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처음 소방대는 건성으로 바위에 드릴을 고정하고 바위를 뚫는 시늉을 했다. 누가 봐도 불성실한 태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것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나 열흘 내에는 도저히 끝낼 수 없을 것처럼 속도는 지지부진했고,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이 죽었을 것이란 불안감에 잠식ㅊ
“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을 건가?”
“ㅌ더 빨리 한다고 변하는 거 없습니다. 재촉하지 마시죠.”
“어떻게 변하는 게 없나, 이렇게 급할 때.”
“어차피 죽었다고 하잖습니까. 속도에 의미가 없습니다.”
제릭이 말하고 킬킬거리자 바이올렛이 그의 팔을 잡아 들어 보고 던지듯이 놓으며 물었다.
“술을 마셨소?”
“원래 우리는 쭉 술을 마셨습니다. 취하지 않아 본 적이 없어서 깨면 오히려 일을 그르칩니다.”
제릭이 능청을 떨자 뒤에서 소방대원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바이올렛은 그런 그들을 노려보다가 도리가 없어 휙 돌아서 버렸다.
도대체 저 망할 소방대가 어떻게 해야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소방대의 기세를 올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언제 왔는지 이글린이 말했다.
“왕실 소방대잖아요. 왕에게 충성하겠다고 온 사람들이라고요. 저런 사람들의 기세를 북돋는 법은 뻔하죠.”
“…….”
“이용하세요. 자기가 가진 걸 이용할 줄 모르는 게 바이올렛의 가장 큰 약점이에요. 솔직히 애초에 우리 대표님한테 돈이고 사람이고 내 달라고 아양이라도 떠셨으면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저 아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까짓 신념이 문제인가요? 이래서 사람들이 도덕적인 사람을 싫어하는 거예요. 언제 나에게 불이익이 될지 모르거든요.”
이글린의 말을 가만히 듣던 바이올렛이 휙 몸을 돌렸다.
그녀는 밥을 먹고 세 시간째 그늘에 앉아 노닥거리는 소방대에게 걸어갔다.
바이올렛이 돌아오자 제릭이 슬슬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곧 작업 시작할 생각이었으니 그만 좀 채근하십시오. 일도 쉬어 가며 해야 효율이 오르지 않습니까?”
“자네는 무엇을 섬기지?”
그녀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제릭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왕실을 섬깁니다.”
“자네의 태도는 그런 것 같지 않네. 내 명령에도 이토록 불성실하니 자네가 왕실을 섬긴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술기운에 풀려 있던 제릭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가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 아니.”
호칭을 고치려던 바이올렛이 마음을 다잡았다.
“왕실이 해체되었다고 나라가 사라진 건 아닌데, 자네들의 이 태도는 무엇인가? 지금 자네들은 칼리본 광부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네. 라크라운드의 왕녀인 내 명령으로 이곳에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제릭이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꾸짖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용서하지.”
바이올렛의 말에 제릭이 안도하며 서둘러 일어났다. 제릭뿐만 아니라 왕실을 위하여 일하기를 희망해 소방대에 들어간 대원 전원의 눈빛이 의욕으로 불탔다.
제릭이 돌아가더니 제복 위에 입고 있던 천막 천으로 만든 우비를 벗어 던지고, 제복 상의까지 벗어 던졌다.
“왕녀 전하 명령이시다! 덥다고 꼬맹이들처럼 칭얼거리지 말고 빨리 파!”
“예, 대장님!”
곧 제릭을 따라서 나머지 소방대원들도 상의를 벗어 던졌다. 수년째 놀고먹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몸 단련을 좋아하는 소방대원들이라 하나같이 몸이 다부졌다.
바이올렛은 내심 놀랐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유지했다.
이전에 윈터를 따라서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지 않았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윈터도 덥다며 상의를 내던지는 것을 봤기 때문에 이제는 겉으로나마 침착할 수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들의 모습을 감시하듯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가까이 보이는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의 중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이글린의 말대로였다. 신념을 기만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광부들은 이미 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기 들어가는 세금과 소방대원들의 노동력이 두려웠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남편이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내들의 희망이 두려웠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키론에 혼자 처음 떨어졌을 때도 이렇게 막막하고 두렵진 않았는데.
그녀가 곧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떨리는 두 손을 감싸 쥐는데, 그녀의 손이 커다란 손에 덥석 잡혔다.
“무슨 짓…….”
어떻게 생각해도 남자 손이라 바짝 경계하며 고개를 든 바이올렛의 시선이 윈터와 마주쳤다.
바이올렛이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기 있어요?”
“대단한 능력이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저렇게 많은 남자들 옷을 벗기다니.”
의지할 곳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라 너무 반가웠지만, 윈터의 빈정거림에 바이올렛도 핀잔부터 나갔다.
“지금이 음담패설을 할 때예요? 여긴 정말 무슨 일이에요?”
“당신이 연락도 없이 하도 안 들어와서.”
“네에?”
바이올렛이 정말로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의미예요, 그게?”
“이게 어려운 말인가? 연락 한 번 없이 하도 집에 안 들어오니까 그렇지.”
“여기 온다는 말 전했잖아요?”
“출발하기 전에 한 거잖아.”
윈터가 정말로 이해를 못 하자 바이올렛이 윈터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
“그럼 나더러 집에 못 들어간다는 보고를 매일매일 하라는 건가?”
“뭐?”
“당신이 한 말이에요. 그게 당신의 신념이라고 생각해서 따라 준 건데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이 없으니,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물었다.
“혹시 그런 건가요?”
“뭐.”
“자기는 연락을 안 해도 되지만, 난 해야 한다든지.”
그녀의 말에 한참 생각하던 윈터가 대꾸했다.
“정확하군.”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군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양심에 아주 미미한 가책을 느끼며 아내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주었다.
바이올렛이 그 죄책감을 말갛고 억울해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콕콕 찔러 대자 윈터가 괴로운 표정으로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결혼 직후에는 옆도 뒤도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 당신과 붙어 있기 시작하면 빚은 누가 갚고, 유지비는 어떻게 감당해?”
“그건 당신의 이기적임에 대한 답이 되지 않아요. 왜 당신은 연락하지 않아도 되고 난 해야 하죠?”
“원래 나도 남의 연락 안 기다려! 그런데 당신은 어디 있는지 궁금하니까!”
윈터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 바람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바이올렛이 놀라서 그의 팔을 톡 때리고 밀어냈다. 그러더니 제가 머무는 숙소 뒤로 윈터의 팔을 당겨 끌고 갔다.
두 사람은 서둘러 건물 벽에 붙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조용해졌는데도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그는 바이올렛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더운지 목덜미가 벌게져서.
“나도 궁금하단 말이에요.”
“뭐가 궁금해, 회사에 있겠지.”
그의 투덜거림에 바이올렛이 손으로 톡 팔을 때리자, 윈터가 못 이기고 말했다.
“……알았어. 당분간은 매일매일 보고하지.”
“약속해요.”
뭐 며칠이나 남았다고 약속을 하자는 건진 모르겠지만, 윈터는 바이올렛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슬쩍 그녀의 손가락에 걸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손가락을 당기며 물었다.
“그래서, 연락이 없어서 온 거예요?”
“아니. 우리 발명가가 괜찮은 기계를 만들어서 보여 주려고. 당신 묵는 방에 가지. 기술 유출되면 안 되니까.”
바이올렛이 묵는 방을 확인해 보고 싶어 윈터가 핑계를 대자 그녀가 금방 수긍했다.
바이올렛이 묵는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윈터가 구석구석 살피며 말했다.
“생각보단 좋은 방이군.”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방을 준 것 같아요.”
자그마하고 깔끔한 방이었다. 특히 침대가 무척이나 커서 두 사람이 눕고도 자리가 남을 듯했다. 다만 윈터는 방의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 들어 트집을 잡았다.
“100년은 된 것 같은 벽지군. 가구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이 넓은 방에 등유 하나?”
그렇게 불만을 늘어놓는 주제에 침대는 마음에 드는지 벌써부터 헤드에 머리만 기대고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바이올렛은 까딱까딱거리는 그의 발끝이 이 방을 마음에 들어 하는 표현처럼 느껴졌다.
바이올렛이 그와 마주 보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와 줘서 고마워요. 억지 부렸는데.”
“뭐, 아무튼 회사 이름도 빌려 썼으니 최소한의 값어치는 해야지. 우리 비행선 연구소의 발명가가 도움이 될 만한 발명을 했더군.”
“정말요? 어떤 발명품이죠?”
“밖에서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기계라더군. 기계는 자두 정도 크기야. 그 정도 공간만 수동 드릴로 뚫어 주면 알아서 움직일 거란 얘기지.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갱도 입구가 불안정하다면, 광부들이 있는 위치를 정확히 찾아서 위에서 뚫고 들어가는 거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굉장해요! 시간을 훨씬 단축하겠군요!”
“게다가 훨씬 더 안전하지.”
바이올렛이 고마움과 다시 차오르는 희망에 무심코 윈터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다 이내 움찔하고는 서둘러 그를 놓아주었다.
“미안해요. 아직 화났죠, 나에게?”
“화? 내가?”
“네. 내가 당신이 말리는데도 여기 와 버렸잖아요. 화가 많이 났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신은 당신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에겐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심 따라와 주길 바란 것도 있어요.”
“아.”
“그것보다 당신도 이제 궁금하다고 했으니까. 내가 당신이 연락 안 될 때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알겠어요?”
바이올렛은 섭섭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며 제가 궁금했었다는 말을 하자 세상에 무서울 것 없던 윈터가 대답을 못 하고 뒤로 몸을 피했다.
그는 이 기분이 지독히 낯설었다.
혹시 관심받는 기분이 이런 것과 비슷한가? 그럼 길에서 행복하게 웃고 다니며 짜증나게 굴던 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이런 기분을 맛보고 다닌 건가?
아니, 근데 칼슨 로우처럼 사랑만 받고 자란 놈들은 왜 약쟁이가 된 거지?
윈터가 온갖 의문을 가지고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자 바이올렛이 그를 흔들었다.
“윈터,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어? 어.”
“발명품은 그래서 어디에 있어요?”
“벌써 가져다 놨을 거야.”
“그래요? 고마워요.”
“좀 더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해 줘야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윈터가 농담을 하자 바이올렛이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광부들 생사를 확인한 후에요.”
“후에는 폴짝폴짝 뛸 거야?”
“당신이 원하면 해 보겠어요.”
바이올렛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