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2층에는 바이올렛의 방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와 어울리는 연하고 차분한 푸른색의 벽지로 채워져 있었고, 바이올렛의 취향 그대로 심플하며 고지식한 디자인의 가구들이 최소한으로 놓여 있었다.
방에는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의 가구 외에도 한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책꽂이가 있었는데, 책꽂이는 두 겹으로 되어있어 앞의 책꽂이를 옆으로 밀면 그 뒤의 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림색의 커튼 너머 중정 방향으로 발코니가 있었다. 바이올렛이 걸어 나가 보니 중정 한가운데 정원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었다.
“세상에…….”
좋아할 줄 알고 있었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떠난 후, 집은 어떤 꼴이 되든지 무관심했을지언정 정원만큼은 고용한 모든 사람들의 피를 말려 가며 가꾸게 했다.
지금은 밤이라 코앞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일 아침이면 정원의 끝까지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이올렛이 난간에 기대서서 밖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자 윈터가 물었다.
“어때.”
“뭐가요?”
“내 돈.”
윈터가 장난치듯 대꾸하며 손으로 주변을 빙 한 바퀴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그의 손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왜 호텔을 하게 된 거예요?”
“대답을 해. 질문하지 말고. 감흥을 보이란 말이야. 난 당신이 떠나기 직전에 이 집에 서서, 당신이 이걸 보고 나면.”
“내가…… 왜요?”
그녀의 질문에 윈터는, 바이올렛이 그가 지을 거라고 상상해 본 적 없는 자괴감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당신이 마음을 고쳐먹을 줄 알았어. 그래, 고쳐먹을 거라고. 애초에 당신이 틀렸다는 걸 전제로 둔 거지. 결국 당신이 내가 사들인 이 정원과 신문물들에 반해서 날 용서할 줄 알았어.”
이게 아니면 방법이 없다고, 윈터는 바이올렛이 떠나기 전날 밤, 비 오는 이 저택 포치에 서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아니면 자신은 그녀를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가 아는 유일한 해결책은 아이를 안겨 주는 것뿐이었고, 그것은 유일하게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윈터가 물었다.
“진심인가?”
“뭐가요?”
“내가 당신을 속인 걸 용서해 주기로 한 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비밀로 해 놓고, 당신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거. 용서해 준다고 했잖아.”
그의 나지막한 질문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해 주기로 했잖아요. 다만…….”
“지금 여기서 ‘다만’이 왜 나와? 말 바꾸려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아마 확실하게 믿을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을.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것부터 의심했죠. 상황은 이해해요. 하지만 만약에 내가 또 비슷한 곤경에 처하게 된다면, 나는 아마 당신을 믿지 못할 거예요. 그건 용서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윈터는 속이 쓰라렸으나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용서와 다시 신뢰하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윈터는 지금, 바이올렛이 흔들림 없이 이혼을 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돈으로 어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윈터가 정원을 등지고 난간에 기대섰다.
“이혼하고 당신이 다른 남자와 아이를 낳고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지는군.”
“그건 나도 그래요.”
“나를 금방 잊겠지.”
그의 중얼거림에 바이올렛이 웃었다.
“첫사랑은 잊히지 않는다던데요?”
“거짓말이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기억은 희미해지는 게 정상이야. 그래야 사람이 살지.”
“하지만…… 당신보다 더 많이 사랑할 남자는 있을지 몰라도 당신보다 더 많이, 나에게 애틋할 남자는 없을 거예요.”
그러자 윈터가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내가 애틋해?”
“애틋해요.”
“버려 놔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군.”
윈터가 제 턱을 쓰다듬더니 어딘지 소년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당신이 없던 1년이 보람 있게 느껴지네.”
이 잘난 얼굴에는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이렇게 표정이 조금씩 변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바이올렛을 연신 놀라게 했다.
그가 물었다.
“왕실이 복구되는 건 왜 싫어?”
“음. 왕실을 해체한 건 왕실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의미였잖아요.”
“그랬지.”
“고작 그 몇 년이 사죄가 되진 않고, 만약 왕실을 다시 복구해야 한다면 그건 라크라운드 국민들이 원하기 때문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니라면 왕실을 해체한 것조차 사람들 마음을 이용한 게 되잖아요.”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윈터가 투덜거렸다.
“역시 당신은 고지식해.”
“답답한가요?”
“아니, 왕실에 하나는 정상인이 있어서 다행이군.”
“와, 웬일로 당신이 칭찬을 다 하는군요?”
“나더러 요즘 툭하면 예쁘다고 한다더니?”
“그건 칭찬보다 감상 아닌가요?”
바이올렛이 장난치듯 말하자 윈터가 유쾌하게 웃었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팔을 당겼다.
“자, 이제 내 질문에도 대답해 주겠어요?”
“호텔을 하게 된 이유? 어이없을 텐데.”
“괜찮아요.”
윈터가 굉장히 하기 싫은 이야기인지 눈썹을 이유 없이 문지르며 누가 봐도 말하기 싫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다 바이올렛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식당에서 처음 도망쳤을 때, 잘 곳이 없잖아.”
“네.”
“그때 이미 내가 덩치가 커서 길에서 잔다고 뭐 큰일 나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 길에서 자니까 그…… 천장이 있는 곳에서 자고 싶더라고. 남부 하피트에 유명한 호텔이 있었는데, 내가 며칠을 길에서 자던 꼴로 갔는데도 지배인이 이상할 정도로 환영해 주는 거야. 손바닥만 한 식당만 들어가려 해도 더럽다고 쫓겨났는데. 그래서 그날 내가 가진 돈을 전부 써서 그 호텔의 가장 좋은 곳에서 잤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용한, 내 침실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잠들었지. 그날, 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헛간에서 언제 얻어맞을지 몰라 불안에 떨며 잠들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바이올렛의 표정에 윈터는 묘하게 흥이 나서 말을 이었다.
“내가 나와 어머니를 버렸다고 그렇게 원망하고, 내 주제에 멸시하던 아버지를 찾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날이야. 태어나서 처음 느낀 그 안정감을 잊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윈터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바이올렛이 채근하듯 물었다.
“그리고요?”
“이게 재밌어? 나한테는 슬픈 얘기야.”
“하나도 안 슬픈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말고요.”
“…….”
그래도 부부라고 몇 년을 같이 살았더니 표정도 읽는다.
윈터가 혀를 차며 뒤로 기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정을 느끼긴 했지. 처음엔 황홀했는데, 완전히 내 집은 아닌 느낌인 거야. 손님처럼. 블루밍 가문과 하피트는 별로 멀지 않으니까, 종종 거길 가서 잤어. 거기 지배인이 굉장한 사람이라 나에 대해서 줄줄 외우더군. 좋아하는 방, 이름도 모르고 예쁘다고 한 꽃, 풍경, 음식.”
윈터가 다시 이야기를 멈추자 바이올렛이 물었다.
“그 지배인과는 아직 알고 지내요?”
“응. 올해 여든인데도 정정해. 아, 당신이 신난 표정을 지으니 이 얘기도 해 줘야겠군.”
“무슨 얘기인데요?”
“내가 처음에 그런 거지꼴을 하고 갔는데도 지배인이 날 들여보낸 이유가 뭔지 알아?”
“뭐예요?”
“그 호텔에서 종종 블루밍 가문 사람을 보는데 어릴 때부터 봐 온 아버지와 내가 닮았더라는 거야.”
“세상에.”
“그래서 날 다른 손님들이 없는 곳으로 신속하게 데려가 씻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내가 입고 있던 그 걸레 같던 옷도 빨아서 돌려줬다더군. 혹시나, 알 수 없는 일이라. 귀족 가문 서자라는 게 생각보다 많잖아.”
“대단한 사람이군요.”
“유능한 사람이지.”
“아, 니사에 대한 이야기도 해 줘요. 하옐에게 언뜻 들었는데 룸 메이드에서 키론 호텔 총지배인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하옐과는 어떻게 만난 거죠?”
바이올렛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니 기분이 간질간질해서, 윈터는 괜히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런 얘기가 재미있어?”
“재미있어요. 당신 생각보다 이야기꾼이네요.”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우스웠는지 윈터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바이올렛과 영원히 불편하게 지내야만 할 줄 알았다. 공주님과 영원히 이렇게, 소파에 나란히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바이올렛은 무척이나 즐거워했고, 윈터는 즐거워하는 그녀가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특히 니사가 청소한 방마다 손님들에게 최고점을 받아 윈터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는 영웅담이라도 들은 듯이 기뻐했다.
그러다 중간에 시계를 확인한 윈터가 말했다.
“잘 시간 지났어.”
“당신은 꼭 밤만 되면 날 재우려고 하네요. 내가 취침 시간 어기면 큰일 나는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당연한 것 아냐? 사람들은 공주님의 잠자리 하면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편안한 곳에서 딱 시간 맞춰서 완벽하게 잠드는 걸 생각한다고.”
“……그래요?”
“그래.”
“일어나요, 그럼.”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당신 이제 바쁘잖아요. 비행선 사업도 시작할 거고.”
“퍽도 걱정해 주는군.”
“정말로 걱정하는데 왜 그래요?”
바이올렛이 핀잔했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문 앞까지 그를 데려다주었다.
“잘 자요.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는데 윈터가 그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슬픈 얘기라니까.”
“왜 슬픈 얘기예요? 무용담인데.”
“그럼 안 슬퍼?”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 엔딩이잖아요. 중간에 실패도 좀 하겠지만, 당신은 곧 원하는 걸 전부 가지게 될 거고, 이런 근사한 저택의 주인이 될 테니까.”
“아, 해피 엔딩. 그렇겠군.”
윈터는 손을 펼쳐서 제 손에 쥐어진 바이올렛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있다 그가 손을 놓으려는데, 바이올렛이 복도의 어두움 속에서 흐릿한 윈터의 표정이 이상해 다시 손을 잡았다.
“왜 그래요?”
그러자 윈터가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좀 더 얘기할래요?”
“그만 자.”
윈터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바이올렛은 멀어지는 윈터의 뒷모습을 그가 사라지도록 바라보았다.
*
그가 떠나고, 바이올렛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아주 부드러운 침대인데도 그랬다. 윈터의 목소리가 자꾸 귀를 맴돌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잠이 안 오네…….”
그녀가 한숨을 쉬며 결국 침대에 걸터앉았다. 책이나 한 권 읽을까, 생각해 책장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작은 전구가 있고 그 아래 커다란 태엽이 있어 힘주어 돌려 보니 깜빡깜빡거리다가 곧 불이 들어왔다.
“어머나…….”
바이올렛이 신기해하며 그 아래 책을 펼치고 몇 줄 정도 읽었을 때였다. 조용하던 저택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윈터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