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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2화 (82/176)
  • 82화

    제릭의 말에 바이올렛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호기심을 보이고 있던 열 살쯤 된 소년이 물었다.

    “누가 죽었어요?”

    그러자 제릭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저 안의 광부들.”

    “아닌데. 우리 아빠 아직 저기에 있는데. 우리 아빠는 안 죽어요.”

    “사람은 다 죽어.”

    “아니에요. 예배당에서 목걸이를 주거든요.”

    소년이 낡은 셔츠 속에서 줄을 꼬아 만든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 목걸이가 광부들을 지켜 주는 거예요. 그래서 광부들은 안 죽어요.”

    소년의 확신에 소방대원들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리 이방인 차별이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들이어도 아이들의 눈망울과 그 아버지들의 목숨이 겹쳐지니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소방대원 몇이 가져온 장비를 착용하며 말했다.

    “대장님, 일단 왔으니 시작은 하는 게 어떨까요?”

    “맞습니다. 여기까지 온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깔짝거리기라도 하고 가시죠?”

    부하들의 마음 약한 소리에 제릭이 인상을 쓰며 다시 바이올렛을 보았다.

    “보십시오. 부인께서 마음 편하시려고 저희를 이용하시는 겁니다, 지금.”

    “좀 더 생각해 보겠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저들 말대로 시작은 해 주시오. 부탁할 테니.”

    제릭이 혀를 차고는 돌아서서 말했다.

    “시작해.”

    그의 말에 소방대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뒤늦게 구조가 시작된 후, 바이올렛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해야 했다. 만약 살아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최소 열여덟 명이 일주일 치 식량과 물로 그 기약 없는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애초에 살아 있다는 확신도 없이 노동력을 투자하는 건? 그건 맞는 것인가. 혹시 데려온 소방대원 중에 한 명이라도 목숨을 잃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마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거기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바이올렛의 주치의였으며, 그녀에게 약을 먹였던 의사 베릴과 카닉사의 공동 부대표 이글린이었다.

    베릴이 덜덜 떨며 달려와 바이올렛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 작은 마님!”

    뒤따라온 이글린이 물었다.

    “이 작자 목을 쳐 버리려고 데려오신 건 아니죠?”

    “사형은 신중히 해결해야 할 문제네. 모든 법관의 3분의 2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지. 애초에 이런 죄로 사형을 선고하는 법관은 없을 걸세.”

    그녀의 대답에 이글린이 벌써부터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농담이 안 통하시는 분과 은근히 꽤 사셨네요, 대표님은. 농담 엄청 좋아하시는 분인데.”

    “안 그래도 종종 답답해하더군.”

    “그나저나 어떻게 아시고 저에게 연락을 하신 겁니까? 애초에 전 어떻게 알아보셨고요?”

    바이올렛이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글린은 놔두면 혼자 알아서 줄줄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예상대로 이글린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께 들으셨어요?”

    “응.”

    “그러셨구나. 아, 대표님은 엄청 화나신 거 아시죠?”

    “그럴 만하지. 미안하다는 편지라도 보내야겠어.”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러곤 이글린에게 물었다.

    “자네는 회사 일을 해야 하지 않나?”

    “그만뒀습니다.”

    “……뭐라고?”

    “우리 일족을 위한 일에 제가 빠질 수 없죠!”

    이번이 열한 번째 퇴사인 이글린이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제 혈통에 대하여 말도 꺼내기 싫어하는 윈터만 보다가 이글린을 보니 낯설었다.

    바이올렛이 무릎 꿇은 베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광부들이 구조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게. 구조된 광부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제 몸을 챙기지 못하고 있으니 신경 쓸 것이 많을 걸세.”

    “예! 물론입니다! 저를 용서만 해 주시면 얼마든지…….”

    베릴이 다급하게 말하는 중에 이글린이 때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조건 달지 마, 이 새끼야.”

    그녀의 행동에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이글린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베릴은 제 몸도 들어갈 듯한 크기의 가방을 들고 자그마한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마을에는 의사가 없어 의사를 찾으려면 세 시간을 넘게 걸어 번화가로 나가야 했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와 노인이 있는 집마다 와서 진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이글린은 돈이 부족한 시기에 사죄를 빌미로 무료 인력을 데려온 건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으나, 이렇게 용서해 주기에는 저 의사가 너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이글린이 팔짱을 끼고 베릴의 뒷모습을 보며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저걸로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복수하셔야죠.”

    “이거면 충분하네.”

    “대표님의 부모님께는 하실 거죠?”

    거리낌이라곤 없는 이글린의 말에 바이올렛은 놀란 얼굴이었다. 이렇게 주변 상황 신경 안 쓰고 제 할 말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윈터도 그런 편이었지만, 그와 큰 차이점이 있다면 윈터는 주변 분위기를 알면서도 내뱉는 것이지만, 이글린은 정말로 제가 하는 말의 문제 자체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올렛은 그런 이글린을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이글린이 재촉했다.

    “네? 하실 거죠?”

    “이미 하는 중이네.”

    “네, 네에? 진짜요? 어떻…… 아, 작위 문제를 걸고넘어지셨군요?”

    “…….”

    그리고 이글린은 눈치가 더럽게 없는 것에 비해 상황 파악은 잘했다. 특히 약점 찾는 능력이 좋았다. 그 능력을 바탕으로 그녀는 윈터가 성질을 못 참아 뒤집어엎어 버린 협상 테이블들을 책임졌다.

    바이올렛이 계속 잠자코 있으니 이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걸로 알겠습니다. 대표님은 작위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시던데요?”

    “…….”

    “하긴, 차차 말씀하시겠죠. 저도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우리 카닉 일족에게서 처음으로 귀족 작위를 계승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자넨 참.”

    “눈치 없다고요? 많이 듣습니다.”

    이글린이 말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능력이 있단 말이었네.”

    그녀의 말에 이글린이 모처럼 말문이 막혀 한 걸음 물러섰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이 일 끝나면 꼭 회사로 돌아가게. 자네 같은 사람이 옆에 없으면 남편에게는 매우 큰 손해일 테니.”

    “……저 오늘 처음 뵀지만 작은 마님이 엄청 마음에 듭니다.”

    “처음 봤는데 왜 작은 마님인가. 부인이라고 부르게. 뭐…… 불편하지 않다면 이름을 불러도 되고.”

    바이올렛이 담담히 말하고 돌아섰다. 이글린은 입이 절로 벌어져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온갖 제가 아는 잡지식들을 늘어놓았다.

    *

    윈터는 칼리본까지 온 제가 너무 황당해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아내는 믿을 만한 여자가 아니다. 바이올렛이 무슨 위험한 짓을 할 줄 알고 믿는단 말인가.

    그는 멋대로 돈을 쥐여 주고 얻은 예배당 종탑에서 망원경으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하옐이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혹시 사고 날까 봐 대표님과 공동 부대표님들은 같은 배도 안 타시면서 말입니다. 언제 산사태가 날지 모르는 이런 위험한 곳에 둘이나 와 있는 것도 모자라서 비행선에 쓰는 최신 기술까지 노출시키려 하십니까?”

    그의 잔소리에 윈터가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럼 어떡하라는 거지? 내 아내는 평생 이방인 같은 건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어. 여길 오게 된 것에 내 탓이 없다고는 못 한다고.”

    “작은 마님은 원래 이런 상황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대표님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성정이…….”

    “무슨 소리야. 내 아내는 이런 되도 않는 일에 뛰어들 정도로 계산 없이 살지 않아. 저놈들은 나와 같은 혈통인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하옐은 제 작은 마님이 사람 목숨 구하는 일에 셈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확신했으나, 저 우쭐해 있는 걸 건드리느니 차라리 그의 돈을 퍼부어 이 일을 빨리 처리하고 여길 뜨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윈터가 함께 온 빼빼 마른 발명가에게 말했다.

    “이봐, 쓸 만한 거 있으면 꺼내 봐.”

    그러자 유난히 윈터를 무서워하는 동갑의 발명가, 솔린이 가방을 열었다. 그가 눈도 안 마주치고 말했다.

    “이, 이런 걸 가져왔습니다!”

    “뭔데.”

    “접착식 폭약인데요. 이렇게 붙이면 저 정도 바위는 폭파를 시킬 수 있어요!”

    “……안 그래도 갱도가 불안정한데 폭약을 설치하자고? 갱도 어디에 광부들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일단 터트리고 보자?”

    윈터가 묻자 솔린이 아쉬운 표정으로 다음 발명품을 꺼내 보였다.

    “이건 좀 더 쓸 만합니다! 동료인 세라의 발명품인데요. 원래 라크라운드 드릴은 힘으로 돌려 가며 써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건 자동이라 힘으로 돌리지 않아도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이 동시에 일하는 힘으로 돌아가죠!”

    “그, 그거 굉장한데요, 대표님?”

    하옐이 감격해서 윈터를 보는데, 한 번 폭약을 꺼내는 모습에서 이 발명가의 어리석음을 느낀 윈터가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자동으로 작동하지?”

    “아, 전기를 이용하면 됩니다!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지만 대표님 재력이라면 그 정도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전신국이 세 시간 거리인 거 못 봤어? 여긴 전기를 끌어올 수 없어. 이제부터 끌어오려고 해도 석 달은 걸리지.”

    솔린이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지 발명품을 들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니면 이걸 그냥 사적 호기심을 해결할 기회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솔린이 다음 기계를 꺼냈다.

    “이, 이건 정말 라크라운드 과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건데요. 전기가 필요하긴 하지만 충전식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밖에서 조종할 수가 있어서요, 길만 알려 주면 돌을 뚫을 정도는 아니지만 흙 정도는 파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계 자체가 엄청난 소음을 내니 근처에 도착하면 광부들이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필요하겠네. 광부들의 위치를 알면 지상에서 아래로 뚫고 들어가야겠군.”

    윈터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자, 이제부터 해결해야 할 건…….”

    “지상에서 아래로 뚫고 들어가는 게 안전한지요? 그건 은퇴한 광부들에게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그거 말고. 이 기계를 어떻게 몰래 아내에게 가져다주냐는 거지.”

    그러자 하옐이 너무 한심해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뚜벅뚜벅 걸어가서 건네주시는 건 어떠세요?”

    “안 돼.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내가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여기 와 있어? 재혼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 아냐. 그럼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건데?”

    “도망치신다고 했다면서요.”

    “별수 없으니까 보내는 거지! 다른 방법이 있으면 찾아야 할 것 아냐! 수도에 그 좋아하는 정원을 차려줬는데 왜 딴 곳에 가서 살아!”

    윈터가 역정을 냈다.

    그 말에 솔린이 연필로 인해 시커메진 소매로 식은땀을 닦아 내며 물었다.

    “그렇게 떨어지기 싫으시면 이혼을 안 하시면 되잖습니까?”

    그의 말에 기겁한 하옐이 다급하게 달려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휴, 이 사람이 너무 혼자 일해서 사회성이 바닥났나 봐요.”

    하옐이 눈짓하며 손을 내리자 솔린이 이제 알았다는 듯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죄, 죄송해요! 이혼당하시는 거라 안 할 수가 없는 거군요!”

    “솔린 씨! 도망치세요! 빨리!”

    하옐이 소리치며 욱하는 윈터를 말리려고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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