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비행선이 추락하기 전, 어느 정도 고도에 올라 멈추자 윈터는 시계를 확인하고 노트에 고도와 시간을 다시 적었다. 그리고 체공 시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할 일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비행선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드디어 벗어나는구나. 이번에는 정말로 끝나는 거겠지. 그런 희열이 들었다.
그리고 자꾸만 바이올렛이 떠올랐다. 사실 지금이 아니어도 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아 가며, 점점 더 많은 것을 볼 때 그녀가 떠오른다.
사람이라는 게 참 어리석어서, 옆에서 아무리 설명해 줘도 제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받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바이올렛만큼은 말해주었음에도 윈터는 제 부모가 저를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서러운 일이다.
그가 조종간에서 손을 뗐다. 그때 무선 전신을 보내는 반짝이는 소재로 된 판이 반대로 뒤집혔다. 그것이 일곱 번 뒤집히면 비상 탈출을 하라는 신호였다.
소장이 눈치챘나 보다. 불쌍한 놈.
그렇게 무시하려는데 코드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계속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비상 탈출 신호가 왔다.
그 신호는 윈터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오래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 비행선 아래쪽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뭔가 문제가 생긴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비상 탈출 신호는 반복되고 있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반복할 기세였다.
윈터는 그 신호를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멈추지 않고 그에게 살아남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소장은 기술을 신봉하는 사람이니 몇 번 해 보고 답이 없으면 무전이 안 가나 보다 하며 멈췄을 것이고, 하옐이었다면 좀 더 길었겠지만 그는 보이는 것보다 심약한 사람이라 우느라고 몇 번 하다가 중간부터 속도가 느려졌을 것이다.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포기를 모르는 사람은 바이올렛이었다.
제가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는지, 삶을 포기해 버렸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3년이나 참고 견뎠을까 싶었다.
윈터가 혀를 찼다. 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 바이올렛이라면 별수 없었다. 그녀가 보는 곳에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비행선이 추락하기 시작한 동시에 그는 비상 탈출 레버를 당겼다. 비행선의 천장이 열리고 낙하산과 함께 떠오르는 순간, 벽에 쾅 충돌하고 꽤 먼 곳까지 세차게 날아가 쾅 떨어졌다.
“차, 찾았습니다! 대, 대표님 여기 계십니다!”
희미하게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들 사이에 바이올렛이 보였다.
망할 바이올렛 블루밍의 성실함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비행선과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그녀의 성실함이 지문처럼 제게 제 존재를 알리지만 않았다면, 여전히 그녀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가끔 윈터는 바이올렛이 제 주변에 빛을 뿌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녀가 가까워지면 주변이 밝아지고, 그녀가 어루만지면 자신을 유혹하던 죽음이 멀어진다.
‘살았구나.’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기분 나쁘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윈터는 곧바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고, 긴 수술 시간이 끝난 후 다시 수도 저택으로 옮겨졌다.
저택의 주치의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윈터의 상태를 확인하고, 경건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작은 주인님께서는 정말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강골이십니다.”
“……그러한가.”
“예. 저 같은 약골이 이 정도로 충돌했으면 뼈가 다 부러져 평생 누워 있어야 했을 겁니다. 작은 주인님께서는 한 달 지팡이 짚으시고, 세 달 안 뛰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보다 작은 마님이 더 걱정이십니다. 열이 높지 않으십니까.”
“나는 원래도 감기가 잦은 편이잖나.”
“그건 제가 제일 잘 압니다만, 지금은 정말로 쉬셔야 합니다.”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다시 꿈쩍을 하지 않고 굳어 있었다.
침대 위의 윈터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정도로 다쳐 있었다. 흔들리는 비행선에 계속 있었던지라 물건에 긁히고 멍들었다.
바이올렛이 손을 뻗어 윈터의 뺨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언제쯤 깨어날까?”
“글쎄요. 워낙 튼튼하셔서 곧 깨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 대상입니다, 연구 대상.”
의사가 마음 놓으라는 듯 말하고 침실을 나갔다.
잠시 후 겨우 마음을 추스른 하옐이 들어와 보니 바이올렛은 서둘러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하옐이 멈칫하고 옆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방금 본사 집무실 서랍에서 대표님이 써 놓으신…… 유서를 찾았답니다.”
그 말에 바이올렛이 하옐을 돌아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아마, 저기…… 대표님께서 비행선 타러 가시기 직전에 제임스 전하께서 오셨거든요. 그때 무슨…… 가문에서 내쫓겠다는 말이 나왔답니다. 그걸 비관하셔서.”
하옐이 드문드문 말하다가 저도 울음이 터져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다시 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참 나쁜 사람이구나.”
“맞습니다! 이제 작은 마님도 제 마음 이해하시죠? 정말 때려치울 겁니다, 저! 사표 쓸 거라고요!”
어떻게든 분위기를 끌어 올려 보려 하옐이 괜히 큰소리치는 걸 알고, 바이올렛이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옐이 말했다.
“그보다 작은 마님, 어서 침실로 돌아가시죠.”
“오늘은 여기서 자겠네. 중간에 깨서 또 나쁜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러다 정말 병나십니다.”
“여기 이 진짜 환자처럼 내리 잘 테니 걱정 말게.”
바이올렛이 달래듯 말하자 하옐이 별수 없이 침실을 나섰다.
윈터의 침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비가 와서 여전히 어두웠지만 시간은 아침 7시였다.
바이올렛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윈터의 곁에 누워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서, 갑자기 어떻게 주워 모아야 할지 몰랐다. 그저 멍했다.
*
먼저 눈을 뜬 것은 윈터였다.
비가 그쳐 있었고, 닫아 둔 커튼으로 흐린 날의 햇살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윈터는 제 손목을 꽉 붙들고 잠들어 있는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그가 손목을 당기자 바이올렛이 신음하며 눈을 떴다. 그리고 이내 윈터가 깨어난 걸 알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네요.”
“뭐 하는 거야?”
“그걸 어떻게 당신이 물어요.”
바이올렛은 애써 미소를 지었으나 전날 밤 울었던 탓에 눈가가 붉었고, 목소리도 숨도 떨리고 있었다.
윈터가 부목을 댄 제 다리를 보자 바이올렛이 서둘러 말했다.
“한 달 지팡이를 짚고, 세 달 안 뛰면 나을 거래요.”
“지옥이 따로 없군.”
“자업자득이에요. 누가 그렇게 비가 오는데…….”
바이올렛이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전날 밤, 윈터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실에서 그녀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윈터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가슴이 미어져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두들겼다. 사람들이 가끔 너무 서러울 때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들기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여기 맺힌 응어리를 어떻게든 깨 보려는 시도였던 듯했다.
바이올렛이 맥이 제대로 뛰는 건가, 걱정스러울 정도의 창백한 손으로 윈터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얘기 좀 해요.”
그러자 윈터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지금 얘기를 나눌 기분으로 보여?”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낮았다. 윈터는 타인에게 겁을 주기 위한 모든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바이올렛은 그런 것에 두려움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해요. 지금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우리가 이혼 서류를 사이에 두기 전에 꼭.”
“나가.”
“금방 끝날 이야기예요.”
그녀가 재촉하자 윈터가 제 옷깃을 쥔 바이올렛의 손을 움켜쥐었다.
“당신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고.”
윈터의 눈동자에 어두운 불이 붙었다. 음울함이 그의 전신에 독처럼 번져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냥, 그런 그의 음울함에 질식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 놓고 정리라니, 어불성설이었다.
지난 세 달간의 숙려 기간은 그녀에게 그저, 다시 윈터 블루밍을 사랑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입을 맞추고 잠자리를 하면서 이혼을 준비하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윈터 블루밍은 그런 사람일지 몰라도 바이올렛 로렌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제발, 윈터. 금방 얘기하고 나가 줄게요. 그냥…… 금방 끝날 이야기예요.”
바이올렛의 고집에 윈터가 날카로운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게도 다리를 다쳐 뭘 걷어차거나 뒤집을 수 없었으므로 더 이상 성질을 낼 수도 없었다. 그는 물리적인 이유로 체념하고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럼 빠르게 말해. 사족 붙이지 말고.”
사람이 죽을 뻔하다 살아난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윈터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마주 볼 자신이 없는지 고개를 떨구고 입을 열었다.
“오렌이라는 섬에 도망칠 곳 마련해 줬다는 건 들었어요. 그래서…… 더 말하기 힘들었어요. 이해해 줘요.”
“무슨 말이야. 떠나질 않겠다는 건가?”
“그 말이에요. 준비해 준 건 미안하지만 도망치는 건 못 하겠어요. 모를 땐 무작정 떠났지만, 한 번 해보고 나니 너무 힘들어서요.”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안 돼.”
“…….”
“절대 안 돼.”
윈터의 목소리는 무엇이든 으깨 버릴 듯이 무겁고 거칠었다. 바이올렛이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당신이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어요.”
“어차피 방법도 모를 거 아냐.”
“무슨 방법이요?”
“죽으면 몸이 바뀌는데 무슨 수로.”
윈터가 당장이라도 분노에 끓어 넘칠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뒤늦게 탄성하며 물었다.
“내가 목숨을 끊겠다는 말로 들렸나요?”
“그거잖아.”
“그렇지 않아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
윈터는 여전히 신뢰하지 않는 투였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턱을 붙잡아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집어삼킬 짐승 같은 눈이 바이올렛을 옭아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래, 내가 당신한테 화를 좀 냈다. 하지만 당신 같으면 화가 안 나겠어? 내 부모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꿈도 꾸지 마. 당신은 못 죽어. 죽어 봐, 어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살려낼 테니까.”
윈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바이올렛이 눈앞에서 죽은 이후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계속해서 이럴 것이다. 계속해서 이렇게 목에 올가미가 걸린 듯이 살아야 하리라.
그는 그것이 두렵고 끔찍했다.
윈터가 그녀를 부수기라도 할 듯이 노려보고 있을 때, 바이올렛의 건조해진 입술이 열렸다.
“이혼을…… 미뤄요, 우리.”
“절대 안…… 어?”
“이혼을 취소했으면 해요, 윈터.”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오늘이 5월 20일이에요. 숙려 기간이 끝났죠. 그래서…… 당신이 이혼장을 가져오기 전에 먼저 해야만 하는 말이었어요. 말 바꾸는 것처럼 들리겠죠. 정말 미안해요.”
윈터의 손이 침대로 툭 떨어졌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내가 헤스턴 가문과 결혼하지 않아도 아무도 트집 잡지 못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고 대답을 기다렸는데, 윈터는 언제 그렇게 화가 나 있었냐는 듯 완전히 얼이 빠져서, 마치 막 자다 깬 사람 같은 표정으로 눈도 깜빡거리질 않고 있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