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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5화 (85/176)
  • 85화

    바이올렛이 놀라서 말을 타고 달려가 보니 소방대원이 주저앉아 있었다. 바이올렛이 흙투성이인 윈터에게 달려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기가 아닌 모양이군.”

    “네?”

    “위치가 잘못됐나 봐. 광부들이 있는 곳이 아닌 모양이야. 갱도가 있긴 한데 광부들이 없어. 앞뒤는 다 바위로 막혀 있고.”

    안 그래도 지쳐 있던 소방대원이며 은퇴한 광부들 모두 욕설을 하며 드러누워 버렸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잠깐만요. 나도 들어가 볼게요.”

    “어딜 들어가?”

    “그냥 사다리 타고 잠깐만요. 광부들이 전신 부호로 곡괭이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어요. 혹시 틀렸더라도 아주 멀지 않은 게 분명해요.”

    “……그래?”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힐끔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이 사다리로 걸어가자 윈터가 광부들의 모자를 보닛 대신 씌워 주었다.

    “같이 가.”

    “고마워요.”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갱도에 들어선 후 윈터가 소리쳤다.

    “이봐! 소리를 내야 우리가 찾아갈 거 아냐! 노래라도 부르라고!”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친 윈터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조용해졌을 때, 눈이 커진 바이올렛이 정신없이 한쪽 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귀를 대 보니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 소리였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여, 여기서 목소리가 들려요!”

    그 즉시 윈터와 소방대원들은 광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수동 드릴을 넣어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고온과 높은 습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구멍을 내고 있을 때, 소방대원 하나가 땅 파는 것을 멈추고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과, 광부들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윈터가 달려 올라가더니 이럴 때를 대비해 가져온 단단한 수도관과 구조대가 마시던 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작은 구멍 안으로 수도관을 힘으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곳으로 콸콸 물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신이 난 제릭이 소리쳤다.

    “빨리 파서 저 망할 광부들 꺼내 놓고 집에 가자!”

    “예, 대장님!”

    “자, 자! 얼른 집에 갑시다!”

    안에서는 생사를 넘나드는데, 밖에서는 다들 흥분의 도가니였다. 바이올렛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밖으로 나와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있을 때 시작한 작업은 해가 져서 새벽이 되도록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첫 번째 구조자 올라갑니다! 들것을 놔 주십시오!”

    그 말이 들리자마자 근처에 천막을 치고 기다리던 베릴이 들것을 두 팔로 안아 들고 달려왔다.

    잠시 후 눈을 보호하기 위해 검은 천으로 가린 광부 하나가 올라왔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광부의 아내가 달려왔다.

    “아악! 여보!”

    “아빠!”

    아이들 모두 소리치며 달려와 광부를 올린 들것에 매달렸다. 베릴이 소리쳤다.

    “바로 치료를 해야 하니 천막으로 옮겨 주세요! 손이 많이 필요하니 가족분들도 천막으로 와 주시고요!”

    사람들이 우르르 천막으로 달려갔다.

    바이올렛은 자리에 서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동안 광부의 가족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천 번 만 번 되뇐 이름들이 하나씩 그녀의 눈앞을 지나갔다.

    열여덟 명 중 마지막으로 구조된 자는 낸시의 남편 루토였다.

    이제 스무 살, 아내와 동갑인 루토는 다른 광부들에 비해서 심하게 말라 있었다. 제가 젊다는 이유로 힘이 필요한 건 다 제가 하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들것에 누운 그가 신음하며 아내의 이름을 부르자 바이올렛이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낸시는 지금 먼저 나온 광부들의 치료를 돕고 있소. 둘 다 참 강한 사람들이오.”

    그녀의 말에 안심했는지, 루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열여덟 명이 전부 천막으로 들어가자 바이올렛이 비틀거렸다. 윈터가 정신없이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보니 바이올렛 역시 정신을 잃은 후였다. 그녀의 몸이 불덩이였다.

    윈터가 바이올렛을 안아 들자 이글린이 옆에서 핀잔했다.

    “대표님한테 너어무 아깝습니다.”

    “닥쳐.”

    “대표님 아니면 여기까지 오셨겠습니까? 바이올렛이 몇 번이나 얘기하셨습니다. 대표님 덕에 카닉 일족들에 대해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대표님 때문에 여기 오신 겁니다. 고맙다고 하십시오, 일족을 대표해서.”

    그녀의 말에 윈터가 슬쩍 우쭐해서 말했다.

    “그렇지? 나 때문에 온 거 맞다니까 하옐 저놈이 계속 부정적으로 반응하잖아.”

    “하옐이 언제 긍정적인 적이 있었습니까?”

    윈터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한 후 담요를 턱짓하자 이글린이 담요를 가져다 바이올렛을 덮어 주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는 걸 보고 한 걸음 늦게 달려온 제릭이 물었다.

    “전하께선 괜찮으십니까?”

    “내 아내가 괜찮든 말든 그쪽이 무슨 상관이지?”

    윈터가 불쾌해하며 말을 내뱉고는 성큼 걸음을 옮겨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하여튼 몇 걸음 걷기를 바이올렛이 걱정되어 달려오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그가 천막에 들어서자 베릴이 흠칫했다. 윈터가 죽일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바이올렛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욱해서 주먹을 드는데 하옐과 이글린이 달려와 막았다.

    “작은 마님 아프십니다!”

    “그러니까요! 여기 하나 있는 의사를 두들겨 패면 치료는 누가 합니까!”

    두 사람이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윈터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 의사가 하나뿐인 건 사실이었다.

    윈터가 손을 내리자 사람들이 안도했다. 그러나 곧바로 윈터는 베릴의 멱살을 틀어쥐어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내 아내부터 치료해. 나머지는 내 알 바 아니니까.”

    “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대롱대롱 매달린 베릴이 목이 졸려 간신히 대답했다.

    윈터는 그를 떠밀고 천막을 나왔다.

    *

    바이올렛이 정신을 차렸을 땐 침대 위였다. 해가 들어오고 있으니 아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켜 보니 제 허리에 감겨 있던 윈터의 팔이 딸려 올라왔다.

    고개를 돌려 윈터를 본 바이올렛이 혼잣말했다.

    “……이게 편한가?”

    구겨진 상의는 저 멀리 던져져 있고, 편한 바지만 입고 잠들어 있었다.

    바이올렛은 손가락 끝을 가져가 윈터의 눈꺼풀을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으나 시계가 없었다.

    그녀는 협탁에 풀려 있는 윈터의 손목시계를 발견하고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한 바이올렛은 눈을 못 떼고 계속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윈터, 그만 자는 척하고 일어나 봐요.”

    그러자 윈터가 혀를 차며 눈을 떴다. 그는 바이올렛의 손에 들린 시계를 잡아챘다.

    “내 거야.”

    “고장 났어요.”

    “어. 수리하러 가져갔더니 불량이라 바꿔야 한다더군.”

    “그래서요?”

    “바꿨으면 시계가 가겠지.”

    “고장 난 시계를 왜 하고 다녀요?”

    “바꾸면 당신이 준 게 아니잖아.”

    윈터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묻고는 시계를 다시 협탁에 올리고 바이올렛을 잡아 눕혔다.

    “잠이나 더 자.”

    “시계를…… 이럴 거면 시계를 왜 들고 다니는 거죠?”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바이올렛이 한 번 문장 구성을 실패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나 윈터는 더 이상 대답 없이 잠을 청했다.

    바이올렛은 눈을 감은 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쪽으로 기울인 왼쪽 어깨에 새겨진 카닉의 문신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결국 잠이 확 달아난 윈터가 몸을 일으켜 바이올렛의 손목을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매번 이렇게 깨우는 건지 이유나 좀 알자.”

    “내가 뭘요?”

    “왜 매번 깨울 때마다 이렇게 쓰다듬냐고.”

    “흔들어 깨우면 미안하잖아요.”

    바이올렛의 당당함에 윈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여튼 이 여자는 제가 만지작거리는 것에 조금도 죄책감이 없었다. 윈터가 손을 잡는 걸 내켜 하기 시작하니 점점 아무 곳이나 만져도 되는 줄 아는 듯했다.

    잠결에 바이올렛이 보드라운 손으로 팔뚝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이성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허리 아래가 격렬하게 욱신거리는데 그 원흉은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

    윈터가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손을 제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자. 실컷 만져.”

    “이제 깼잖아요.”

    “어, 깼지.”

    바이올렛의 손끝에서 윈터의 강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심장이 이렇게 뛰면 죽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신이 날 죽이게 생겼다고.”

    잡힌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바이올렛의 동공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다. 머릿속에서는 손을 떼야 한다는데, 호기심에 그러지 못했다.

    군살 하나 없는 단단한 배를 내려가다 아랫배에 닿았을 때 바이올렛이 서둘러 손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숨을 내쉬고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잘 알아들었어요.”

    “그렇게 깨우면 돼, 안 돼?”

    “절대 안 돼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바이올렛의 확답을 듣고서야 윈터가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윈터가 다시 샤워를 하고 나온 후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바이올렛을 붙잡는 바람에 두 사람은 침대에서 한참을 더 게으름을 부렸다.

    덕분에 정오가 지나서야 두 사람은 광부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응급조치를 마친 광부들을 옮겨 놓은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기자들이 와 있어 광부들이 짜증이 난 얼굴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무슨 구경 났어? 뭐 이제 와서 난리야!”

    “당장들 꺼져!”

    광부들이 때리는 시늉을 하며 기자들을 밀쳤다. 바이올렛이 신기하다는 듯 윈터에게 소곤거렸다.

    “……저기 당신 같은 사람이 열여덟 명 더 있어요!”

    “그게 그렇게 재밌을 일이야?”

    윈터가 정색하며 되묻는데 광부의 가족들이 달려왔다.

    “부인! 오셨군요!”

    “그렇게 쓰러졌으니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되잖아요. 왜 벌써 돌아다니세요?”

    “다들 생각보다 엄청 건강하답니다.”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비교적 건강한 광부 몇이 목발을 짚고 다가와 바이올렛을 둘러쌌다. 그녀는 조금 놀랐으나 곧 자세를 바로 해 안부를 물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광부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튕기며 노래를 시작하자 바이올렛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 줄 몰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심지어 가사는 좋은 뜻이라곤 없고 오직 가난과 고통스러운 노동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윈터가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으며 소곤거렸다.

    “뭘 놀라. 그럼 칼리본 광부들이 예의 바르게 고맙단 말이라도 할 줄 알았어?”

    “왜 안 하죠?”

    “낯간지러워서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이게 고맙단 뜻이야.”

    윈터가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바이올렛도 기막혀하며 웃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광부들까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가족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기자들이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의 사진기를 바쁘게 설치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선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다행히 광부의 노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고, 온 사방이 신나 하는 것에 비해 바이올렛은 거의 움직임 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이전에 바이올렛이 술집에서 먹었던 이싱을 먹었다. 카닉 일족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만드나 싶은 거대한 솥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바이올렛이 이 음식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신기해하는 동시에 당연하게도 여겼다. 사람들이 쉼 없이 바이올렛에게 말을 걸고, 꽃을 건네주는 바람에 그녀의 무릎이며 머리가 꽃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윈터가 투덜거렸다.

    “내가 그랬지? 당신 주변은 시장 바닥이 된다고. 하기야,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우리 귀한 공주님이 이방인들 사는 곳까지 행차하셨는데.”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물었다.

    “당신 때문에 여기 와 줘서 고맙다는 뜻이죠?”

    “…….”

    “그런 걸로 알게요.”

    윈터가 홀린 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보다 더 아내에게 약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점점 더 그녀에게 약해지는 기분이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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