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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0화 (80/176)

80화

헤스턴 가문에서 보낸 편지를 확인한 에쉬의 표정이 구겨졌다.

바이올렛이 귀족 가문들에 이 상황에 대해 알리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는 이야기였다. 헤스턴 가문은 체면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바이올렛의 적극적인 행동이 난처한 듯했다.

에쉬는 지금까지 제가 해 온 선택이 모두 정의롭고 합리적이었다고 믿었다. 나라의 빚도 제 힘으로 갚았고, 민심도 제 힘으로 가라앉힌 것이다.

그런데 제 여동생은 제 안위를 위해 이혼을 하겠다고 들지를 않나, 이제는 그 뒷수습을 위해 마련해 놓은 재혼 자리도 거부하고 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진 에쉬가 친구들을 불러 사냥이라도 다녀오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의 호위인 로번이 말했다.

“전하, 수도 왕성 앞에 북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헤스턴?”

“아니요, 칼리본의 소금 광산에서 근무하는 자들의 아내들이랍니다.”

“그자들이 왜?”

“광산 입구가 무너져 광부들이 갇혔으니 도움을 청한다더군요.”

“그걸 나더러 도와 달라고? 내가 농사를 짓는다고 정말 농부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군. 당장 꺼지라고 해.”

제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는 에쉬 로렌스는 광부의 아내들이 감히 자신을 만나러 왔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이게 다 제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친 사고를 수습하려고 왕실을 해체해서 제 위신이 떨어진 것 아닌가.

에쉬가 혀를 차며 취미인 사냥을 위해 벽에 걸어 두었던 산탄총을 꺼내 들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로번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만나는 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요즘 들어 왕실에 적대적인 기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일단은 달래시는 게…….”

로번의 설득이 먹혔는지 에쉬가 짜증을 내며 산탄총을 다시 걸었다. 그는 별수 없이 제가 머무는 필리체 가문 저택을 떠나 지금은 비어 있는 왕성으로 향했다.

6개월 전, 윈터 블루밍이 왕성에서 나라에 귀속된 부분을 제외한 전부를 사들였다.

그리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왕성이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에쉬의 이미지에는 큰 타격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윈터는 큰돈을 버려 가며 일부러 그렇게 에쉬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할 터였다. 그에게 애국심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에쉬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광부의 아내들이 달려왔다.

“저희 남편들 좀 살려 주십시오!”

“산사태가 일어나서 입구가 어딘지 찾을 수조차 없습니다! 저희 남편이 이틀째 광산에 갇혀 있습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여자들이 서럽게 울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쉬는 제가 이 자리에 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나 요즘 제게 적대적인 기자들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로번의 말처럼 이들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도 제 이미지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많이 쓸 생각도 없었다. 그는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책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곧 지금 자신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만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내 호위 기사에게 이야기 전해 듣고, 바로 해결 방법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네.”

“저, 정말이십니까?”

“나의 사랑하는 여동생인 바이올렛에게 이 일을 해결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네. 내가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도록 하지. 아, 그 애 남편이 자네들 같은 카닉 사람이니 흔쾌히 도와줄 걸세.”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광부의 아내들이 혼란스러워하며 얼떨결에 인사하고는 에쉬가 알려 준 바이올렛 부부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짐을 처리한 에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로번에게 말했다.

“바이올렛이 거절하면 기자들은 바이올렛에게 따라붙을 거고, 수락하면 재혼하기 싫다고 수 쓸 시간이 없겠지.”

“……그렇군요.”

“바로 사냥 가야 하니 모임에 연락 돌려.”

“예, 전하.”

로번은 정중히 대답하고도 영 걱정스러운 얼굴로 광부의 아내들 쪽을 보았다.

*

바이올렛 부부가 탄 마차는 바이올렛이 고른 나무 아래 멈춰 섰다. 나무 아래에는 사랑스러운 피크닉 준비가 되어있었다.

바이올렛이 자리에 앉자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은 윈터가 구두 앞코로 연분홍색 푹신한 천의 끝을 툭 건드렸다.

“내가 장미 장식까진 참았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장미 장식 당신이 하자고 한 거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그건 룰루가 멋대로 한 거야.”

툴툴대는 투로 말하던 윈터는 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이올렛을 한 걸음 물러나 감상했다. 하필 옷도 꽃이 수놓인 드레스에, 아기자기한 접시들에 놓인 디저트며 홍차 찻잔이며 맞춰서 배치한 것처럼 보였다.

“이리 와서 앉아요.”

“동화 속 공주님 같군.”

윈터가 담담히 말하며 바이올렛 근처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투명한 화병에 윈터가 준 꽃잎을 담으며 말했다.

“여기 꽃잎이 들어가면 소원이 이뤄진대요. 당신이 제안한 데이트니까 당신이 빌게 해 줄게요.”

“여기 꽃잎이 들어갈 확률이 얼마나 돼.”

“그렇게 어려운 확률을 이겼으니까 대단한 거죠.”

윈터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병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며 말했다.

“나무 잘 골랐네.”

“그렇죠?”

바이올렛이 같이 올려다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이후로 특별한 대화는 없었으나, 두 사람은 이 조용함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리고, 작은 새들이 종종 영롱한 소리를 냈다.

이것저것 디저트를 맛보던 바이올렛이 샌드위치 하나를 한 입 먹더니 눈을 조금 힘주어 감았다가 떴다.

“왜?”

그 순간을 포착한 윈터가 이유를 묻자 바이올렛이 투린이 없는 걸 확인하고 작게 소곤거렸다.

“……너무 달아요.”

윈터가 그녀의 손에서 샌드위치를 받아 한입에 다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더니 맛있는지 상체를 일으켜 같은 샌드위치를 하나 더 집었다.

바이올렛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샌드위치는 당신 건가 봐요.”

“그런 모양이지. 당신은 너무 단 건 또 안 먹으니까.”

그가 대꾸하고 샌드위치를 한입에 다 넣자 바이올렛이 웃었다. 그러자 윈터가 샌드위치를 턱짓하며 말했다.

“봐. 이미 4분의 1로 자른 거잖아. 이걸 뭘 또 한 입씩 나눠 먹…… 혹시 입에 꽉 차게 음식을 먹으면 무례한 건가?”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을 많이 못 봐서.”

“어쨌든 보긴 한 거잖아. 근데 왜 날 보고 웃어?”

“웃음이 나와서 웃었어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먹어도 웃음이 안 나는데 당신이 그렇게 먹으니까 이상하게 웃음이 났어요. 음…… 아무래도 기분 나쁜 일인가요?”

“아니, 그냥 이유가 궁금했어.”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으로 등 뒤쪽을 짚어 몸을 뒤로 기대고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냥 내가 해서 웃긴 거였군.”

그러더니 얼음을 한가득 넣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그건 또 어느 부분이 웃겼는지 바이올렛이 터진 웃음을 못 참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방금 전 웃었을 때 윈터가 기분 나빠했을 거라 생각했던 터라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꾹꾹 참는데 윈터가 그녀의 오른 손목을 붙잡아 얼굴에서 손을 뗐다.

“또 웃네.”

“미안해요.”

“웃지 마.”

“그럴게요.”

바이올렛이 대꾸하더니 웃지 않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안 웃으려 하니 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을 참느라 복잡해진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윈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웃지 말라는데 왜 자꾸 웃어.”

“못 웃게 하니까 더 웃음이 나요, 자꾸……. 그런데 당신은 왜 웃어요?”

“상대방이 계속 웃는데 난 안 웃으면 무례한 거잖아.”

“그건 확실히 그러네요.”

바이올렛이 수긍하더니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윈터의 얼굴이 오늘따라 아이 같아서, 모든 경계가 풀어졌다.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젠이 정신없이 달려와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자, 작은 마님!”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물었다.

“젠, 무슨 일이니?”

“아, 앞에 광부의 아내들이 왔는데요, 북부에 큰일이 난 모양이에요!”

숨이 넘어가게 뛰어온 젠이 숨을 한 번 돌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칼리본의 소금 광산이 무너져서 그 안에 광부들이 갇혀 있대요! 에쉬 도련님을 먼저 뵀는데 여기로 가라고 했답니다! 벌써 48시간째래요!”

바이올렛은 내용을 전해 듣자마자 급한 마음으로 벗어 두었던 구두를 신으며 윈터에게 말했다.

“가 봐야겠어요. 젠, 광부의 아내들을 응접실로 데려와 주렴.”

“네, 작은 마님!”

바이올렛이 바로 젠을 따라가려 하자 윈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이 그 여자들을 왜 봐. 보면 몰라? 딱 봐도 에쉬 그 자식이 당신한테 떠맡기는 거잖아, 얻는 건 없고 힘들기만 한 일.”

“왜 얻는 게 없어요? 사람 목숨이 걸렸는데.”

“당신이 아는 사람 목숨이야? 아니잖아.”

“하지만 날 찾아온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바이올렛이 다시 몸을 움직여 가려 하자 윈터가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모르는 척해. 지금까지 공주님 대우 받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제 와서 관심을 가지는 거지?”

“왜 막는 거예요?”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불쾌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득을 따지는 것뿐이야. 당신이 지금 원하는 건 재혼을 안 하는 거잖아. 이제부터 귀족들에게 편들어 달라고 여기서 매일 사람들을 초대하고 파티를 열어도 시간이 부족해. 아니, 당장 도망칠 준비할 시간조차 빠듯하다고. 어차피 무너진 광산의 광부들은 다 죽었을 테니 시간과 돈만 날릴 테지만 그래, 정말 운 좋게 한 명이라도 구했다고 쳐 보자. 그럼 그 한 명이 당신의 상황을 얼마나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

“칼리본에서 왔다잖아. 거기 광부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카닉 일족 놈들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아뇨.”

“당신이 구해 줘 봤자 라크라운드 사람들은 왜 카닉 일족 놈을 구해 주느라 자기 세금을 날렸냐고 반감이나 가질 거라는 얘기지.”

“아, 그런 얘기였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 팔을 윈터에게서 빼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 일이 맞네요.”

그리고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

저택의 사용인들이 광부의 아내들에게 차를 내주었지만 아무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녀들이 여기 수도의 왕에게 찾아올 마음을 먹기까지 너무나 많은 거절이 있었으므로, 눈빛에서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도 그중 가장 어린 광부의 아내, 낸시가 남은 힘을 끌어모아 다시 바이올렛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난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력이 필요하겠군.”

“이제 더 이상 부탁할 곳이…… 네?”

“수도에는 왕족에게 문제가 일어날 때 출발하는 소방대가 있소.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으니, 그들에게 부탁해 보겠소.”

당연히 거절부터 하리라 생각하고 매달릴 요량이었던 낸시가 바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 그곳의 상황을 확인하는 게 좋겠소. 그리고 낸시, 나와 함께 소방대를 만난 후 길을 안내해 주겠소?”

“네, 네! 가, 감사합니다, 전하!”

“지금 이런 말 할 시간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왕실이 해체되었으니 그냥 부인이라고 불러 주시오.”

바이올렛의 말에 낸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일행을 먼저 돌려보낸 낸시가 바이올렛을 따라나서며 말했다.

“매몰된 지 48시간이 지났습니다. 열여덟 명이 광산에 매몰되어 있고, 식량은 일주일 치가 전부입니다.”

“식수는?”

“아마 마찬가지로 일주일 치 양을 가져갔을 겁니다.”

“의사를 데려가야겠군.”

바이올렛은 곧 이 기약 없는 여정에 함께할 적당한 의사를 떠올렸다. 그녀는 베릴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이글린에게 연락을 보낸 후 곧바로 소방대가 있는 왕성으로 가려 마차에 올랐다.

그때 마차 문 사이로 들어온 윈터의 손이 바이올렛의 팔을 붙잡았다.

“내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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