “아, 커피랑 진통제요!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 혹시 작은 마님이 말 바꾸실지도 모르니까 사용인들에게 미리 다 알려 놓으면 안 됩니까?”

    “……네가 원래 이렇게 똑똑했나?”

    윈터가 진심으로 놀라워하더니 어서 가서 소문내라고 문을 턱짓했다.

    “가서 말해. 대신 바이올렛 자니까 큰 소리 내면 다 해고야.”

    “전혀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하옐은 그렇게 말해 놓고 제가 신나서 복도를 폴짝폴짝 뛰며 달려갔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짤막짤막하게 꺅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맡겨 놓은 사표를 회수하기 위해 룰루에게로 몰려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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