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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9화 (89/176)

89화

윈터는 그날 이후부터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얼굴 한 번 못 보고 있다가 20일에 만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게 될 수도 있었다.

바이올렛은 제가 윈터에게 함부로 말해 상처를 줬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캐서린의 말대로 그냥 그들은 돈을 얻고, 윈터는 부모의 사랑을 얻으며 지내는 것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윈터는 지금까지 블루밍 공작 부부에게 받는 사랑에 만족해 왔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감히 그에게 그 사랑이 가짜였다고 말했던 걸까.

작위를 주고 싶다는 것도 결국 제 욕심이었다. 제가 남편에게 빚을 진 느낌이었으니까, 그걸 해소하기 위해 작위를 넘겨받으려 들었던 건 아닌가.

결국은 제가 먼저 찾아가 봐야겠다 싶어 연구소에 가 보았지만 운 나쁘게도 남편과 엇갈렸다. 제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그가 자리를 피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핌이 달려와 바이올렛을 맞아 주었다.

연구소 주변을 산책하며 핌이 말했다.

“확실히 요즘 대표님 안색이 영 안 좋으시더라고요. 안색만 안 좋은가요? 누가 말 걸어도 대답도 안 해 주시고.”

바이올렛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핌이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거리며 분위기를 바꾸려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조만간 유인 비행선 실험을 한다더라고요. 소장이 완성했다고 신나서 자랑하던데.”

“그랬소? 파일럿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탈 사람이 있었소?”

“있다마다요. 심지어 이번엔 도전자들이 엄청 많았다더라고요. 아무래도 연구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잖아요. 비상 탈출 장치 같은 걸 강화했다나……. 혹시 어떻게 되더라도 대표님이 챙겨 주실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제 정해지긴 했소?”

“정해졌나 본데, 보안 때문인지 아무한테도 알려 주지 않더라고요.”

“아.”

이상하게도 바이올렛은 어떤 사람이 유인 비행선에 타려 하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어졌다.

어떤 마음으로 그 위험한 길에 오르는 걸까. 가족에게 돌아갈 돈을 생각하면 죽어도 별수 없다는 마음인가, 아니면 최초의 유인 비행선 탑승자가 되고 싶은 마음일까…….

*

19일 아침, 바이올렛은 이혼 서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는지 7시가 가까워지는데도 세상이 어두컴컴했다. 며칠 동안 식사도, 잠도 취하지 못하던 바이올렛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정원으로 나갔다.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걸음을 옮기는데 멀리서 룰루가 우산을 들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작은 마님! 비 올 것 같으니 우산 들고 가셔요!”

“아, 고맙네.”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우산을 받아 들었다. 집에 있던 카닉사의 로고가 그려진 우산이었다. 이게 좋아 보여서 기웃거렸더니 윈터가 별것 아닌 것도 가지고 싶어 한다며 여러 개를 가져다 놓았다.

바이올렛이 우산을 팔에 걸자 룰루가 물었다.

“산책 같이 해 드릴까요? 고민이 많으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일이 이혼장을 쓰기로 한 날이라…… 같이 걸어 주면 고맙지.”

바이올렛이 허락할 줄 알았는지,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온 투린이 제 아내에게도 얼른 우산을 건네주며 말했다.

“작은 마님, 아침 식사 거하게 준비할 테니 꼭 식사하셔야 합니다! 요즘 하도 식사를 거르셔서 제 마음이 안 좋습니다.”

“고맙네. 한 바퀴 돌고 오면 배가 고파질 테니 꼭 식사를 해야지.”

바이올렛의 대답에 투린이 신나하자 룰루가 유쾌하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남편 이렇게 직업 만족도가 높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러게 말이네.”

그러자 투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네! 키론 호텔에서 보셨잖습니까. 이렇게 음식을 준비했는데, 그 망할 해산물 플래터만 시킨다고요!”

골백번 들은 그 말에 룰루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했다.

“사람들이 바닷가 휴양지 호텔을 갈 때 기대하는 게 해산물이니까!”

“그, 그렇지만 내 손이 하나도 닿지 않잖소! 해산물 플래터는 호텔 아니어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투린이 절대 호텔로 돌아가기 싫다는 듯 이야기하다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떠났다.

소란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다시 꽃이 흐드러진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바이올렛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비가 오면 꽃이 많이 떨어지겠네…….”

“아휴, 요즘 정말 예뻤는데. 그렇죠?”

바이올렛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룰루가 물었다.

“많이 심란하세요?”

“아무래도 편하지는 않지. 게다가…… 재혼을 피하려면 일단은 멀리 떠나야 할 것 같기도 해서.”

“떠, 떠나시다니요? 이혼 후에도 여기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룰루가 눈이 커져서 묻자 바이올렛이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재혼을 피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안 돼요! 또 가긴 어딜 가신다고 그래요. 이번에 또 떠나시면 대표님 정말 죽어요!”

“죽다니. 그런 말 말게. 애초에 남편이 도망칠 곳도 마련해 보겠다고…….”

“대표님 성격 몰라서 그러세요? 원래 예쁜 말도 못되게 하는 분이잖아요. 예전에 작은 마님 떠나신 후에 대표님…….”

룰루가 다시 떠올리니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다독거리자 룰루가 말을 이었다.

“작은 마님 떠나시던 날 그 튼튼한 분이 길에 쓰러지셨어요.”

“……쓰러지다니?”

바이올렛이 자리에 멈춰 섰다.

룰루가 여태 그녀가 몰랐다는 것이 놀랍다는 듯 눈이 동그래져서 말을 이었다.

“작은 마님 떠나신 후에요, 넋이 나가서는 맨발로 기차역까지 가려 하시더라고요. 역에서 작은 마님이 떠나신 걸 알고는…….”

“…….”

“하루를 꼬박 기절해 계시다가 일어나셨어요. 그러고도 작은 마님 혹시나 돌아오실까, 해서 계속 이 집에서 기다리셨나 봐요. 작은 마님 보여 드리려고 정원도 이렇게 크게 지어 놨는데 그걸 못 보여 드렸으니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정원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윈터는 정원 따위에 관심이 없다. 이 넓은 정원은 온전히 저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은 영원히 내 꿈에서 반복될 거야. 망할, 당신이 내 전 재산을 수백 번 날려도, 내 부모가 나를 수천 번 버려도 그 순간만큼 끔찍하지는 않아.”

그렇게 말하던 순간의 윈터의 얼굴을 떠올리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이올렛이 심호흡을 하고 마음먹었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해야겠네. 식사하고 남편을 보고 와야겠어.”

“화해하시려고요?”

“노력해보려고.”

“잘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떠나시면 안 돼요. 내가 아주 저택 사람들한테 다 말할 거예요. 다들 작은 마님 못 가게 붙잡을걸요.”

“찾아보겠네. 떠나지 않을 방법. 그래서 남편과 이야기해 보려고.”

“저, 정말이세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돌아와 투린이 유난히 신경 써서 준비한 아침 식사를 했다. 요즘 바이올렛이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이 걱정스러웠던 터라 온갖 진귀한 과일을 가져다가 식사를 꾸민 상태였다.

바이올렛은 발코니에서 천천히 식사를 하며, 비가 온 뒤에 확 달라져 버릴 봄의 정원을 눈에 담았다.

바이올렛이 별다른 말을 안 했는데도 젠은 있는 힘껏 그녀를 꾸며 주었다. 그러면서도 지난번에 실수를 양분 삼아 너무 신경 쓰지는 않은 듯한 분위기를 내는 것에 집중했다. 특히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화관처럼 땋아서 은줄과 하나의 보석으로 꼼꼼하게 장식한 재주가 기가 막혔다.

그 뒤, 봄꽃 같은 연분홍색 하늘거리는 외출용 드레스에 흰색 레이스로 된 볼레로를 걸쳤다. 거기에 드레스 색과 비슷한 슬링 백 구두까지 신고 나니 봄나들이라도 나가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바이올렛의 예상 출발 시간보다 한참 늦어진 후에야 만족하고 손을 뗀 젠이 심오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그럭저럭 만족하는데, 어떠세요? 시간이 좀 부족하지만.”

“시, 시간이 부족했니?”

“그럼요!”

지난번 연구소 방문에는 네 시간 반이 걸렸으니 그것과 비교하면 순식간이긴 했다.

바이올렛은 가끔 젠이 자신을 제 인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젠은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 꼬박도 바이올렛을 꾸미고 있을 것이었다.

바이올렛이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며 거울을 보고는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머리를 어쩜 이렇게 예쁘게 했니? 옷과 구두도 정말 잘 골랐구나.”

“저도 마음에 들어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닉사의 우산을 들자, 젠이 얼른 달려가서 정열적인 느낌이 드는 레이스가 있는 빨간색 우산을 가져왔다.

“오늘만 이걸로 드세요.”

“빗속에서도 눈에 띄겠구나.”

“작은 마님은 밤에 봐도 눈에 띄어요.”

젠이 그리 말하고는 뽐내고 싶어 안달을 하고 복도에 사람만 지나가면 제 작은 마님을 보라고 인기척을 냈다. 그리고 다들 감탄하는 것을 우쭐해서 즐겼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거였는데, 산뜻하게 꾸미고 나니 바이올렛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의 마음은 확고했다. 제 가여운 첫사랑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제가 그의 단잠과 부모에 대한 믿음을 가져갔다고 했다. 그러니 그는 지금 자신을 꼴도 보기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바이올렛은 원래 성실한 사람이었고, 눈앞에 닥친 일에서 도망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제가 최선이라고 믿는 방법을 남편에게 제안할 생각이었다.

*

윈터는 요 며칠, 죽을 의지와 힘조차 나지 않아 집무실 의자에만 줄곧 앉아 있었다.

여태까지 제가 가족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남들의 눈에는 정이 그리워 착취당하던, 열두 살 이전의 저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적당히 먹이고 재우면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자신은 사랑을 받은 적도, 준 적도 없다는 뜻이 되지 않나.

변호사와 유언장을 새로 적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선 변호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그러셔도 블루밍 공작 부부 전하 두 분이 사용하시고 있는 영지까지 왕녀 전하 앞으로 돌리시는 건…… 두 분을 크게 자극하는 행동 같은데요.”

“그래서 뭐. 내가 한 푼도 주기 싫다는데.”

윈터가 안락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혔다.

그가 욕설을 퍼부으며 유언장 수정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윈터의 아버지 제임스 블루밍이었다.

그가 윈터를 찾아올 때는 늘 다른 누군가와 함께였다. 친구가 사업을 시작하려 하니 좀 도와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니, 윈터의 눈에도 그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윈터가 변호사에게 나가라고 턱짓하자 그가 빠르게 서류들을 정리해 가방에 넣고 그곳을 나갔다.

제임스가 달래듯이 말했다.

“유언장을 수정하고 있다더구나.”

“여기에 아버지 귀가 있나 보군요.”

“아들아.”

제임스가 변호사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다정히 말했다.

“네 어머니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는 네가 친아들이다.”

“어머니에겐 왜 아닙니까?”

“물론 네 어머니도 널 사랑하지만, 가문을 물려주는 것은 그래, 솔직히 꺼려 하는 부분이 있다.”

딱히 바란 적도 없었는데, 그걸로 저렇게 전전긍긍했었나 싶었다.

아니면 혹시 아내가 부탁했었나?

윈터의 미간이 좁아지는 사이, 제임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말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한번 네 어머니를 설득해 보자, 윈터.”

윈터는 제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어쩐지 며칠 전에도 어머니가 아내와 작위 문제로 싸운 것 같더군요.”

불확실한 사실을 아는 척 일단 던지는 것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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