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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79화 (79/176)

79화

물론 안잘리도 바이올렛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사의 이득이 훨씬 더 중요했다.

윈터가 설득을 이어 갔다.

“헤스턴 가문이 무슨 좀생이들도 아니고, 별장 좀 안 내줬다고 그렇게까지 들고 일어나겠어?”

“네. 들고 일어납니다. 이미 헤스턴 가문과 사이가 안 좋으시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설마 귀족들이 그렇게까지 유치할 리가 없잖아.”

“이건 유치한 게 아니라 자존심 문제입니다. 귀족들은 자존심 굽히기 싫어 전쟁도 불사하는 자들이고요.”

“넌 자존심 없잖아.”

윈터의 말에 안잘리가 꿈틀하더니 드물게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

“있습니다. 대표님이 밟고 계셔서 안 보이는 거지.”

“그랬다면 미안했다. 그러니까 해결 좀 해 줘.”

“아무리 그러셔도 이건 해결 못 합니다, 대표님.”

미안하다고까지 했는데 안잘리는 단호했다. 보아하니 진짜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모양이었다.

수도에 와서 사흘째 본사에 틀어박혀 회의 중이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회사 전원이 반대하니 윈터가 아무리 대표라 한들 계속 우길 수가 없었다. 결국 한 명씩 불러들여 회유를 시작하기로 했다.

반대하는 모든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안잘리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안잘리부터 회유를 하려는 속셈이었지만, 한 달을 호텔에서 푹 쉬고 책만 읽어 다시 강건해진 그는 쉽게 회유되지 않았다.

윈터가 물었다.

“재혼 그거, 반대하면 안 할 수 있긴 한가?”

“없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부인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도 가문 사이에서 이미 이야기가 끝났을 테니까요. 목에 칼을 들이밀어서라도 식장에 데려다 놓을 겁니다.”

“범죄자 집단이 따로 없군.”

“결국은 그 재혼을 안 하게 해 주시려고 북부 시장 전체를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내 회사잖아.”

“네. 비행선 사업도 혼자서 결정하셨죠. 그러니 이번엔 안 된다는 겁니다. 거기 앞으로 들어가야 하는 돈이 막대한데 북부 시장까지 버리면 어떡하겠다는 겁니까?”

윈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바이올렛의 인생에서 저만 사라져 주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 해도 만약 제 모든 유산이 바이올렛의 것이 된다면 이야기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그는 돈이 많은 것이 해결해 준다는 것을 체득했다.

분명 그녀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윈터가 어느 정도 체념하고 대답했다.

“됐다.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런 그의 말을 제 억지를 밀어붙이겠다는 말로 들은 안잘리가 눈을 부릅떴다.

“지금 알아서 하실 정신 아니시지 않습니까!”

안잘리가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멈칫했다. 윈터의 손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걸음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문을 확 열었다.

그 앞에 서 있던 바이올렛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어. 전혀.”

윈터는 오히려 제 쪽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바이올렛이 안잘리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휴가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잘 다녀왔나요?”

“예. 좋은 휴가 보냈습니다.”

안잘리는 이상하게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바이올렛에 약간 난감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바이올렛이 제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윈터의 표정이 오한이 들 정도로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회사의 명운을 등에 업고 있었으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대표님께서 억지 부리시는 것처럼 북부 시장을 포기하시면 정말로…….”

말하는 순간 윈터가 입을 막으려 드는데, 그와 동시에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히고 남편을 보았다. 윈터가 그 눈빛을 느끼고 인상을 쓰며 손을 내리자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던 안잘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로 손해가 큽니다. 게다가 새로운 사업까지 시작했기 때문에 북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입니다.”

안잘리가 윈터의 위협을 이겨 내고 끝까지 말해 버리자 그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바이올렛은 이해했다는 듯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안잘리가 정중히 인사하고 그곳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윈터가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댔다.

“이래서 사람이 쉬면 안 돼. 쉬고 오니까 저렇게 대들 힘이 생겼잖아.”

“윈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뭘.”

“이건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어요. 나 하나 때문에 회사를 위험에 빠뜨려 달라는 건 정말로 이기적인 소리예요. 예정대로 진행해요.”

“그럴 수 없어.”

“있어요. 내 재혼이니까 내 힘으로 해결해 볼게요. 당신이 연락 없이 들어오지 않는 사흘 동안 생각해 보니…….”

“……잠깐만. 화내는 거 아니지? 당신 일 해결하려고 안 들어간 건데.”

“화내는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당신은 사흘 정도는 집에 연락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잖아요. 이해해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는 안심하다가, 다행히 뒤늦게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썼다. 바이올렛은 윈터를 닮아 가는지 점점 비꼬는 말을 곧잘 했는데, 윈터와 달리 표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아 한 박자 늦게 ‘비꼰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두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은 윈터가 변명하듯 말했다.

“하옐이 나 늦는다고 했잖아.”

“네. 하옐이 한 번, 집에 와서 늦을 거라고 했었죠.”

“그런데 왜 그래? 그럼 나더러 집에 못 들어간다는 보고를 매일매일 하라는 건가?”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윈터는 바이올렛을 책망했다. 바이올렛이 포기했다는 듯 폭 한숨을 쉬었다.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다음에 재혼하게 되면 그렇게 하세요. 물론 매일매일 집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죠.”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는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인상을 쓰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당신이 무슨 수로 해결하겠다는 거지?”

“일단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잠시 피해 있을 생각이에요.”

“도망을 치겠다고?”

“피신…… 네, 도망이죠.”

“난 금방 찾을 거야.”

윈터가 혼잣말하듯 말하자 바이올렛이 의아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찾죠? 당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니까, 당신에게는 말하고 갈 생각인데요?”

“……아.”

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윈터가 그제야 안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위자료가 생기면 더 멀리 도망칠 수 있을 거예요.”

윈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던져두었던 넥타이를 찾아 들며 말했다.

“당신이 도망쳐 지낼 곳은 내가 알아보고 있어. 나도 내 재산이 한 푼이라도 에쉬 로렌스에게 넘어가는 건 싫으니까.”

“음, 당신이 잘 알 테니까…… 고마워요.”

“이번엔 아주 호화로운 도망 생활이 될 거야.”

윈터가 곧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데이트를 해 둬야겠군.”

“갑자기요?”

“곧 떠날 거라며. 그 전에 해 둬야지. 우리 이혼 전까지 데이트도 충분히 하기로 했는데, 하도 툭하면 싸워서 별로 못 했잖아.”

그가 툴툴거리자 바이올렛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해사하게 웃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 집 정원 구경할까요?”

“아, 그럴까.”

윈터는 ‘우리 집’이라는 말에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가 죽일 듯이 잡아 댄 안잘리가 보면 서러워서 퇴사해 버릴 함박웃음이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네. 얼마나 큰지 여유 생길 때마다 산책했는데 아직도 못 본 곳이 너무 많아요.”

“당신은 참 모든 걸 성실하게 해.”

“그런 편이죠.”

바이올렛이 새침하게 대꾸하곤 곧 농담이었다는 듯 웃었다.

윈터는 아내를 만나자마자 모든 마음의 경계와 분노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좋아하는 나무는 생겼나? 피크닉 하지, 꽃도 좋은데.”

“생겼어요.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정원 도착해서 알려 줄게요, 어느 나무인지.”

“기대되는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니 이야깃거리가 많아졌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며 마차로 향하는 모습을 본 직원 하나가 정원 피크닉 준비를 하라고 전신실에서 전달하고 나오는 하옐을 붙잡고 물었다.

“비서님, 두 분 조정 기간 중 아니세요?”

“아, 맞아요.”

“대표님…… 완전 딴사람 같으신데요? 나사가 풀린 것 같고, 자꾸 웃으세요, 무섭게…….”

“그야…….”

하옐은 참고 있던 불안감이 터졌는지, 마침 잘됐다는 듯 직원을 붙잡고 마음속에 있던 것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같아지는 거 맞으니까요! 물론 전 두 분 이혼에 찬성합니다. 완전 찬성이죠. 저런 개차반이랑 어떻게 살아요, 그렇죠? 우리 작은 마님처럼 좋으신 분이 왜 굳이 그런 짐을 떠맡으시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은 마님께서 떠나시면 저 개차반이 업그레이드될 거라는 것이 정설이거든요! 그래서 말이죠! 전 두 분 이혼하시면 당장 그만두려고 사표를 준비했습니다!”

“비, 비서님?”

물어봐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속에 있던 것을 쏟아 낸 하옐이 꾸벅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러고는 홀가분하게 돌아섰다.

*

마차에 타서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 바이올렛의 시선이 윈터의 넥타이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저렇게 격식을 차리는 것을 당연하게 느꼈을 텐데, 지금은 윈터가 불편해할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그러자 윈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러자 바이올렛이 말없이 셔츠 칼라를 들어 넥타이를 올렸다. 윈터가 그것을 마저 벗으며 재차 물었다.

“왜, 피크닉용 넥타이가 따로 있나?”

“아뇨, 불편해 보여서.”

그녀가 답하고는 다시 정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충격받은 표정을 짓던 윈터가 다시 물었다.

“……없어, 피크닉용?”

“없어요.”

“난 또 뭐라고.”

윈터가 이제 알았다는 듯 대꾸하고는 문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머리를 받쳐 기댔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다가,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무슨 트집만 잡는 사람인 줄 아나 봐요.”

“그럼 아닌가?”

“당신이 늘 그렇게 삐딱하지만 않으면 나도 트집 잡을 일 없어요.”

“딱히 불만이 있다는 뜻은 아니야.”

“……아니에요?”

“별로 안 싫어.”

그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에 놀란 바이올렛이 창밖을 보고 있는 윈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나도 뭐…… 당신이 삐딱한 게 싫기만 한 건 아니에요. 이제 적응도 했고, 가끔은 좋아 보이기도 해요.”

“의외군.”

바이올렛은 어쩐지 윈터가 창밖만 보는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아 자신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 눈을 마주치기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마차는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 정원 앞에 멈춰 섰다. 마차가 멈춘 곳에는 앞에 또 다른 마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동화에서나 본 듯한 하얀 말과 소파를 빨간 장미로 꾸며 만든 하얀색의 마차였다.

“어쩌다가 이런 마차를 구한 거예요?”

바이올렛이 당황하며 묻자 윈터가 대꾸했다.

“옆집 꼬마가 공주님은 꼭 하얀 말이 끄는 마차를 타야 한다잖아.”

“여섯 살짜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군요. 부대표 말도 안 들으면서.”

“웬만한 어른들보다 똑똑한 여섯 살이지. 회사에도 그 녀석만도 못한 직원이 지천이야.”

윈터가 천장 덮개를 열어 둔 마차에 먼저 올라타서 허리를 숙여 바이올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이올렛이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윈터가 그녀 곁에 털썩 앉은 뒤 출발하라고 마부에게 턱짓했다.

그리 넓지 않은 길로 마차가 느긋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황홀한 봄이었다. 바이올렛은 정원에 온 마음을 빼앗겼고, 손을 밖으로 내밀어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어도 잡기 어려운 꽃잎은 흔들리는 마차에 탄 그녀의 손을 잘도 빠져나갔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피크닉 하기 정말 좋은 날씨네요.”

“그런가.”

윈터가 얼핏 보면 건성이라고 생각할 법한 말투로 대꾸하며 뒤로 기대서 맞은편 의자에 두 다리를 교차해 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윈터는 비가 오더라도 그녀와 피크닉을 하는 날이면 날씨 따윈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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