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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75화 (75/176)
  • 75화

    바이올렛은 곧 샤론의 마차를 타고 카닉 호텔로 돌아갔다. 옆에 앉은 바이올렛의 팔짱을 낀 샤론이 맞은편에 앉은 아우스에게 말했다.

    “근데 아우스, 정말 시간 괜찮아? 나 카닉 호텔에 일주일 동안 있을 건데?”

    아우스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주일은 윈터가 바이올렛의 친구인 샤론에게 준 호의였다. 샤론은 혹시 바이올렛이 잔소리할까 봐 미리부터 변명했다.

    “그 큰 방에 혼자 있으면 무섭잖아. 방도 두 개인데 좀 같이 쓰면 안 돼?”

    “너도 정말…….”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아우스를 보니 여전히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무척 긴장한 표정이었다. 샤론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게 안쓰러웠지만 제가 좋아서 그러려니, 싶어 웃음이 나왔다.

    샤론의 마차는 곧 항구에서 멈췄다. 바이올렛이 샤론과 아우스에게 인사했다.

    모두에게 인사를 마친 바이올렛이 윈터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1년간 지냈던 키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대륙을 이동했다. 배를 타는 도중에는 라크라운드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기차역에 서니 확실히 실감이 났다.

    들어올 기차를 기다리고 있으니 대륙 이곳저곳의 신문을 파는 신문 장수가 돌아다녔다.

    바이올렛은 모처럼 라크라운드의 당일 신문을 한 부 사서 기차에 탔다.

    윈터와 마주 보고 앉아서 신문을 천천히 읽던 바이올렛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윈터가 눈치 빠르게 그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왜, 무슨 기사를 봤어?”

    “……당신 헤스턴 가문과 에쉬에게 별장을 내줬어요?”

    헤스턴 가문의 작위 승계 예식이 수도와 북부 중간의 카닉 호텔의 전용 별장에서 열린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러자 윈터가 신문을 들어 확인하며 말했다.

    “헤스턴 가문은 라크라운드 북부의 맹주야. 헤스턴 가문이 우리 호텔을 이용하지 않으면 북부 전체가 반기를 들겠지.”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로 시선을 돌리자 윈터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불만이 있으면 말해.”

    “에쉬는 일부러 당신의 별장을 요구했을 거예요. 당신 역시 제 왕권 복귀를 지지한다는 걸 보여 주고 싶으니까.”

    “난 그냥 사업가일 뿐이야.”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우습게 여기는 건 당신일 거예요.”

    바이올렛이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제 그냥 사업가가 아니에요. 자기 손 위에서 사교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업가지.”

    “사교계 따위가 뭐가 중요해, 내가 이방인인데.”

    “네, 당신은 이방인이죠. 그런데 당신이 사교계에서 힘을 가졌다는 건 당신이 원하는 가문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나더러 그까짓 정치 놀음 때문에 내 큰 손님을 버리기라도 하라는 건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 힘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신문을 덮었다.

    “헤스턴 변경백이 왜 나와 결혼하려고 자존심을 버렸는지 알겠네요.”

    “……무슨 소리야?”

    “이혼을 하게 되면 나는 상당한 재산을 받게 되겠죠. 헤스턴 가문 입장에서도 그 재산이 탐이 날 거고.”

    “아니, 돈 얘기 말고 결혼. 카르잔 헤스턴은 마흔일곱이야. 당신 나이 두 배가 넘는다고.”

    “그건 그렇죠.”

    바이올렛의 씁쓸한 표정에, 그녀에게 정말로 혼담이 들어온 것임을 안 윈터가 버럭 소리쳤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한 번이면 된 것 아냐? 강제 결혼을 또 시키겠다고? 당장 거절해!”

    “에쉬에게 거절하겠다는 말은 이미 했어요. 하지만 혹시나…….”

    “혹시나가 어디 있어?”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윈터는 애초에 에쉬가 왕권을 가지든 말든 제 돈만 벌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거래 조건에 바이올렛이 끼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분노를 터트렸다.

    싸늘하던 회색 눈동자에 불꽃이 일어나자 바이올렛은 이상하게도 조금,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윈터가 몸을 일으키며 기차 칸 가장 벽 쪽에 앉은 하옐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야? 가문 관련된 건 안잘리가 알아서 했어야 할 것 아냐!”

    “그, 그게…… 안잘리 부대표님이 사표 내신다고 한 이후에 대표님이 달래려고 휴가 주셨잖아요. 한 달씩이나.”

    “아, 젠장.”

    윈터가 짜증스레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취소해. 당장.”

    “예, 예? 헤스턴 가문과 어긋나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그 망할 자식이 바이올렛과 결혼하려 든다잖아!”

    “……미쳤대요?”

    “기사 가문 다 죽었군!”

    바이올렛은 제 한마디에 발칵 뒤집힌 카닉 호텔 사람들의 모습을 난처하게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남편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치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곳에 갇힌 동물처럼 제가 미쳐 갈 때와 비슷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역정을 내는 건 오랜만에 보았다.

    그녀는 고민했다. 윈터는 자신과의 이혼을 왜 그렇게도 싫어하는 것인가.

    재산 분배라고 해도 바이올렛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을 리 없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니 다른 여자를 만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시간 자체가 아까울 수도 있다.

    도대체 그가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말해 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현상 유지인가. 아니면 그가 유난히 집착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제가 들어와 있어서,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공포감을 투영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혹시나, 정말 혹시나 그것도 아니면 제가 그의 마음에 조금씩 자리를 얻고 있는 것일까.

    바이올렛은 과도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머릿속에서 자꾸만 윈터 블루밍의 마음에 대한 생각이 공회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혹여 이 과도한 생각이 사실이라고 치자.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기차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닉 호텔 키론 지점을 위해 출장을 온 직원들이었다. 윈터가 2등석 칸으로 가서 갑작스러운 회의를 시작하자 1등석 칸에는 바이올렛과 젠만이 남았다.

    “아휴, 기차에서 이게 무슨 일이래요, 작은 마님?”

    젠이 동그래진 눈으로 묻자 바이올렛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야.”

    바이올렛이 걱정을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쪽으로 복도가 있는 구성의 기차였다. 그녀가 덜컹거리는 복도를 걸어 2등석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자 지금까지 윈터가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거친 욕설이 들렸다.

    바이올렛이 깜짝 놀라 멈춰 서자 뒤에서 젠이 재빨리 귀를 막으며 말했다.

    “아휴, 놀라셨구나. 종종 저러시는데.”

    “조, 종종?”

    “아, 물론 엄청 화날 때만 저러시긴 해요. 기차라 던질 게 별로 없어서 다행이죠. 좌석을 뽑아 던지시진 않을 테니까요.”

    젠이 별것 아니라는 듯 하는 말에 바이올렛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고 바이올렛은 뒤늦게 자책했다. 윈터가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할지 몰랐던 탓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윈터의 입장에서 헤스턴 가문과 에쉬의 제안을 반대하는 건 너무 큰 손해가 될 것이 명백했다.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 하나가 살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대표님! 작은 마님 오셨습니다!”

    “뭐?”

    그 말에 윈터가 성질부리는 것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바이올렛의 충격받은 표정에 움찔한 윈터가 슬그머니 손에 든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왜?”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평소 같지 않게 두 눈을 수시로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 내, 내가 말실수를 했나 봐요. 괜찮아요. 알아서 잘 거절할게요.”

    “뭐가 말실수야. 나중에 예식 다 치르고 나서 말해줄 생각이었어, 그럼?”

    윈터가 여전히 있는 대로 구겨진 얼굴로 바이올렛을 향해 몸을 틀어 2등석을 나가며 말했다.

    “알아서들 해결해.”

    “예, 예! 대표님!”

    곧 2등석 문이 닫혔다.

    난처해진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1등석에 들어서자마자 윈터가 입을 열었다.

    “절대 안 돼. 그 망할 두 놈들은 내 별장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고, 승계 의식에는 참여 안 해.”

    “그럼 당신에게 너무 손해가 크잖아요.”

    “난 원래 기분파야.”

    윈터가 멋대로 말하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마 그가 욕설을 뱉고 물건을 던진 건 다른 직원들이 호텔에 생길 심각한 손해를 생각해 반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난 이 재혼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이건 내 싸움이에요. 그러니 내가 알아서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신문사에 성명문도 보내보고, 헤스턴 가문도 찾아가 보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죠.”

    “무슨 성명문?”

    “로렌스 가문이 왕실 의전을 반대한다는 성명문이요. 아무리 그래도 헤스턴 가문은 체면을 중시해요. 왕녀였던 내가 반대하면 헤스턴 가문에서도 무작정 우기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리고…… 내 의견에 동의해줄 사람들을 찾아봐야겠죠.”

    그녀가 달래듯 말했으나 윈터의 표정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다. 그가 의자에 눕듯이 기대 빈정거렸다.

    “기사가문이란 놈들도 별 것 없네. 자존심은 지들 조상과 같이 묻어버렸나.”

    그런 남편을 보던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그에 윈터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왜 웃어?”

    “나 때문에 화내줘서 고마운데, 당신이 그렇게 불같이 성질을 내는 건 처음 봐서 신기해요. 듣자 하니 종종 그런다면서요?”

    “…….”

    “내 앞에서는 그래도 귀족 가문 도련님처럼 굴었던 거군요?”

    그녀가 놀리자 윈터가 말문이 막혀 괜히 콧등을 씰룩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기차는 천천히 수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

    기차를 타고 수도 바로 직전 역에 내려 마차를 탔다. 라크라운드의 공기를 그리운 마음으로 누리며 수도 외곽, 커다란 철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럽게 윈터에게 말했다.

    “문 안쪽이 너무 어두워요. 이래서 저택 방향으로 잘 걸어갈 수 있을까요?”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화가 덜 풀린 상태였던 윈터는 바이올렛이 어둡다는 말을 하자마자 달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뽐낼 것을 잔뜩 가져온 소년처럼 다소 흥분해서 바이올렛을 두고 몇 걸음 물러났다.

    “거기서 문 안을 봐. 보여 줄 게 있어.”

    “뭔데요?”

    바이올렛이 궁금해하며 문 안을 보았다.

    그사이 윈터가 문 안을 향해 소리쳤다.

    “불을 켜!”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굴러가는 듯한 드르륵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바이올렛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깜빡깜빡거리며 아주 밝은 전구들에 불이 들어왔다. 거대한 저택 모든 공간에서 빈틈없이 전구의 환한, 촛불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 대저택의 위용을 드러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바이올렛의 감동한 눈에 만족한 윈터가 우쭐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걸 1년 만에 보여 주게 될 줄은 몰랐군. 하지만 덕분에 더욱 완벽해졌지. 요르젠 207 필라멘트 전구. 이 선명하고 깔끔한 빛을 봐.”

    “굉장하네요. 와…….”

    웬만한 것은 다 갖추고 살아온 바이올렛을 감동시키는 것은 대부분 이런 선진 문물이었다. 그녀가 눈을 떼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자 윈터가 따라 걸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게군.”

    “이런 건 처음 봐요……. 내가 마지막으로 본 전구는 불이 깜빡깜빡거리고 아주 희미하고 그리고…….”

    “아주 비쌌지. 아, 물론 지금도 비싼 데다 여덟 시간을 켜면 새 전구로 갈아야 하지. 금을 갈아서 없애고 있다고 보면 되는 정도인가.”

    그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다.

    “그럼 이제 충분히 놀랐으니까 필요한 곳만 켤까요?”

    “집 구경은 해야지. 보여 줄 것이 아주 많아.”

    보여 줄 것이 많다는 말에 걸맞게, 바이올렛은 저택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앞의 말끔한 정원과 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포치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룰루가 환하게 인사했다.

    “오셨어요, 작은 마님?”

    “아, 근사하네, 룰루.”

    수도의 저택 집사로 승진한 룰루의 표정이 매우 밝았다.

    그녀가 문을 열어 주자 화려하게 빛나는 공간이 나타났다. 호텔의 로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벽지 하나하나 수입 실크였고, 조각상에도 수도 없이 많은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바이올렛이 매끈한 나무 계단의 난간을 손으로 만져 보며 감탄했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당신 방을 보여 주지.”

    윈터가 그녀를 데리고 계단을 마저 오르며 손을 등 뒤로 돌려 뒤에 서 있는 룰루에게 엄지를 올려 보였다. 단기간에 이 방치되어 있던 저택을 완벽하게 수리해 낸 능력에 보내는 찬사였다.

    룰루가 봤다는 의미로 헛기침을 해 보였다. 윈터는 성과급으로 룰루에게 신혼여행이나 한 번 더 보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이올렛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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