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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4화 (84/176)

84화

기계 장치를 넣기 위한 작은 구멍은 그날 저녁 바로 뚫을 수 있었다. 그 속으로 기계를 넣고, 소방대원들은 지도를 펼치고 지금 광부들이 있는 위치로 추측되는 구역들을 향해 기계를 움직였다.

다행히 갱도가 비교적 단순했고 길이 막힌 부분도 많지 않아 막힘없이 진행되었지만 기계가 갱도가 아닌 곳으로 빠졌다는 판단이 들 때가 많고 길이 정확하지 않아 계속해서 반복해 시도를 해야 했다.

게다가 처음 광부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21번 구역에서 아무 답이 없어, 모두 죽었을 거라는 제릭의 부정적인 푸념으로 중단될 위기도 겪었다. 그러나 갱도가 무너지며 광부들이 이동을 했을지 모른다는 바이올렛의 주장으로 추적이 계속되었다.

멀찍이 예배당 종탑에서 그들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솔린이 소파에 드러누워 초조하게 작은 고무공을 만지작거리는 윈터에게 말했다.

“아직 기계가 매몰된 광부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대표님. 그냥 저 바위에 폭약을 설치하시죠.”

“하옐, 저 폭파광 좀 쫓아내.”

윈터가 고무공을 집어 던지며 말하자 하옐이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대표님이 평소처럼 윽박질렀으면 벌써 도망쳤을 걸, 놔두시니까 그렇잖아요.”

“전혀 말리고 싶지 않아. 나도 저 멍청이처럼 폭파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니까. 광부들이야 죽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지.”

윈터의 종잇장 같은 도덕심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중요치도 않은 광부들 구하려고 왜 제 아내가 싫은 소리 들어가며 고생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참 동태를 살피던 솔린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폭약을 설치…….”

“솔린 씨.”

옆에서 같이 창밖을 내다본 하옐이 안경을 벗어 셔츠에 걸치며 말했다.

“저 시력 엄청 나쁜데 안경 벗고 봐도 지금 신나서 날뛰는 거 보입니다.”

“…….”

“그 폭약은 나중에 써 보게 해 드릴게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지, 진짜요?”

“네, 진짜요. 비행선을 위해 필요하기만 하다면요.”

하옐이 가만히 솔린을 달래는데, 그들 뒤에서 곧장 바이올렛에게 달려가려고 머리를 쓸어 넘기던 윈터가 말했다.

“물론 비행선에 필요한 실험이 아니라면 네놈이 터트린 것들은 다 네놈 빚이 될 거야. 취미 생활에 돈 보태 줄 생각 없어.”

그의 말에 움츠러든 솔린이 주저앉았다.

바위 앞, 바이올렛은 흙탕 속에서 기계에 달아 둔 밧줄이 당겨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길이의 밧줄이 조금씩 당겨지고 있었으므로, 광부들이 생존해 있음을 알았다.

제릭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이 줄이 움직일 정도면…… 한두 명 힘이 아닐 것 같은데요. 여럿이서 당기는 것 같습니다.”

그때 바이올렛이 서둘러 자리에 주저앉더니 밧줄이 당겨지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일정한 박자로 당겨지는 그것을 바라보다 돌을 주워 바닥에 뭔가를 적었다.

그걸 뒤에서 본 이글린이 박수를 쳤다.

“전신 부호로군요!”

그것을 적고 난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열여덟 명 다 살아 있는 모양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이 빠져 죽은 사람처럼 멍하니 주저앉아만 있던 마을 여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바위로 달려갔다.

“어마! 여보!”

그녀가 맨손으로 정신없이 바위를 두드리자 한 발짝 늦게 알아차린 다른 광부의 가족들도 전부 오열하며 주저앉았다.

생존자가 있는 것을 확인한 제릭이 곧바로 지도를 펼쳐 은퇴한 광부들에게 물었다.

“기계 위치를 표시한 곳으로 보면 여기 이 위치네. 어디쯤에서 파 내려가면 되지?”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제가 젊을 때와 체격이 비슷한 소방대원 하나를 가리켰다.

“저분이 여기부터 세 시간 반 동안 걸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릭이 허락했다.

“리든, 입구에 서.”

“예, 대장님.”

리든이 입구에 섰다.

그러자 은퇴한 광부들이 지도를 확인하고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가며 지도에 표시된 것을 찾았다. 칼리본 사람과 소방대원 전원이 리든의 걸음에 참견하며 달라붙었다.

“여기가 내리막길이오. 다섯 걸음 정도 줄이는 게 좋겠소.”

“리든! 조금 천천히! 지금 걸음이 너무 빨라지고 있잖아!”

다들 광부들이 죽었으리라 생각해 부정적으로 굴었지만,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니 너 나 할 것 없이 두 눈이 반짝거리고 몸에 힘이 생겼다.

누구 하나 지치지 않고 세 시간 반을 걸은 후, 리든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손을 들고 말했다.

“세 시간 반입니다.”

그러자 제릭이 나뭇가지로 소방대원의 주변에 둥글게 선을 긋더니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파.”

그의 한 마디에 소방대원들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제릭이 자부심과 충성심으로 가득한 눈빛을 하고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생존자 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전하.”

“생존자의 안전보다 소방대원의 안전을 우선해 주길 바라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실종자가 생존자로 바뀌자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체력이 있는 모든 사람이 땅을 파고 다지는 일에 몰두한 사이, 바이올렛은 밧줄을 연결한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어떻게든 그 무거운 밧줄을 움직여 신호를 보내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이올렛이 나타나자 이글린이 손을 흔들며 물었다.

“바이올렛,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조 작업 중이니 조금만 버티라는 게 전신 부호로 어떻게 됩니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군.”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바닥에 부호를 적어 주었다.

*

생존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린 바이올렛은 사람들과 떨어진 곳, 판판한 바위 위에 앉아 축 늘어져 있었다.

“저 소방대 놈들 모처럼 세금값을 하는군.”

윈터가 다가오며 말하자 바이올렛이 지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윈터가 그녀 옆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살아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이제 쉬어. 당신 할 일 없어.”

“또 그렇게 못되게 말하죠?”

“하마터면 생매장당할 뻔했던 사람들을 구했군. 훌륭한 사람이야.”

윈터가 금방 말을 고치자 바이올렛이 그제야 웃었다.

그때 윈터의 주변에 쪼르르 동네 청소년들이 모여 앉았다. 윈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야, 저리 꺼져.”

“윈터 씨는 카닉 일족의 자랑이에요!”

“이 근처에 광증이라도 도는 건가?”

윈터가 모질게 말하자 바이올렛이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톡 때렸다. 그러나 이미 광부들의 나쁜 입버릇에 적응해 있는 아이들이 오히려 흥분해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자랑이고 희망이라고요! 저도 커서 윈터 씨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맞아요, 이 거지 같은 동네를 떠나고 싶어요! 광부 일을 해서 꼭 수도로 갈 거예요!”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광부 일을 해서 수도를 가?”

그 말에 아이들이 얼어서 눈만 둥그렇게 뜨고 윈터를 보았다.

“원래 우리처럼 회색 눈을 가지거나 은발인 놈들은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되어있었어. 물론 콕 집어 차별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일족이 많이 사는 지역과 업종의 세율이 높지. 여기 칼리본도 마찬가지야.”

윈터의 매몰찬 말을 듣고 있던 아이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수도에 가고 싶으면 광부 일을 안 할 생각을 해야지. 일단 집을 나와. 수도에 오면 네놈들 일거리는 내가 해결해 주지. 소수자 전형 뭐 이딴 거 안 그래도 이글린이 만들자고 성화였으니까.”

“우와아아…….”

매몰찬 이야기에 울먹울먹하던 아이들의 눈망울이 금방 다시 활기를 되찾아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귀찮아하던 윈터가 아이들과 똑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바이올렛을 발견했다.

물론 그녀에게 허세 부리고 싶은 마음에 일자리를 남발했지만 저렇게 귀여운 눈으로 저를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마터면 아이들에게 집도 하나씩 사 주겠다고 할 뻔했지만 그것부터는 바이올렛이 좋아하기보다 경악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

그로부터 땅을 파는 일이 나흘째 이어지고 있었다.

윈터는 제멋대로 짐을 챙겨 바이올렛의 방으로 들어왔다. 카닉 일족은 원래 부부가 방을 같이 쓰기 때문에 따로 쓰면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란 이유였다.

게다가 미치광이 폭파광이 있어 무섭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다행히 윈터는 카펫 깔린 바닥에서 별 불만 없이 잤다. 오히려 너무 잘 잤다. 그도 함께 구조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은 전날 밤, 괜히 여기까지 와서 육체노동 중인 윈터에게 미안해 딱 하루만 침대 위에다 재워주었다.

일찍 눈을 뜬 바이올렛의 손이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삽질을 해 근육이 부풀어 오른 윈터의 팔뚝을 살며시 감쌌다. 안 그래도 두껍던 팔뚝이 더 두꺼워져 있었다. 바이올렛이 무심코 만지작거리는데 윈터가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뭐라고 했어요?”

윈터가 이불을 걷더니 곧바로 바이올렛에게 뒤집어씌웠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바이올렛이 당황하다가 이불 밖으로 나와 보니 윈터는 곧바로 욕실에 들어간 후였다.

얼마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윈터가 물기를 대충 닦아 내고 상의에 팔을 먼저 끼운 뒤 머리 위로 당겨 입었다.

바이올렛이 윈터 덕에 다시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물었다.

“오늘도 땅을 파요?”

“해야지.”

지반이 매우 단단하긴 하지만 넓게 파 내려가면 사고가 날 위험이 있으므로 한 사람 겨우 설 좁은 땅을 파 내려가고 있었다. 한 명이 파고 다른 한 명이 흙을 위로 퍼냈는데 속도가 느려지면 곧바로 교대했다. 촌각을 다투는 구조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소방대원보다 훨씬 힘이 좋은 데다, 소방대원들보다 훨씬 거칠게 자라 땅을 파고 다지는 일을 월등히 잘하는 윈터도 구조 작업에 끼어들었다.

바이올렛이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거죠?”

“난 원래 힘쓰는 일이 적성이야.”

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바이올렛의 이마를 감쌌다.

“더 자. 열 있어.”

윈터가 허리를 숙이자 작업복으로 입은 셔츠가 헐렁거려 단단한 가슴이 보였다. 이 남자한테도 제 체격보다 큰 옷이 있구나, 싶어 바이올렛은 신기해졌다.

그녀가 칼라를 잡아 몸에 붙이며 말했다.

“가슴이 보여요.”

“그러라고 입는 건데.”

윈터가 능청을 떨자 바이올렛이 정색을 했다.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고 유쾌하게 웃었다.

“육체노동을 하니까 이혼에 관한 것도 잊히고 좋더군.”

“그러네요. 얼마 남지 않았군요.”

“그렇지. 알차게 보내자고. 마지막 날에 샴페인도 터뜨리고.”

바이올렛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떠나고 자리에 앉은 바이올렛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해 봤을 때, 헤스턴 변경백과의 재혼을 거부할 수 있는 가장 수월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너무도 당연히 그것은 제가 미혼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이제 또 어디로 떠나게 될까.”

바이올렛이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몸이 추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지만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바이올렛은 마을 사람에게 빌린 옷을 입고 연보라색의 수수한 보닛을 쓴 후 숙소를 나섰다.

독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이미 광부의 아내들이 소방대원들에게 가진 걸 다 털어 극진한 식사 대접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가는 팔로는 구조 작업에 방해만 되었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밧줄을 매단 곳에 도착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던 이글린이 달려왔다.

“바이올렛, 왔어요?”

이글린은 바이올렛의 신념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칭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그녀의 호의에 바이올렛은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렛이 나타나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다가왔다.

“왜 나오셨어요? 더 쉬시지.”

“부인께서 몸져누우시기라도 하면 저희가 더 면목이 없잖아요.”

마을 사람들은 소중한 보석이라도 다루듯 말하고 행동하며 바이올렛을 다시 들여보내려 애썼다.

내가 도움이 안 되는 게 아닐까, 바이올렛이 애정 가득한 주변 사람들 속도 모르고 걱정하고 있을 때, 산 위에서 괴로워하며 소리치는 소방대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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