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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6화 (86/176)
  • 86화

    다음 날 울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바이올렛 일행이 떠날 채비를 마쳤다.

    소방대원들도 섭섭한 얼굴로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여기 음식 맛있었는데 나중에 생각날 것 같습니다.”

    “저도요. 그리고 생각보다는…… 다들 착하더라고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왕실에 들어왔던 소방대원들은 그새 정이 들었는지 칼리본을 떠나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바이올렛이 뒤를 돌아보았다. 칼리본 사람들이 챙겨 준 선물이 하도 많아서 결국 윈터가 사설 마차를 하나 더 불러야 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바이올렛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윈터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내 혈통 특성인가 봐. 당신 말 안 듣는 거.”

    그제야 바이올렛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여기 며칠 더 머물기로 한 이글린이 달려와 바이올렛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광부들이 전해 드렸으면 하더라고요.”

    “광부들이?”

    “네. 아, 물론 윤문은 제가 다듬었습니다.”

    “고맙네.”

    바이올렛이 인사하고 편지를 펼쳤다.

    혹시 우리의 숨이 끊어졌어도 전하께서 구조를 위해 달려오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아이들은 좌절 대신 희망을 품고 자랄 겁니다. 누군가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생겼으니까요.

    옆에서 편지를 엿본 윈터가 말했다.

    “광부들은 러브 레터도 그렇게는 안 쓰던데.”

    그러자 옆에 이글린도 맞장구쳤다.“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외더라고요.”

    바이올렛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편지를 소중히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마차에서 기차로 갈아타고, 다시 마차에 타는 긴 여정이었다. 수도에 도착할 때쯤, 바이올렛이 지쳐서 반쯤 잠들어 있을 때 마차가 멈췄다. 바이올렛이 애써 잠을 쫓으며 윈터에게 물었다.

    “왜 마차가 멈추죠?”

    그러자 창밖을 보고 있던 윈터가 말했다.

    “당신이 내려서 직접 보는 게 좋겠어.”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며 먼저 내린 윈터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곧 길 양옆으로 늘어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앞에서 바이올렛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환호성이 번졌다. 윈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분으로 데려온 말을 끌고 왔다.

    “타.”

    “네에?”

    “이 정도 쇼맨십도 없어? 기다려 줬으니 보답을 해야지.”

    “아…….”

    바이올렛이 얼떨결에 말에 타자, 앞장서던 제릭이 말을 돌려 바이올렛에게 다가왔다.

    “앞장서시면 따르겠습니다, 부인.”

    바이올렛은 난처한 표정으로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그녀가 길로 들어서자 순식간에 꽃가루가 길에 뿌려졌다.

    “공주님!”

    “바이올렛 공주님!”

    바이올렛은 환호성에 조금 흥분한 말을 쓰다듬었다.

    “우리를 반겨 주는 것이니 두려워 말거라.”

    다행히 말은 순식간에 진정했고, 바이올렛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양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말이 인파가 만든 길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그 길을 지났다.

    그녀는 내심 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라크라운드의 다른 사람들도 귀족들과 같이 광산에서 실종된 노동자들에게 무관심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광부들의 생환에 기뻐하고 있었다. 제 고향 사람들은 제 생각보다 나은 사람들이었다.

    꽃길을 지나며 그녀는 어려서부터 체득한 부드러운 자세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길의 끝에는 마지못해 나온 에쉬와 의회를 이끄는 의장이 있었다.

    바이올렛이 그들 앞에 도착했다. 에쉬와 의장은 바이올렛이 말에서 곧 내릴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으나 그녀는 내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그녀가 묻자 에쉬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짓이오? 말에서 내려와서 말하시오.”

    “왜 그래야 하오? 그대가 왕도 아닌데.”

    바이올렛의 담담한 목소리가 침묵 속에 퍼졌다. 에쉬는 제 여동생의 속셈을 알고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제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실이 사라졌음을 알리기 위해.

    그러나 그녀는 그리 긴 기 싸움을 하지 않고 말에서 내렸다. 왕이든 아니든 말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바이올렛이 에쉬에게 가까이 걸어가 말했다.

    “나에게 칼리본 사람들을 보내 줘서 고마워. 살면서 오빠에게 고마워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네.”

    “이혼을 앞둔 사람이 건강하기도 하지.”

    “이혼과 건강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비꼬는 것에 이골이 난 바이올렛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때 제릭이 에쉬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에쉬가 지적하자 제릭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리고.”

    제릭은 ‘전하’라는 에쉬의 지적에 깨달은 바가 있어, 정중한 태도로 바이올렛을 향해 말했다.

    “부인. 임무가 끝났으니 해산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내려도 되는 건가?”

    “예. 명령을 내리셨으니 해산 명령도 내려 주셔야지요.”

    제릭의 말에 에쉬의 표정이 굳었다. 에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실에 속한 어떤 군대도 왕이 있을 때 왕이 아닌 다른 자가 해산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제릭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자, 소방대원들이 그 뒤로 똑같이 무릎을 꿇고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이 당황하면서도 제가 보고 자란 것을 떠올려 침착하게 말했다.

    “훌륭한 행동이었네.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것으로 해산을 명하네.”

    “감사합니다.”

    제릭과 소방대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말에 올라타 그대로 왕성의 소방대 숙소로 돌아갔다. 에쉬가 죽일 듯이 그들을 노려보며 의장에게 말했다.

    “저 소방대가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거지?”

    “죄송하지만…… 그건 전하께서 해산하셨어야 합니다.”

    “일이 없으면 알아서 해산했어야 할 것 아냐.”

    “일도 안 하는데 꼬박꼬박 급여를 받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겠죠.”

    “당장 소방대를 없애 버리지.”

    “좋은 선택이십니다.”

    왕실이 해산하자마자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소방대에게 좀 미안했으나, 지금까지 놀고먹으며 세금을 받아 챙겼으니 지금이라도 해산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마도 왕실 기사단처럼 경관으로 발령이 나거나, 운이 나쁘면 수도에서 떨어진 곳의 보안관으로 발령이 날 것이다. 어쩌면 그들도 발령이 나지 않아 지금껏 도리가 없어 놀고먹었을지 모르니, 그들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뒤 발령이 떨어지자 소방대원 전원이 바이올렛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

    집에 돌아온 바이올렛의 앞으로 그녀가 보낸 편지들의 답장이 쌓여 있었다.

    예상대로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질문에서 벗어난 대답들뿐이었다. 날씨 얘기나 파티 초대로 회피한 편지들에 바이올렛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편지들을 전부 뜯어 본 바이올렛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방법이 없나.”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체력적으로도 문제였지만 점점 더 수도에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윈터 블루밍. 그 남자가 뭐라고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 정말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 봐.”

    3년을 앓아 놓고 또. 또다시 그가 그립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제 이마를 감쌌다.

    그를 잘 모르고 자신도 어릴 때 첫눈에 반하는 거야, 외모 하나만으로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 대해 많은 걸 알았다. 그런데도 그를 보면 여전히 가슴이 울렁였다.

    좋아도 그런 거친 남자가 좋을 게 뭐란 말인가. 그의 무례하고 못된 말투 어디에 호감을 느낄 부분이 있단 말인가.

    바이올렛이 심란해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윈터의 무례함에 바이올렛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가 바로 돌아왔다.

    “윈터, 제발 미리 인기척 좀 해 줘요.”

    “난 당신이 문 앞에 서면 인기척 안 내도 당신인 거 알아. 당신은 왜 몰라?”

    “당신이 이상한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이봐. 우리가 몸도 바뀌는데 그까짓 게 뭐가 이상해? 우리 혈통의 또 다른 대단한 주술인 모양이지.”

    “공주님이라고 못 하게 하니 이제는 ‘이봐’인가요?”

    “응, 그럴 거고 당신은 오늘 꼼짝 말고 집에서 쉬어. 또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이유가 없다면 따라가지 않…… 혹시 농담인가요?”

    “농담은. 유괴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농담이 맞았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는데 윈터가 다가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시선 높이까지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그나저나 머리 아파? 손으로 감싸고 있었잖아.”

    “괜찮아요.”

    “당신은 항상 아파서 이게 정상인 줄 알잖아.”

    그의 핀잔에 바이올렛이 입꼬리를 늘리며 대답했다.

    “당신과 몸이 바뀌어 보지 않았다면 건강하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를 뻔했어요.”

    “나도 당신과 몸이 바뀌어 보지 않았다면 당신이 이렇게…….”

    윈터가 웬일로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가 겨우 문장을 끝마쳤다.

    “……이렇게 3년을 보낸 걸 몰랐겠지.”

    지난 3년과 같지 않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그 중얼거림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전엔 그녀의 편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었다. 남부에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윈터도 이전엔 제 편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제 편이 되어 줄 때가 있다.

    그의 의견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테이블에 올려 둔 윈터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바로 어디 가야 하나요?”

    “비행선 수리를 마쳤다더군. 확인해 보려고.”

    “아…… 다녀오면 우리 얘기 좀 해요.”

    “지금 해. 나도 할 말이 있어.”

    윈터가 의자를 그녀 앞으로 끌어당겨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바이올렛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바쁜 거 아니에요?”

    “안 바빠. 그까짓 비행선 언제 보면 어때.”

    “그럼…….”

    바이올렛이 심호흡을 했다.

    “우리 이혼 말이에요.”

    “아, 이혼 얘기하니까.”

    윈터가 때마침 잘됐다는 듯 가져온 봉투를 내밀었다.

    “오늘 여기 좀 가 봐.”

    바이올렛이 봉투를 잡아 들어 펼쳐 보자 땅문서의 사본이었다.

    거기 적힌 주소지를 본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래졌다.

    “……왕성을요?”

    “나라에 귀속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샀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생각해 둬. 이제 당신 것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 뒷장.”

    바이올렛이 다음 장을 확인하니 헤스턴 변경백의 작위 수여식이 열릴 별장의 문서였다.

    “이따가 여기로 와. 호텔 운영하는 법을 차차 배워야 하니까. 시간이 없어.”

    “호텔 운영하는 법이요?”

    “내 재산은 높은 확률로 호텔 부동산이야. 당신이 위자료로 받을 것도 호텔 부동산이고. 당연히 배워야지. 아니면 설마 건물들을 다른 용도로 쓰려는 건 아니겠지? 팔아 버린다든지.”

    윈터가 인상을 썼다. 다른 건 몰라도 호텔에 대한 애정만은 가득한 그였다. 바이올렛이 문서를 다시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자, 이제 당신 하려던 얘기는 뭐야.”

    “아, 그게요.”

    바이올렛은 뭔가 얘기하고 싶었지만 제 손에 쥐여진 막대한 재산에 말문이 막혔다.

    위자료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언젠가 샤론이 말했듯이 그녀는 셈에 약한 편이었고 정확한 숫자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경제관념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전부터 그녀의 아버지는 라크라운드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있었고, 그러므로 제 사유 재산에 대해서는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꼈다.

    혹여 바이올렛이 사유 재산에 대해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왕성을 소유하겠다는 규모의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이올렛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다 위자료는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그 이상은 당신이 변호사 대동해 싸워서 가져가.”

    “……아뇨, 지금 당신은 내 말을 반대로 이해했어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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