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윈터는 바이올렛이 떠나던 날부터 종종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바이올렛은 총을 들고 있었고, 윈터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렸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무슨 설득을 해도, 위협하고 애원하고 온갖 방법을 다 써도 그녀는 결국 총을 들었고, 윈터가 보는 앞에서 제 머리를 쐈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제 곁을 떠나기 위해 몸이 바뀌는 방법을 말하던 날, 그녀가 죽은 후 그 수 초 동안 벌어진 일을 선명히 기억했다.
탄알이 발사되고 바이올렛은 풀썩 의자 뒤로 기댔다.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윈터는 아마도 2, 3초 동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의 제가 느낀 감정을, 윈터는 영원히, 아주 조금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에 묻어 두었더니 그것이 꿈으로 드러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이 꿈속에서는 끝나지 않고 계속 흘러갔다.
그러고 나서 잠에서 깼구나, 생각할 때면 처음 바이올렛과 몸이 바뀌던 날의 아침이었다.
침대 아래로 내려서다가 약병과 샴페인병을 발견했다. 속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고, 자세히 좀 살펴보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몸은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가 비명을 지르고 오열하는 소리에 놀란 하인들이 달려와 윈터를 깨울 때까지, 그의 악몽은 계속되었다.
*
바이올렛이 서둘러 복도로 나가 보니 플립이 윈터의 방 침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정신없이 그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플립, 이게 무슨 일인가?”
“대표님께서 악몽을 꾸시는 모양입니다!”
“악몽?”
“예, 대표님께서 종종 이렇게 심한 악몽에 시달리실 때가 있어서…… 그래도 요즘은 좀 괜찮았는데 다시 이러시네요…….”
플립의 손에는 수면제와 술이 들려 있었다. 바이올렛이 기겁을 해서 말했다.
“술과 약을 같이 먹이면 안 되지!”
“저희도 여러 가지 시도해 봤지만, 이것 말고는 대표님을 다시 재울 방법이 없습니다.”
플립이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도대체 상태가 어떻기에 방법이 없다는 건가. 바이올렛은 황망해하며 침실로 들어섰다. 윈터는 악몽에 시달리느라 몸도 제대로 비틀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서둘러 그의 침대에 올라가 윈터를 흔들었다.
“윈터, 일어나요. 윈터!”
그녀가 흔들자 윈터가 어느 순간 확 눈을 떴다. 그는 바이올렛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하게 자리에 앉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윈터는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거친 맥박 소리가 바이올렛의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그의 잠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찝찝하다는 생각보다 막연한 걱정이 앞섰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왜 이렇게 놀란 거예요?”
한참을 겁에 질려 숨을 헐떡거리던 윈터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바이올렛의 옷깃을 쥐었다.
문 앞에 선 플립은 윈터가 바이올렛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진정을 찾는 모습을 당혹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악몽을 꿀 때, 하인들은 윈터를 깨우는 것에 버거움마저 느껴야 했다. 체격은 물론 힘도 무지막지한 그가 버둥거리기 시작하면 근처에 가는 것조차 위험했던 것이다.
게다가 잠에서 깨면 다시 잠이 들지 못하고 계속 술을 들이켜 주변 모두를 두렵게 했다. 가끔은 취해서 물건을 집어 던지고 화를 내기도 했는데, 차라리 그럴 때가 안심이 되었다. 문을 잠가 버리고 조용해지면 죽는 게 아닌가,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러던 그가 저렇게 수월하게 안정을 찾았다는 것이 플립은 놀라웠다. 그리고 작은 마님이 사라진 후 시작된 이 악몽이, 온전히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플립은 지금에 와서야 확신했다.
플립이 협탁에 술과 약을 내려놓았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눈치껏 인사한 플립이 그곳을 나갔다. 바이올렛이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다시 윈터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은근히 겁쟁이네요, 당신은. 그렇게 무서운 꿈이었어요?”
바이올렛의 체구에 맞게 기술적으로 몸을 구기고 있던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바이올렛의 한 손목이 꽉 붙잡혀 있었다. 아프게 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윈터가 협탁으로 손을 뻗자 바이올렛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무슨 악몽을 꿨는데 이렇게…… 게다가 술과 약을 함께 먹으려 들면 어떡해요?”
“당신은 먹었잖아.”
“내가요?”
“응. 한 번 그랬어.”
“언제요?”
바이올렛은 언제를 말하는 건지 선뜻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윈터가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아, 바이올렛이 그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넘기며 물었다.
“무슨 꿈이었는데 그래요?”
“내 인생에서 제일 끔찍했던 장면.”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녀가 그 이후 말이 없으니 윈터가 혀를 차고 물었다.
“내가 친어머니에게 버려지는 꿈을 꿨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닌가요?”
“아니야.”
“그럼요?”
그것보다 더 끔찍한 순간이 있을 수 있나,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을 본 윈터가 코웃음 치더니 바이올렛을 꽉 끌어안았다.
“못됐네, 생각보다.”
“내가요?”
“응. 당신이. 정말 못됐어.”
바이올렛은 아마 제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해서 이러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다시 제 품에 얼굴을 파묻은 윈터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예상대로 맥박이 펄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바이올렛이 당황해 그를 밀어내려 하자, 윈터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같이 자.”
“윈터.”
“가도 상관없는데, 당신이 도망치면 허할 테니 저 술과 약을 먹어야겠어.”
“안 돼요.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바이올렛이 절대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 팔에 감싸여 품에 폭 파묻힌 바이올렛에게 중얼거렸다.
“오늘만 내 거인 걸로 하자, 바이올렛.”
“무슨…….”
“곧 놓아준다잖아. 이제 5월이야.”
바이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밤, 어두움 속에서 들리는 윈터의 목소리가 서럽도록 애틋했다.
“봄은 좋은 계절이라, 정말 금방 끝나 버리잖아. 당신과 나의 시간도 그럴 거야.”
“…….”
“5월은 정말로 빨리 지나갈 거야.”
바이올렛은 고개를 조금 들어 봤지만 그의 품에 갇혀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봐야만 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윈터는 고집스럽게 바이올렛을 안고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봄이 짧다는 것은 슬픈 일이니까, 그래서 슬프게 들렸던 걸까.
바이올렛은 알 수 없이 울렁거리는 마음을 달래느라 잠을 설쳤고, 반대로 윈터는 금방 곤히 잠이 들었다.
*
바이올렛은 사방에서 진동하는 꽃향기에 눈을 떴다.
윈터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덕에 다행히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제 허리에 감긴 팔을 풀어내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섰지만 보이는 것은 커다란 창문 앞으로 펼쳐진 근사한 들판과 잘 닦인 길뿐이었다.
침실을 나가 보니 하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둥그런 눈으로 물었다.
“대표님 정말 잠드신 겁니까?”
“응. 아주 깊이 잘 자던걸?”
그러자 하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진짜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대표님 한번 악몽 꾸시면 일주일은 만취하고 약에 절어야 주무시거든요.”
“무슨 악몽인지 들은 적은 있어?”
“아뇨, 없습니다. 비밀이신가 봐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나이트가운을 대충 걸친 윈터가 걸어 나왔다. 그가 빈손인 하옐을 보며 물었다.
“커피도 없이 왜 왔어?”
“대표님 악몽 꾸시면 못 주무시니까 잠드셨나, 확인만 하러 온 겁니다.”
“그래서 커피는 왜 안 가져왔냐고.”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30분 후에 아내 침실로 가져와. 바로 갈 거니까.”
“예.”
맞춰 주기 힘든 윈터의 까칠함이 바이올렛은 신경 쓰였으나 정작 하옐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가 인사하고 떠나자 바이올렛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30분이나 지나서 가져오라는 거예요? 바로 간다며.”
그러자 윈터가 대답 대신 하품을 하고 바이올렛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꽃향기는 나는데 꽃이 없어서 찾고 있지?”
그를 밀어내려다가 정곡을 찔려 바이올렛이 의아하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창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어서. 어젯밤엔 어두워서 안 보였을 테니까. 여기선 공작밖에 안 보여.”
“공작이 좋아요?”
“응. 멋지잖아. 귀족 같고.”
“당신도 참 좋아하는 게 한결같네요.”
바이올렛이 웃었다.
윈터가 그녀의 방으로 가자는 듯 턱짓했고, 바이올렛은 꽃을 보러 가는 일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바이올렛의 침실에 한 걸음 먼저 도착한 윈터가 문을 두 손으로 확 밀어 양쪽으로 열었다.
그리고 따라오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한 소리 하려던 바이올렛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기가 차서 멈춰 섰다가, 몇 걸음을 옮겼다가 다시 멈춰 섰다.
발코니 너머, 아침 햇살을 머금은 정원의 황홀한 모습이 거대한 풍경화처럼 걸려 있었다. 한가운데 길이 난 정원이 있었고, 그 주변은 온갖 꽃나무와 과일나무로 숲이 우거져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 위로는 꽃잎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마차가 없으면 절대로 다 돌아볼 수 없을 규모였다.
윈터가 난간에 두 팔을 올려 내다보며 말했다.
“내가 장담하지. 여기보다 큰 저택은 많아도 여기보다 큰 정원은 두 대륙을 통틀어 없어. 심지어 어느 왕성에도 없지.”
바이올렛은 확실히, 태어나서 이런 정원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홀린 듯이 옥외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안전을 어지간히도 걱정했는지, 아주 좋은 돌로 넓게 만든 계단 위로 푹신한 카펫을 깔아 놓았다.
바이올렛이 길에 내려서자 윈터가 성취감을 느끼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이올렛이 홀린 얼굴로 정원을 걸어가다가 오밀조밀 자란 산딸기를 발견하고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한 움큼을 따서 손에 올리고 눈을 못 떼는 모습에 윈터는 이 집을 산 스스로를 매우 칭찬했다.
“일부라도 돌아보려면 든든하게 먹어야 하니 일단 돌아가지?”
“조금만 더 보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요.”
“본인이 잠옷 차림인 건 기억하는 건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제 차림새를 발견하고 놀라서 변명했다.
“치, 침실이랑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러니까 아직 침실 밖으로 나온 기분이 들지 않네요.”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밤에 못 참고 살금살금 정원 구경 나가거나 해도 못 본 척해 주지.”
“그런 일은 없어요.”
“장담할 수 있어?”
“들키지 않을 테니까.”
바이올렛의 대꾸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두 사람이 방으로 돌아와 보니 하옐이 막 커피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윈터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왜 30분 뒤에 오라고 했는지 대답이 됐지? 예상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홀려 계시더군.”
그의 놀림에도 할 말이 없어, 바이올렛의 뺨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