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1화 (81/176)
  • 81화

    그러자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달래듯 말했다.

    “미안한데 할 말이 있으면 다음에 해요. 소방대에게 가 봐야 해요. 지금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왕성 소방대면 한미하긴 해도 다 귀족가 놈들이잖아. 그놈들이 미쳤다고 이방인을 위해서…….”

    언성을 높이던 윈터가 중간에 답을 알고 중얼거렸다.

    “당신이 칼리본 광산까지 따라갈 계획이군.”

    왕실 소방대는 화재나 낙뢰 등으로 인한 왕성의 파손 등에 대한 안전을 책임지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고, 혹여나 왕성을 떠나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왕족을 사고에서 구하는 일이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온전히 왕족의 안위를 위해 존재했기 때문이다.

    왕실 소속의 소방대가 움직인다는 것은 즉, 그들이 구해야 할 왕족 본인과 그들의 자산이 있다는 뜻이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야겠죠.”

    “미쳤어? 당신이 거길 왜 가. 그딴 놈들을 당신이 왜 신경 써?”

    마차에 낸시가 함께 타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올렛은 언사가 거친 윈터를 밀어내며 일단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윈터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얼굴로 물었다.

    “이봐, 공주님. 나랑 결혼하니까 자기도 무슨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껴? 당신이랑 상관없는 사람들이야. 물론 나와도 상관없지.”

    “나는 그렇다고 쳐도, 당신은 왜 상관이 없죠? 같은 일족인데.”

    “내가 왜 그딴 놈들이랑 같아. 같지 않으려고 죽어라 기어 올라왔는데. 이 나라 사람이라고 다 당신과 같지 않은 것처럼 같은 일족이라고 다 같지 않아. 우린 남이고,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다른 사람이 되려고 지금까지 살았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당신 회사 이름은요? 문신은요? 그들과 함께 살았던 적도 없는데 문화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뭐예요?”

    “그 얘기가 지금 여기서 왜 나와?”

    “당신은 항상 스스로를 천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게 원해서라고는 생각 안 해요. 싫어해서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고요. 나는 이게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내가 그딴 놈들에게 관심이 없다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니까!”

    바이올렛이 윈터와 같이 언성을 높였다.

    그다지 큰 소리를 내는 법도, 무례해지는 법도 없던 바이올렛이 소리치자 윈터는 물론 그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까지 행동을 멈췄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난 갈 거예요. 나는 칼리본의 광부들이 다섯 살의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열두 살의 당신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해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우린 항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바이올렛이 말을 마치고 다시 마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러자 윈터가 힘주어 팔을 다시 붙잡았다.

    “무슨 의미냐니까?”

    “나라도 당신 옆에 있어 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이요. 그랬다면 지금의 당신이 이렇게 상처투성이는 아니었을까 싶은, 그런 순간들이요.”

    “…….”

    윈터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바이올렛이 마차를 타고 그대로 떠났다. 떠나는 마차를 잠시 바라보던 윈터가 투덜거렸다.

    “……내가 다섯 살 땐 태어나지도 않았던 주제에 뭐라는 거야.”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제 귀를 툭툭 털어 댔다. 저 고집불통인 아내의 말에 모처럼 다시 그 망할 종소리가 들렸다.

    *

    소방대는 왕성 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왕성 앞에 선 바이올렛의 얼굴을 보자마자 문지기가 반가워 울먹거리기까지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안으로 걸어 들어가 소방대 숙소의 문을 열었다.

    할 일은 없지만 거취가 결정되지 않아 여전히 급여를 받으며 술을 마시고 시간을 죽이던 소방대가 문 앞에 단 종을 치는 소리에 들고 있던 술병을 집어 던졌다.

    “누구야!”

    “문 열리는 소리 났지, 지금?”

    그들은 이야기하다가 다시 술을 마셨고, 결국 막내가 눈치껏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자신을 불쾌하다는 듯 바라보는 여자를 발견했다.

    “……누구십니까?”

    “소방대 대장을 불러오게.”

    “아니, 부인께선 누구신데 그렇게 막 부르십니까?”

    그리 말하던 그의 뒤통수를 뒤에서 따라온 소방대원이 부서지도록 후려쳤다.

    “이, 이 덜떨어진 놈아! 어떻게 왕녀님을 못 알아봐!”

    “예? 어…… 으아악!”

    단숨에 술에서 깬 소방대원들이 정신없이 왕성을 뛰쳐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왕성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제릭을 불러오러 떠난 사이, 바이올렛은 술 냄새에 인상을 쓰면서도 말을 이었다.

    “왜 소방대 대장이 낮 시간에 이곳에 없는 거지? 대장은 9시부터 6시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아, 아무래도 할 일이 명확히 없다 보니…… 죄송합니다, 부인.”

    “소방대의 관리는…….”

    에쉬 로렌스의 일이다. 왕실이 사라지더라도 기사단도, 소방대도 에쉬가 통솔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왕실을 멋대로 없앤다고 그가 가져야 할 책무가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세금이 줄줄 새고 있음에도 잠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에쉬를 생각하니 바이올렛의 눈동자에 노기가 차올랐다. 저도 다를 바 없지만, 에쉬는 더더욱 아버지를 닮아 엉망진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 제릭이 나타났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소방대는 젊은 청년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대장조차 올해로 서른둘이었다.

    “부인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제 잘못을 조금도 인정할 마음이 없다는 듯, 삐딱한 표정과 자세로 바이올렛의 앞에 섰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제릭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삐딱한 사내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 모습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칼리본 광산 입구가 무너져 일손이 필요하니 함께 가 주게.”

    “저희가요?”

    “지금까지 세금이 허투루 쓰인 것 같은데, 사람 목숨 구하는 데 쓰면 의미 있지 않겠나.”

    “그야, 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제릭이 바이올렛을 힐끔힐끔 보더니 물었다.

    “윈터 경께서 돈깨나 있으시지요?”

    “세금을 받고 일하는 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얹어 줄 순 없네.”

    그녀의 단호한 말에 제릭 역시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저희 일이 아니니 안 가겠습니다.”

    제릭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네. 그래서 내가 함께 칼리본에 갈 생각이네.”

    “……예?”

    “자네들의 의무는 로렌스 가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그토록 위험한 곳에 간다면 따라오는 것이 맞지 않나?”

    “따라가도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제릭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하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녀가 돌아섰다.

    그리고 너무 초조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낸시에게 말했다.

    “자, 이제 일손을 구했으니 나는 의회로 가서 재정 지원을 받아 보겠소.”

    “돈이…… 보통 많이 드는 것이 아닐 겁니다. 입구가 완전히 막혀서…….”

    “그럴 때 쓰라고 세금이 있는 것 아니오.”

    바이올렛이 말하는데 제릭과 얼떨결에 채비를 마친 소방대가 뒤따라왔다. 제릭이 뒤를 따라 걸으며 계속 빈정거렸다.

    “저희는 일해도 에쉬 전하의 명령이 우선이지, 왕녀님의 명령은 우선이 아닙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소방대라는 게 자네같이 말 많은 자들도 할 수 있는 일인가?”

    “…….”

    “이제야 좀 소방대원 같아졌군.”

    바이올렛이 빈정거리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속으로 제 남편이 자신을 완전히 망쳐 놨다고 생각했다.

    *

    의회에 도착한 후, 긴급 재난 목적으로 구비되어 있던 돈을 일부 지원받아 북부로 가는 기차에 타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한 것이 53시간째였다.

    낸시는 시간을 황금처럼 여기며 움직이는 바이올렛을 보며, 제가 여기저기 헤매며 보낸 48시간을 후회했다. 곧바로 바이올렛을 찾아왔다면 이틀을 아끼는 건 물론이고, 그 여유 시간 동안 의회에서 더 많은 돈을 받아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돈은 너무나 적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바이올렛은 그 돈으로 모두를 칼리본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3등석 표를 샀다.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짓던 제릭이었으나 바이올렛이 같이 3등석에 탈 거라는 것을 알자 대표로 나서서 플랫폼에 선 그녀에게 말했다.

    “부인께서는 적어도 2등석을 타십시오. 명색이 로렌스 가문의 적녀이신데 어떻게 저도 처음 타 보는 3등석을 타십니까?”

    “그럴 수 없소. 자네가 중간에 도망칠까 봐.”

    “제가 수행할 임무가 없어서 게으름을 부린 거지,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만.”

    제릭이 멋쩍게 대꾸했다. 그러다 곧 힐끔 낸시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방인 놈들을 위해 저희가 목숨을 걸 거란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나도 자네들이 정의감에 목숨을 걸길 바라는 건 아니요. 하지만 광부들을 구하기 위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길을 찾는 일을 해 주겠지.”

    “그 정도는 해 드리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약한 가장 빠른 기차가 들어왔다.

    바이올렛은 3등석에 올라타며 안절부절못하고 따라다니던 젠에게 말했다.

    “남편에게 칼리본에 다녀올 테니 좀 늦을 거라고 말해 주렴.”

    “이렇게 바로 출발하시면 크게 노하실 텐데…….”

    “노하면 따라오겠지.”

    바이올렛이 담담히 말했다.

    젠은 바이올렛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고집불통이라, 그녀를 쉽게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렇게 부부가 고집불통이니 서로 다툼만 일어나는 것이 분명했다.

    *

    칼리본은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예배당이 있고, 그곳을 빙 둘러 작은 광장이 있었으며, 그 광장을 중심으로 광부들의 가족이 사는 집이 있었다.

    바이올렛 일행이 도착하니 카닉 일족의 아이들이 제 어머니 뒤에 숨어 경계하고 그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카닉 일족이 아닌 사람들을 경계하도록 교육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검은 제복을 입은 소방대가 신기했는지 그들을 관심 있게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저 사람들은 뭐 하러 왔어?”

    “광부들이야?”

    아이들이 소곤소곤 물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광부들이 매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듯했다.

    소방대는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낸시를 따라 광산 입구로 들어섰다.

    광산 입구는 거대한 바위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제릭이 상태를 살피고 은퇴한 광부들과 이야기하더니 바이올렛에게 돌아왔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애초에 다 죽었을 겁니다, 솔직히.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구조 작업을 한다면 식량은 둘째 치고, 안에 물도 일주일 치뿐이라고 했죠? 이제 65시간이 지났고.”

    “그렇소.”

    “가장 안전하게 갱도로 들어갈 방법은 저 바위를 뚫는 것뿐이랍니다. 저희 열다섯 명이 사람 하나 통과할 크기로 뚫으려면 최소한 닷새는 걸립니다. 그리고 바위에 뚫은 구멍으로 들어가서 갱도를 찾아다니며 광부들 위치를 찾아내려면 그 기한이 무한정 걸릴 거란 얘기입니다. 예, 뭐 저자들이 그동안 살아남을 주술이라도 쓴다고 쳐 보죠. 그래 봤자.”

    “……그래 봤자?”

    “저희 소방대원들 중 이방인 따위를 구하러 저 갱도에 들어갈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