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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8화 (88/176)

88화

두 사람이 들어선 별장은 숲 속의 맑은 호수를 끼고 있는 대강당 건물과 호수에 넓은 간격으로 지어져 있는 열일곱 채의 레이크하우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이 들어갈 때 잠시 인사를 하고 난 별장 직원들은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가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카닉사의 매뉴얼은 윈터 기준의 불필요한 인사치레 등을 전부 버리고, 오로지 효율만을 중시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종종 그 사실에 감탄하게 되었다. 윈터에게 지나치게 일이 몰려 있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비교적 모든 일이 논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바이올렛이 대강당 안으로 들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천장이 높고 세로로 긴 건물이었다. 높은 곳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아름다운 빛이 쏟아져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백목을 사용해 지은 건물에, 가구 하나하나에는 고급스러운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과연 작위 수여식에 탐낼 만한 곳이군요.”

“근사하지. 적자를 보면서도 유지하는 이유가 있지.”

“적자가 나나요?”

“이런 큰 행사가 없으면 대강당이 비어 있으니까. 무도회를 열기에는 너무 정숙하고, 연극을 하기에는 너무 무겁지.”

“그런데도 이런 곳을 만들어 둔 이유가 있나요?”

“이런 곳을 가진 사람이 나밖에 없으면 그게 희소성이고, 그 희소성이 권력이 되잖아.”

희소성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물건에 잘 질리잖아요. 툭하면 옷이고 시계고 다 바꿔 버리는데…… 사람은 그렇지가 않네요.”

“대체가 안 되니까. 세상에 가족은 하나뿐이잖아. 물론 결혼은 다시 할 수 있겠지만, 라크라운드에 왕녀님이 두 분 계시는 건 더더욱 아니고.”

“아, 희소성.”

바이올렛의 씁쓸한 목소리에 윈터의 눈동자에 불평불만이 더더욱 진하게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몸이 바뀌었을 때 젠과 하옐에게 비난을 들었었다. 흑자 전환 따위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아내에게 흑자 전환이나 희소성 같은, 제 입장에선 최고로 좋은 말을 쓰면 바이올렛의 화만 돋우는 모양이었다. 매우 이상한 사실이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윈터는 아내가 그렇게 화를 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를 더 이상 슬프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희소성에 대한 이야기도 그녀를 기분 좋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윈터가 짜증과 불만으로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바이올렛이 난처하게 물었다.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이에요? 이 상황에서 기분이 나쁜 건 나여야죠.”

역시나 기분이 나쁜 건 자신이란다. 윈터가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기분이 나빠? 난 내가 희소성이 있다면 기쁘겠는데.”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윈터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이 대륙에 당신 정도의 부자는 몇 명 더 있을 테니, 그렇군요. 당신은 나에게 희소성이 떨어지네요.”

“일단, 없어. 그런 부자.”

“그런가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윈터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오만하군요.”

“아니.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없다니까.”

“그렇다고 해요. 그래도 문제가 있죠.”

“무슨 문제?”

바이올렛이 반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바라는 희소성이 아니라는 거죠.”

“바라는 게 뭔데.”

“글쎄요…….”

“혹시 건강한 남자를 원한다면 나만큼 건강한 놈도 별로 없지.”

“날 사랑에 푹 빠지게 할 남자가 좋겠어요. 당신 같지만 당신이 아닌 남자.”

그러자 윈터가 코웃음을 치며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세상에 나 같은 남자는 나밖에 없어.”

“무슨 의미예요. 뽐내는 건가요?”

“부정적인 것까지 전부 합쳐서, 나 같은 남자가 어디에 그렇게 많겠어.”

“부정적인 것까지라뇨?”

“몸이 바뀌었을 때 하옐과 젠이 그러더군. 어떻게 흑자 전환 따위를 말할 수 있냐고. 그 녀석들 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라도 본 눈빛이었다고. 난 그게 그렇게 쓰레기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그렇잖아. 다른 모든 물건처럼, 인간도 높은 가치가 매겨지는 게 좋은 거잖아. 난 당신에게 높은 가치를 매긴 거야. 나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거라고. 그게 왜 나쁘지?”

“아, 당신은 정말…….”

그는 제 스스로도, 제가 가치가 떨어지면 쓸모없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좀 더 사랑받고 자랐어야 했다는 말을, 바이올렛은 바로 할 수 없었다. 이 말은 윈터에게 커다란 상처를 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제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충분히 만족하는 남자였으니까.

캐서린의 말대로 그는 크게 상처받을 테니까.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차기 블루밍 공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뭘 어떻게 생각해?”

“당신이 블루밍 가문 장남이잖아요.”

그러자 윈터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코웃음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작위는 당연히 적자가 받아야지.”

윈터의 확답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서자가 작위를 받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 서자들 중 이방인의 피가 섞인 놈은 없겠지.”

“이방인 중에 당신만큼 성공해서 가문의 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도 없었죠.”

“그거 마음에 드는 표현이군.”

윈터가 픽 웃으며 말했다. 바이올렛이 제 말을 진지하게 들으라는 듯 힘 있는 눈동자로 윈터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권력을 바랐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지, 충분히.”

“……그건 미안해요.”

“당신 탓하는 거 아니야.”

“작위를 물려받는 것도 욕심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이미 부모님과 사이도 틀어졌잖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나와 결혼할 정도로 작위를 원했잖아요.”

“그야 지금도 바라긴 하지.”

윈터가 낮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내게 잘해 줘도 이방인은 이방인이야. 서자이기도 하고. 그건 내 자리가 아니야.”

그의 말에 바이올렛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캐서린은 오늘, 윈터가 부모에게 가진 사랑을 두고 자신을 협박했다.

미칠 것 같았다. 그와의 3년 동안 그의 무심함에 절망했는데,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그 이상의 감정 같은 건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르는 것이다.

바이올렛은 이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영원히 거짓된 사랑에 속고 있게만 할 수는 없었다. 저 또한 제 어머니가 자신에게 준 사랑에 잠겨서 에쉬가 바라는 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제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바이올렛이 윈터를 화나게 할 각오를 하고 물었다.

“잘해 줬다는 게…… 굶기지 않고, 때리지 않고, 안전하게 재워 줬다는 뜻이죠?”

“그게 뭐.”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이 집을 나가면 찾지 않았잖아요.”

바이올렛의 말에 담긴 뜻을 파악했는지, 윈터의 표정이 서서히 구겨졌다.

“그게 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남들이 어디에서 뭐 하고 있나 궁금해하진 않아.”

“아뇨.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해요.”

“그럼 난 내 부모와 가족이 아니란 뜻인가?”

“그런 뜻은 아니지만…….”

“아니면 뭔데.”

윈터가 표정을 구기며 추궁했다.

그러자 잠시 생각하며 숨을 고른 바이올렛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두 분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친자식만큼 사랑해?”

“…….”

“……뭐야, 그 표정은.”

“당신이 나에게 물었던 적이 있잖아요. 당신이 돈이 없었어도 당신과 결혼했겠느냐고. 당신 부모님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남편이 멀어지는 이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남편이 요즘 자신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욱 간절했다. 그가 좀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하기를 바랐다.

윈터가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돌아섰다가 다시 바이올렛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에게 그따위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왜 당신이 내가 돈이 없었어도 내 부모가 날 받아 줬겠냐는 얘기를 해?”

“윈터…….”

“꺼져, 당장.”

“…….”

윈터는 누구에게나 닥치라든지, 꺼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지만 바이올렛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러므로 바이올렛은 지금 윈터가 얼마나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 있는지를 알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예전에 두들겨 맞았으리라.

바이올렛이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윈터가 입을 열었다.

“내 악몽. 뭐냐고 물었지? 당신이 죽는 거야, 그 꿈.”

그 말에 바이올렛이 황급히 윈터를 돌아보았다. 그는 제가 버려졌음을 깨달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모르지? 그 순간이 어떤지. 내 눈앞에서 당신이 죽었어. 총알이 그대로 머리에 박혀서 피가 흘렀다고. 내가 보고 있는데. 내가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데!”

그의 고통으로 가득한 음성에 바이올렛은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누군지 모르는 인간도, 내 앞에서 그렇게 죽었으면 잊기 힘들걸.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당신이, 당신이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어. 그 순간은 영원히 내 꿈에서 반복될 거야. 망할, 당신이 내 전 재산을 수백 번 날려도, 내 부모가 나를 수천 번 버려도 그 순간만큼 끔찍하지는 않아.”

“…….”

“내 단잠도, 이제는 내 부모에 대한 믿음도 가져가는군. 아주 대단해. 이제 할 만큼 했으면 나 좀 그만 괴롭혀. 지옥에 온 것 같으니까.”

윈터가 걸음을 옮기더니 문으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그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요. 내 멋대로 말한 거예요. 그럴 리가요. 당신은 사랑받고 자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정말…….”

윈터가 나가고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 소리에 바이올렛은 몸을 움츠렸다가, 멍한 얼굴로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

아무리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 하옐이 윈터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오른쪽 벽을 보니 윈터가 기대앉아 있었다.

“어떻게 작은 마님을 별장에 두고 오실 수가 있습니까?”

그제야 윈터가 허탈하게 한숨을 쉬더니 하옐 쪽으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집에 데려다줬지?”

“네. 그나저나 엄청 슬퍼 보이셨어요.”

“아, 젠장.”

윈터가 고개를 바로 하고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하옐이 걱정스레 물었다.

“싸우셨습니까? 어차피 이제 곧인데 좋게 헤어지시지…….”

“그 망할 공주님이, 내 부모님이 날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잖아. 자기가 뭘 안다고.”

“…….”

하옐이 바로 대답 없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자, 윈터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넌 원래 부모에 대해 불신이 있으니까 도움이 안 돼.”

“객관적으로 사랑받고 자란 놈들 불러올까요?”

“그런 놈들을 왜 불러. 뭐야, 네놈도 바이올렛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가?”

“예? 아, 아닌데요!”

하옐이 기겁해서 부정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는지 윈터의 표정이 있는 대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가 뭔가 던지고 싶은지 주변을 더듬거리다 아무것도 못 찾고 결국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집어 던졌다. 하옐이 쏙 그것을 피했다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윈터의 옆에 가져다 두었다.

윈터가 버럭 소리를 쳤다.

“네놈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왜 말을 안 해!”

“말을 했으면…… 대표님께서 무슨 반응을 보였을 것 같으세요? 대표님은 작은 마님께 약하신 편인데도 작은 마님께 그렇게 무섭게 화내셨잖아요. 작은 마님은 뭐 쉽게 말씀하셨겠어요? 대표님 상처받을까 봐 그 말을 3년 내내 못 하신 분이세요. 애초에 이 이야기가 왜 나온 겁니까? 편하게 이혼하시고 위자료로 행복하게 사시면 될걸.”

“나더러 작위에 욕심을 내라잖아.”

“그렇군요. 이글린도 조만간 작은 마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거라고 하더군요.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만.”

“…….”

“대표님께서 작위를 원하셨으니까, 블루밍 공작 가문을 이었으면 하는데 대표님께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욕심을 안 내고 계속 호구처럼 뺏기기만 하니까 용기 내서 말씀하신 거잖아요.”

하옐이 용기 내서 작은 마님 편을 들고 문을 닫아 버렸다. 예상대로 안에서 물건 집어 던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젠장, 젠장!”

그러더니 이어서 하옐이 구걸하며 자라던 길거리에서도 못 들어 본 온갖 욕설이 쏟아졌다.

하옐이 치를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으, 저 성격 파탄자.”

그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잠시 후, 문 안에서 명령이 들려왔다.

“변호사 불러와!”

“예? 아, 예!”

하옐이 토 달지 않고 재빨리 달려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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