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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0화 (90/176)

90화

그러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더구나. 아내가 홧김에 모진 말을…….”

“그래도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되죠.”

윈터는 다툼이 있었던 것도 몰랐으면서 어르듯이 말했다. 그러자 제임스가 사색이 되어 물었다.

“서, 설마…… 바이올렛이 너에게 그 이야기까지 해 버린 게냐?”

“예. 아내는 원래 저에게 무엇이든 바로 말합니다.”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무슨 말을 했는데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두려운 표정을 짓는 건가. 윈터는 제 어머니와 바이올렛 사이에서 오갔을 이야기를 추측해 보았다.

바이올렛은 제게서 도망치던 순간까지도 제 부모에 대한 모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서, 이혼 직전에 와서 자신에게 그런 꺼내기 어려운 말을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윈터가 한참 생각하다가, 열두 살의 소년을 가장 불안하게 했던 말을 꺼냈다.

“블루밍 가문에서 저를…….”

그가 말끝을 흐리기만 했는데도, 제임스가 펄쩍 뛰며 오히려 성질을 냈다.

“아주 널 네 어머니와 갈라놓으려고 작정을 한 게구나! 윈터,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넌 내 친아들이야. 어떻게 널 가문에서 쫓아내겠니? 물론 네 어머니의 가문에서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 효력도 없을 거다.”

정말로 그런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다.

윈터는 그제야 아내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못된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했다. 제가 돈을 벌고, 제 가족은 자신을 가족으로 여기는. 제가 좋아하던 이 메커니즘을 둘러싸고 있던 가짜로 만든 가족애를 깨뜨리려 든 이유가 뭐였는지.

온 사방으로 인연의 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실들을 전부 당겨 보니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 혼자 실을 끌고 앞장서는 사이, 부모라고 믿던 사람들은 그가 떨어뜨리는 조각을 주워 가며 살았다. 그가 부서지고 있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 조각을 주워 모아 돌려주려 했던 바이올렛은 제 손으로 내쳤고, 이제 그녀는 그 조각에 관심조차 없었다.

제 인생은 정말이지, 고려의 여지 없는 대실패였다.

*

제임스가 떠난 후, 윈터는 연구소로 향했다.

하늘에는 시커멓게 먹구름이 끼고 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비행선이 추락하기 딱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혼장에 서명을 해야 하니,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다. 바이올렛과는 이혼해 줄 수 없다. 라크라운드에서 이혼과 사별은 매우 달랐다. 이혼한 사람에게는 빠르게 재혼을 요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별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제 죽음을 슬퍼할 사람조차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하니 절망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편으로는 제가 이 세상에 없어도 제 부모가 그다지 슬퍼하지 않으리란 사실에 안심도 됐다. 바이올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허우적거릴 힘도 없이 그대로 가라앉으며 비행선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철문 옆에 있는 죔쇠를 풀어 문을 열었다.

철문이 꽤 긴 시간이 걸려 덜덜거리고 열리자 세찬 비가 쏟아져 들어왔다.

윈터가 삐딱하게 서서 픽 웃었다.

“날씨 한번 가관이군.”

그는 계단을 올라 비행선으로 돌아갔다. 높은 곳에 있는 비행선 앞으로 강철로 만든 미끄럼틀이 있었다.

윈터가 고정된 사슬을 풀자 비행선이 내리막을 타고 미끄러져 젖은 잔디밭에 도착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비가 얼굴로 들이쳤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저도 모르게 다시 실소했다. 당장 죽겠다고 생각해 놓고, 비를 피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그렇다고 살고 싶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짜증이 났던 것뿐.

그렇게 비를 피해 서 있으려니 바이올렛 생각이 났다. 얼굴을 한 번만 더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떠날 거면 이렇게 대판 싸우고 더 크게 미움받은 후에 떠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녀는 쓸데없이 제게 첫사랑이니 뭐니 운운하던 사람이니까. 윈터는 솔직히,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보수적인 그녀는 결혼을 사랑과 동일시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웃는 얼굴로 헤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윈터는 생각했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비 더럽게 오네.”

윈터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꽉 잠겨 있던 죔쇠를 풀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비가 하도 많이 와서 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비행선을 작동하니 증기 기관의 프로펠러가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 청력이 순간적으로 마비될 정도였다. 뒤늦게 소장이 알려 준 귀마개의 존재가 떠올라 찾아서 양쪽 귀에 끼우자 그제야 좀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신경이 안정되자 비행선의 조종간이 보였다. 기차처럼 복잡한 것과는 비교할 것이 못 돼서 조종간의 형태도 단순했고 계기판도 별것이 없었다.

수십 년 뒤에는 아마 이것도 기차처럼 복잡해지고, 더 높이, 더 오래, 더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잠깐 미래가 궁금했지만, 제 옆에 바이올렛이 없으리란 걸 떠올리니 그따위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윈터는 비에 젖은 재킷을 벗고 그 안주머니에서 펜과 노트를 꺼냈다. 비행선에 탄 의도야 어떻든 비행선을 탄 기록은 적어 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날짜와 시간, 날씨를 적었다. 그 후에 생각해 보니 바이올렛에게 한마디 정도 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윈터가 펜을 들고 글씨를 적었다.

바이올렛. 나는 당신과 결혼한 것을 후회해.

그는 노트를 덮어 옆에 두고 의자 뒤로 기댔다.

그녀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결혼 생활이 끔찍했다는 말만 노트 가득 쓸 생각이었는데.

단 한 가지의 끔찍함도 떠오르질 않았다. 쓸데없는 이유를 가져다 붙여 싫다고 써 봤자 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제 앞에서 총을 쐈을 때 정도나 미웠지, 그 외에는 늘 그녀가 제 아내라는 사실이 좋았다.

“……사실은 당신이 배웅 나오는 것도 안 싫었어.”

그냥 낯설었던 것뿐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배웅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마중을 나와서 기다려 준 사람이 없어서.

그런 호의를 받는 것이 못 견디게 낯설고, 낯설어서 불편했던 것뿐이다.

윈터가 버튼을 누르자 비행선 선미가 열리고 실려 있던 무거운 추가 밖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비행선은 천천히 위로 상승했다.

바람은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빗방울이 선체를 무수히 내려쳤다. 선체가 크게 출렁거릴 때마다 윈터는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

하옐의 안내로 윈터의 집무실 앞에 선 바이올렛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보다 더 의문 가득한 표정의 하옐이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작은 마님 오셨다니까요? 대답이라도 하시죠?”

몇 번의 노크 후에도 대답이 없으니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에 없는 것 아닌가?”

“그럴 리가요. 대표님 다음 일정이 여기 본사여서 안에 계실 겁니다.”

하옐이 초조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그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이 비어 있는 것을 본 하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계시는 게 맞을 텐데…… 자, 잠시만요, 작은 마님!”

하옐은 심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제가 윈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건 드문 일인 데다가, 키론에서는 뒷골목 술집에 죽으러 갔던 거라 말한 전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혼을 하루 앞두고 있는 데다가 바이올렛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지금 그는 절벽 아래로 한 발을 내밀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하옐은 불안감에 멀미가 올라와 울렁거리는 속을 손으로 슥슥 문질러 달래며 말했다.

“그, 금방 위치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옐, 왜 이렇게 손을…….”

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하옐이 듣지도 못하고 사람들을 붙잡아 가며 윈터의 행방을 찾았다.

그런 하옐 덕에 바이올렛은 같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하옐은 금방 연구소 소장으로부터 윈터가 연구소 집무실에 있다는 전신을 받았다. 두 사람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소에 도착하자 소장이 얼떨결에 달려 나왔다. 하옐이 재촉하듯 물었다.

“대표님 집무실에 계시는 거 확실하죠?”

“네! 두 분 본사에서 출발하실 때 확인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노크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소장이 하소연 섞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이 총성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로 소장에게 재촉했다.

“저, 저게 무슨 소리요?”

그러자 소장이 사색이 되어 말했다.

“비행선 모터 소리입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비행선이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저와 대표님밖에 없습니다.”

소장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에서 벗어나자 예상대로 비행선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소장이 경악해 소리쳤다.

“이, 이 날씨에 비행선에 타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대표님은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그 순간 바이올렛은 정신없이 마차의 말을 풀어 올라탔다. 빗길을 달려 비행선이 있는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바이올렛이 소리를 쳤다.

“윈터 블루밍! 무슨 짓이에요! 당장 내려와요!”

그녀가 태어나서 한 번도 내 본 적 없는 큰 소리로 윈터를 불렀으나 그는 이미 귀마개를 한 상태였으므로 들릴 리가 없었다.

비행선은 비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올라가기만 했다.

바이올렛은 바로 몸을 돌려 관제탑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문을 열어 보려 했으나 자물쇠가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 안에 혹시 누가 있을까 싶어 문을 두들기는데, 하옐과 마차를 타고 도착한 소장이 열쇠를 들고 달려왔다.

그가 열쇠로 문을 열고 승강기에 오르며 말했다.

“비행선이 너무 높이 있고 비까지 와서 빛으로는 신호를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신 무선 전신을 동시에 연구 중인데 신호가 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날씨가 이래서는…….”

“비상 탈출 코드 좀 알려 주게.”

“아! 관제실에 적어 뒀습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관제실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비상 탈출 코드를 보내기 시작했다.

비행선은 관제실에서 보이지 않았고, 무선 전신이 실제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바이올렛은 계속해서 스위치를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며 비상 탈출 신호를 보냈다.

얼마나 반복했을까, 하옐이 비명을 지르며 관제탑 밖을 가리켰다.

불이 붙은 비행선이 추락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밖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상에서 불꽃이 보였다가 비에 곧 소강되었다.

“대표님!”

하옐과 소장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바이올렛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물러섰다가, 곧바로 승강기에 탔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그녀의 온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휘청거리며 빗속을 걸어 불 꺼진 비행선으로 향하자 하옐이 놀라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 위험합니다! 폭발하면 어쩌시려고요!”

“윈터가 안에 있으면 어떡하나.”

바이올렛은, 적어도 겉으로는 무척 침착해 보였다. 그러나 하옐은 그녀가 정말로 침착했다면 불이 붙었던 비행선에 가까이 다가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다시 다가가려 하자 하옐이 서둘러 몸으로 그녀를 막았다.

“절대 안 됩니다! 대표님한테 제가 혼난다고요!”

팔을 잡는 것도 너무 급해서였지, 바이올렛의 몸에 다시 손을 댈 수가 없어 하옐은 그녀를 막느라 고군분투였다.

그때 저 멀리서 연구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 찾았습니다! 대, 대표님 여기 계십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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