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바이올렛이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님, 큰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윈터는 표정을 구기며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캐서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윈터?”
“잘은 모르지만 아무리 어머니여도 말없이 침실 앞까지 오는 건 무례한 거 아닙니까?”
“내 며느리 있는 곳에 찾아오는 게 무례면 좀 무례해도 된단다.”
캐서린이 아들에게 종종 사용하는 특유의 애교 섞인 투로 말하고는 윈터의 뒤로 다가오는 바이올렛을 보며 말했다.
“바이올렛, 우리 이야기 좀 해야겠구나. 네가 요구한 것에 대해서.”
“그러죠.”
그러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윈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없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
“네. 둘이서만 해야 하는 이야기예요.”
“위자료 얘기라도 하려는 거야?”
자신을 빼고 할 이야기라면 위자료 얘기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이야기 끝나면 내가 당신 있는 곳으로 갈게요. 괜찮죠?”
“별장과 가까우니 연구소로 와. 겸사겸사 구경시켜 줄 테니까. 위치는 룰루가 알아.”
“그럴게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떠나고, 바이올렛은 캐서린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캐서린은 생각보다 아들의 집 규모가 작다고 생각했으나, 응접실 유리 벽으로 보이는 정원에 제가 착각했음을 알았다.
5월, 이 환상적인 계절에 이곳은 앞으로 수도 사교계의 중심이 될 것이 자명했다. 누구나 이곳에 오고 싶어 할 것이고, 누구나 이곳에 왔던 것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매달려 만든 거대한 정원은 바이올렛의 취향이 합쳐져 캐서린이 살면서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장소가 되어있었다.
캐서린이 정원을 보며 말했다.
“이런 정원을 그냥 두는 건 아깝구나. 이혼을 하면 이 집은 더 이상 네 집이 아니지 않니, 지금 파티를 열어 두렴.”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난 바이올렛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물었다.
“생각해 볼게요. 그보다 작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기로 했나요?”
“난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란다. 우리 아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작위를 줄 수 없어. 하지만 남편은 다르더구나. 윈터가 장남이니 충분히 물려받을 수 있다고. 하기야, 그 사람에게는 친자식이니.”
“합의가 안 되셨군요.”
“그래. 중대사잖니.”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블루밍 공작 부부는 무작정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심산이 틀림없었다.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고 나면 바이올렛의 관심은 윈터의 작위에서 슬슬 멀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바이올렛이 어두워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결정해 주시지 않으면 수도 신문사에 제보할 겁니다. 두 분께서 저에게 약을 먹이신 것.”
“증거도 없잖니.”
“증인은 있습니다. 게다가 두 분의 사교계 행사에는 큰 문제가 생기겠죠.”
그녀의 담담한 말에 잔을 쥔 캐서린의 손이 분노로 잘게 떨렸다. 그녀가 턱을 들며 물었다.
“넌 내 아들이 계속 네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하니?”
“…….”
바이올렛이 순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캐서린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자꾸 작위를 고집하면, 난 내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게 될 거야. 이제…… 가문에서 파문하는 것도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구나.”
예상하지 못한 파문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파문이라니요? 지금까지 윈터가 두 분을 위해 얼마나…….”
“하지만 지금 그 애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잖니. 만약 그 애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면, 우리도 그 애를 우리 아이로 여길 이유가 없지.”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은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캐서린에게 있어서 윈터가 제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윈터의 생모도 캐서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소한 캐서린은 윈터에게 명문가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가짜일지 몰라도 윈터가 사랑이라고 느껴 온 다정함도 주었다. 그래서 윈터는 삐뚤어졌을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성격은 아닐지 몰라도 염세적이지는 않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윈터는 두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헌신했는데.”
“그러니까 네가 쓸데없는 욕심만 안 부리면 그 애의 믿음이 지켜지지 않겠니.”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은 역겨움이 몰려왔다. 공기가 희박해지는 기분이라, 빨리 이 자리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상태와 상관없이, 캐서린이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바이올렛의 봉투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거기에는 뭐가 들었니?”
“……위자료라더군요.”
캐서린은 그까짓 봉투에 든 돈이 얼마나 되겠냐 생각하며 코웃음 쳤다.
“내 아들이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겠지. 그 애는 위자료를 순순히 너에게 넘기지 않을 거야. 헤스턴이든 로렌스든 필요한 곳에 지불해서 이득을 내는 데 이용하겠지.”
“아뇨, 윈터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아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계시는군요.”
“1년을 넘게 도망쳐 있었던 네가 내 아들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부인께서는 아들에 대해 평생 신경 쓰신 적이 없으니 저만큼도 모르시는 거겠지요.”
이혼할 마음이니 호칭도, 말투도 거침이 없었다. 캐서린이 가슴 아프다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보란 듯이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펼쳐 보였다.
“별장을 받았어요.”
“……설마 북부 별장 말이니?”
“네.”
그 사실에 캐서린의 표정이 하얘졌다.
윈터는 작년부터 디에브만 보면 죽이려 들었다.
그는 태연하게도 블루밍 가문에서 디에브를 쫓아내 외가에 살게 했는데, 그동안 경제적으로 윈터에게 완전히 의지하게 된 블루밍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디에브가 제 아내에게 집적거린다며 길길이 날뛰니 일단은 윈터의 화가 풀릴 때까지 떨어져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제 동생에게는 그렇게 모질던 윈터가 다툼도 없이 아내에게 별장부터 넘겨 버렸다는 사실은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캐서린은 애써 평소의 부드러운 그녀로 돌아와 단호히 말했다.
“아무튼, 합의는 해 보겠지만 내가 양보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알아 두렴.”
“네, 알겠습니다.”
캐서린이 관심이 가득한 눈으로 정원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온 김에 정원 구경을 하고 싶구나.”
“그렇게 하세요.”
“어디 테이블을 놓으면 좋을지 알아 놔야겠구나. 나중에 파티를 하게 되면 내가 조언해 줄게, 바이올렛.”
캐서린이 생긋 웃으며 말하고 정원으로 향했다. 이혼 전부터 이곳을 제 특별한 파티의 공간으로 여기는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는 특권층에서 태어난 몇몇 아이들처럼 부와 권력이 자신을 특별히 선택한 것이라는 우월감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저택이 가지는 부와 권력 역시 당연히 제 것이기도 하다는 태생적인 믿음이 있었다. 나쁜 것은, 그녀가 그것들을 가지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이었다. 에쉬 역시 정확히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바이올렛은 캐서린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을 거의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바이올렛은 가슴이 미어져 빨리 윈터를 만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곧바로 젠에게 말했다.
“젠, 남편에게 다녀오고 싶은데 오늘 좀…… 신경 써서 단장해 주겠니?”
“신경 써서요? 무슨 일로요?”
“아무래도 남편 직장에 가니 신경을 쓰고 싶구나.”
“아! 염려 마세요.”
젠이 신나서 대답했다.
*
비행선 연구소 소장은 스물세 번째로 완성된 유인 비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더 이상 목숨을 잃는 파일럿은 없게 할 겁니다. 비상 탈출 장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거든요!”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속도와 체공 시간이 중요하지.”
“……파일럿의 안전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전혀.”
대표님은 피도 눈물도 없으며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라고 소장은 확신했다.
그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이번에 대표님께서 저희 연구소를 인수하셨다는 소식이 돈 덕에 파일럿으로 자원한 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었습니다. 역시 돈이 최고인 세상입니다.”
“내가 타지.”
“……예?”
소장이 멈칫했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내가 타겠다고. 나만큼 성실하게 파일럿 훈련을 한 놈도 없잖아.”
“대표님께서 성실히 파일럿 훈련을 하신 게 아니라 대표님의 신체 조건이 월등해서 다 한 방에 통과하신 것뿐입니다만.”
“그거나 저거나. 내가 이렇게 태어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소장은 그의 농담에도 인상만 쓰고 있다가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대표님께서…… 비행선에 타시겠다는 겁니까?”
“어. 진심으로 내가 타겠다는 거지.”
“왜, 왭니까?”
“스릴을 느껴 보려고.”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하더니 소장이 든 서류에서 파일럿 지원자들의 파일을 전부 뺏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비밀로 해.”
“대표님!”
소장은 당황하며 그를 불렀으나 윈터는 더 이상의 설명도 해 주지 않고 그대로 소장실을 나섰다.
“비상 탈출은 무슨 비상 탈출.”
그가 성질을 내고 투덜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이끌리는 연구소 문 앞으로 향했다. 그가 팔짱을 끼고 부산하게 그 앞을 걸어 다니며 연구소 정문 방향을 기웃거렸다.
아내가 온다고 했는데, 언제 오는 건지를 몰랐다.
“온다더니 왜 안 와.”
차라리 온다는 말을 안 들었으면 모르겠는데, 듣고 나니 진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 어머니와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윈터가 하염없이 주변을 배회하다보니 멀리서 마차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밖으로 나가 기다리니 곧 마차가 멈추고, 바이올렛이 내려섰다.
윈터는 생각보다 훨씬 화려하게 꾸미고 온 바이올렛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아내는 제 차림새와는 너무도 다른 윈터의 뒤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눈 밑에 시커멓게 피로가 쌓인 연구원들을 발견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윈터가 웃음을 꾹 참으며 놀리듯 물었다.
“아, 배우자 직장에 찾아올 때는 차려입고 싶다고 했나?”
“……틀렸네요, 내가.”
윈터가 그녀의 중얼거림에 웃음이 터져 시원스레 폭소했다. 세수도 못 하고 밤을 새운 연구원으로 가득한 연구소에서 혼자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바이올렛의 얼굴이 금방 빨갛게 달아올랐다. 젠이 있는 대로 힘써서 꾸며 준 바이올렛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눈부셨다.
그는 바이올렛의 손에 끼워진 더워 보이는 장갑을 벗기며 말했다.
“내 눈이 즐거우니 됐어.”
“당신이 날 좀 숨겨 줘야겠어요.”
바이올렛의 다급한 부탁에 윈터는 아예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웃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버렸지만, 남편이 저렇게까지 웃으니 곧 즐거움도 피어올랐다.
*
연구소는 원래 목장이던 드넓은 곳에 덩그러니 지어진 건물이었다. 옆에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반짝반짝거리는 바이올렛이 안으로 들어서자 연구원들이 모두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버렸다.
바이올렛은 피해를 주는 기분이라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원래 남 신경을 안 쓰는 윈터는 그녀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구경시켜 주기 바빴다.
“비행선이 궁금하면 보여 주지. 물론 그 전에 비밀 유지 각서를 써야 하지만.”
“궁금하긴 하지만 다음에요. 정말 빨리 북부 별장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은 입고 싶은 거 입으면 돼.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바이올렛 블루밍은.”
윈터의 핀잔에 바이올렛이 한숨을 폭 쉬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손으로는 윈터의 팔을 꾹 당겼다.
“그래도 빨리 가요, 우리.”
윈터가 힐끔 바이올렛을 보았다. 솔직히, 보여 줄 것도 없는데 그녀가 저렇게 당황하는 게 귀여워서 아까부터 괜히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곳을 몇 바퀴 더 돌며 좀 더 괴롭히고 싶었지만 눈치껏 그만두고 연구소를 나섰다.
두 사람은 곧바로 마차에 타서 비행장 가까이에 있으며, 헤스턴 변경백의 작위 수여식이 열릴 예정인 북쪽의 카닉 호텔 별장으로 향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