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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78화 (78/176)

78화

윈터는 곧바로 헤스턴 가문에 관한 것을 논의하기 위해 회사로 떠났다.

바이올렛 역시 전략을 짜야 했다.

젠이 종이와 펜을 깔끔하게 앞에 놓아 주자 바이올렛이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며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젠이 헤헤 웃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종이와 펜과 잉크 위치가 정석이구나.”

“그러니까요! 여태 제가 아무렇게나 놔 드렸는데 한 마디도 안 하시고! 게다가 지금까지 제가 문진을 한 번도 안 가져다 드렸잖아요. 문진이 필요한 것도 몰랐어요!”

“그 정도는 내가 가져다 놓으면 되지 않니. 고맙구나, 중요하지도 않은 예절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하옐에게 배운 거구나?”

“맞아요!”

바이올렛은 두 사람의 가까워지는 관계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고, 흐뭇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러므로 젠은 바이올렛이 이혼을 하고 나면 받게 될 사업체를 운영할 때 비서가 필요할 것이기에 제가 비서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윈터는 가급적 비밀로 하길 원했으니까.

바이올렛은 종이에 하나씩 현재 상황에 관해 적기 시작했고, 옆에서 힐끔힐끔 그것을 보던 젠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글씨가 정말 예뻐요.”

“로렌스 가문 전통 서체란다. 마음에 드니?”

“엄청요. 아, 자리 비켜 드릴게요!”

“고맙구나.”

라크라운드의 명문가가 헤스턴 가문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들 중에는 분명 왕실을 멋대로 이용하는 에쉬에게 반감이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었다. 아니, 있는 게 정상이었다.

바이올렛은 그들에게 모두 편지를 적을 생각이었다.

편지를 보내야 하는 가문 이름들도 미리 적어 두었다. 에쉬의 편이 명백한 가문에도 일단은 편지를 보내 볼 생각이었다.

손목이 욱신거리도록 편지 쓰기를 이어 가고 있을 때,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젠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작은 마님, 저 그러니까…… 선왕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내 어머니가 오신 거라면 엘라 필리체 부인이라고 하면 된단다.”

바이올렛이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발코니로 모시렴. 날이 좋으니.”

“네, 작은 마님!”

젠이 서둘러 달려 나갔다.

에쉬의 부탁으로 곧 찾아올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내가 라크라운드로 돌아오긴 했구나.’

바이올렛은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걸음을 옮겼다.

*

이 저택에서 가장 완벽한 티타임 장소는 바이올렛의 방과 연결된 발코니였다.

테이블 서너 개는 너끈히 들어갈 크기의 발코니에서는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다보였고, 대리석으로 된 난간에는 대륙 전설 속의 모든 신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발코니로 들어서는 제 어머니 엘라 필리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집에서 처음 가지는 티타임이 어머니와 가지는 시간이군요. 의미 있네요.”

바이올렛의 말에 엘라 역시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너도 참, 어떻게 1년을 혼자 그렇게 살았니?”

“키론은 무척 좋은 곳이었어요. 편안하고, 따듯하고. 알고 보니 남편도 신경 써 주고 있었고요.”

“그랬구나.”

엘라가 앉아 있으려니 룰루가 내린 근사한 차와 투린이 만든 간단한 티 푸드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예의상의 근황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엘라가 본론을 꺼냈다.

“남편과는 어떠니? 숙려 기간 중이라고 들었는데.”

바이올렛은 잠시 윈터와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 변했어요.”

“변하다니?”

“예전보다 훨씬 저와 시간을 많이 보내요.”

“의외구나.”

“네. 정말.”

이야기가 나오니, 전날 자다가 악몽에 발작을 일으키던 남편이 떠올랐다. 저를 끌어안고서야 그는 진정을 찾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다섯 살짜리가 어머니에게 버려지는 일보다 끔찍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봄은 좋은 계절이라, 정말 금방 끝나 버리잖아. 당신과 나의 시간도 그럴 거야.”

그녀가 윈터의 목소리를 떠올릴 때, 엘라가 말했다.

“다행히 잘 지내는 모양이네.”

“네.”

“위자료로는 그럼 그렇게 큰 싸움이 일어나진 않겠구나.”

“그럴 거예요. 그 사람도 내가 제대로 위자료를 챙겨 가길 원하니까요.”

“그러니? 그렇게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앞으로 이혼할 많은 여자들을 위한 거라고 하더군요. 언제부터 그렇게 사회적인 걸 신경 썼는지 모르겠지만.”

바이올렛은 말하다 보니 어쩐지 조금, 윈터를 자랑하는 것처럼 된 것이 이상해 자중하고 입을 가볍게 다물었다.

그러자 엘라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잘됐구나. 헤스턴 가문에도 면목이 서겠지.”

엘라의 말에 바이올렛이 조금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에쉬가 그랬나요? 제가 헤스턴 변경백과 재혼할 거라고?”

“에쉬만 그런 게 아니라, 로렌스 가문 사람과 헤스턴 가문 사람과 블루밍 가문 사람까지 모두가 동의한 거야.”

“제 의견도, 남편 의견도 없이요?”

“바이올렛. 우린 의견을 가지고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나도 네 아버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다. 왕손이라서 결혼한 거지. 남편도 마찬가지야. 날 사랑해서가 아니라 필리체 가문의 적녀라서 결혼한 거야.”

“부부는 서로에게 헌신해야 해요. 라크라운드의 결혼 서약에 언제나 들어가는 말이잖아요.”

“그래. 서로에게 물론 헌신해야지. 하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과 하렴.”

“…….”

“너도 이제 내 말을 알아들을 정도의 어른은 되었잖니.”

“아, 어머니.”

바이올렛이 크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그런 결혼은 한 번이면 충분해요.”

“바이올렛.”

“저는 이리저리 거래 조건으로 결혼하러 다니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에요.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실지 몰라도요.”

바이올렛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위자료에 손댈 생각 마세요. 특히 에쉬는 동전 하나도 못 가져가요. 단 한 개도.”

어머니를 앞세워 이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에쉬는 끔찍했고, 지금 당장은 어머니도 미웠다.

로렌스, 블루밍, 헤스턴 세 가문이 이 이권 싸움에 얽혀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키론에서의 여유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유 때문인지, 바이올렛은 이 상황이 더더욱 숨이 막혔다. 엘라가 정원 쪽을 보며 말했다.

“넌 많은 걸 가지게 될 텐데, 에쉬에게는 아무것도 없잖니. 제발 한 번이라도 네 오빠를 불쌍하게 여기렴.”

“어머니는 제가…….”

울컥 소리치려던 바이올렛이 입을 다시 다물었다.

제 손으로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다는 말이 어머니 앞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어머니가 아들만 바라보아도, 그 이야기만은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엘라가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 봐야겠구나. 다음에는 헤스턴 변경백의 작위 수여식에서 보겠구나.”

“제가 결혼을 거절하면 에쉬는 작위를 수여하지 못할 거예요.”

“그럼 헤스턴 가문 같은 명문가가 자기들끼리 주먹구구로 작위를 물려주고 물려받아야 한다는 거니?”

“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가문 간의 일을 네 멋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다시 도망쳐야겠군요. 신부 없이 결혼할 수는 없을 테니.”

“바이올렛!”

“어머니. 저를 희생해서 오빠를 위하는 일에 예의를 앞세우지 마세요. 그건 예의가 아니라 폭력이에요.”

“세상에, 에쉬의 말대로구나.”

“무슨 말이요?”

“네가 윈터 경을 닮아 가면서 같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간다고.”

“그래요. 그러니 고상한 두 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제 위자료에 관심 가지지 마세요.”

바이올렛이 일어섰다.

“에쉬의 말을 대신 전하러 오셨죠? 그럼 에쉬에게도 대신 전해 주세요. 한 번 내 남편을 이용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로렌스 가문의 사람은 어느 누구든 내 남편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자격이 없어요. 앞으로 받게 될 위자료는 온전히 가정을 지키려고 힘쓴 내 노력의 대가예요.”

“믿기지가 않는구나. 네가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게.”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녀의 말에 엘라는 딸에게 뺨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룰루에게 말했다.

“부인을 모셔 가게.”

“네, 작은 마님.”

이내 블루밍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 어마어마한 정원이 딸린 저택은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 저택은 그 존재만으로도 수도에서 조금 빗겨나 있던 이 지역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엘라는 사람들이 몰려오자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그곳을 나왔다.

그녀가 떠나자 바이올렛의 얼굴에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하던 작업을 이어 나갔다.

그때 슬그머니 들어온 젠이 물었다.

“작은 마님, 수도 오시자마자 이렇게 여기에만 계실 건가요?”

“아…… 그러게. 마음이 너무 급했구나.”

“아무리 바쁜 일이 있으셔도 수도에 돌아왔으니 사교계 활동도 하셔야 한다고 비서님이 그랬어요.”

“그래야겠지?”

바이올렛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젠이 봐줬다는 듯이 물었다.

“우선은 정원 한 바퀴 산책하실래요? 체리가 익기 시작했거든요. 체리 나무 구경하러 가요.”

“그거…… 정말 좋은 제안이구나.”

예상대로 바이올렛이 반색하며 젠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체리를 따러 간다는 소식에 룰루 부부도 따라나섰다. 금방 북적북적해지자 바이올렛의 표정에서도 피로감이 가셨다.

정원사가 앞장서며 말했다.

“여기 남부 체리들은 6월이 되면 아주 달게 잘 익고요. 여기서 100m 더 가시면 북부 체리 나무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이제 슬슬 먹어도 됩니다.”

“빨리 가시죠, 작은 마님!”

투린은 당장 따서 체리파이를 만들 생각에 신이 나 호들갑을 떨었다. 바이올렛이 따라가 보니 정말로 체리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투린이 체리를 따며 말했다.

“남부 체리보다 당도가 떨어지니까 이건 잼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바이올렛이 대답하고 체리를 두 손 가득 따서 행복하게 바라보자 젠이 맑은 물과 얼음이 가득 든 나무통을 들고 왔다.

“여기 한 번씩 씻어 먹어요, 시원하게!”

“아이고, 우리 아가 똑똑해라.”

룰루가 손녀 보듯이 젠을 칭찬하자 젠이 신나서 우쭐한 얼굴을 했다.

바이올렛이 두 손과 함께 체리를 얼음물 속에 담갔다가 뽀득뽀득 씻어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조금 덜 익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웃었다.

“조금 덜 익긴 했지만 맛이 좋네.”

“그래요? 맛있어요?”

네 사람은 체리를 따서 얼음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탈탈 털어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었다. 사람들과 있으니 어머니와의 대화며 현실이 잠시 날아가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

“절대 안 됩니다. 정말, 절대로 안 됩니다.”

휴가에서 돌아온 안잘리는 기계처럼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윈터는 소리를 지르다 지쳤는지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조금 숙이고 회유를 시작했다.

“안잘리, 내 말을 좀 들어 봐.”

“싫습니다.”

싫다는 말에 들은 척도 없이 윈터는 룰루가 방금 보내 준 전보에 다시 힘을 얻어 전보를 들어 보였다.

방금 전 있었던 엘라의 방문 내용과 함께 바이올렛이 한 말을 고대로 적어 룰루가 보낸 것이었다.

한 번 내 남편을 이용했으면 충분해요. 로렌스 가문의 사람은 어느 누구든 내 남편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자격이 없어요. 앞으로 받게 될 위자료는 온전히 가정을 지키려고 힘쓴 내 노력의 대가예요.

“이거 보여? 내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잖아. 이건 날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윈터가 말하는 표정을 보며 안잘리는 왜 자랑하려고 저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가, 약간 의아해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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