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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74화 (74/176)

74화

배를 타기 전까지 바이올렛은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리지야의 초대를 받아 1년간 일을 하던 예핌추크 가문의 정원에서 소소한 송별 파티를 했다.

바이올렛이 선물로 만들어 온 붓꽃 꽃다발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지야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엘자 양이 파티에 안 오더라고요. 다들 얼마나 편안해하는지 몰라요.”

“남편이…… 에이든 가문을 찾아갔단 말이에요?”

“네! 어머니도 거기 계셨는데, 진짜 무섭게 협박하고 가더래요.”

소문에는 살이 붙어서 마치 윈터가 엘자에게 영원히 사교계에 발도 못 들이게 하리라 협박이라도 한 것처럼 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리지야의 이야기를 들었다.

윈터의 그 참을성 없는 성격이 바이올렛을 연신 걱정시켰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리지야가 웃었다.

“염려 마세요. 어차피 두 분 떠나면 엘자 양도 금방 다시 큰소리칠 테니까.”

“그건 또 그거대로 걱정이군요.”

바이올렛이 그리 말하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잠시 1년 동안 제 생활을 책임진 예핌추크가의 정원을 바라본 바이올렛이 말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저에게 일거리를 준 덕에 즐겁게 지냈어요. 예핌추크 가문이 아니었다면 얼마 못 가 이곳을 떠났겠죠.”

“그것도 제가 하도 말썽이라 어머니가 바이올렛을 보고 배우라고 고용한 거죠.”

“그러니까요. 그게 얼마나 큰 호의예요.”

바이올렛이 이야기하다가 창가에서 그녀 쪽을 보고 있는 리지야의 오빠 조르디를 발견했다. 그녀가 인사하자 1년 내내 그녀에게 구애해 온 조르디가 훌쩍거리며 휙 돌아서 버렸다. 리지야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게, 결혼한 사람한테 왜 얼쩡거리고 난리야.”

“나중에 인사 전해 줘요.”

“그럴게요.”

“이제 일어나 봐야겠어요.”

바이올렛이 일어나자 리지야가 꾹꾹 참던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앞으로 휴가는 여기서 보내요. 네?”

“노력해 볼게요. 수도 놀러 와요. 언제든지.”

바이올렛이 인사하고 예핌추크 가문을 나섰다.

*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바이올렛을 붙잡고 눈물을 그렁거리며 물었다.

“바이올렛, 정말로 라크라운드로 돌아가요?”

“여기서 더 지내지, 왜 돌아가요!”

사람들이 울먹거리는 걸 보니 바이올렛의 마음이 아파 왔다.

소중한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따듯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로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앞으로 다시는 이사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종 놀러 올 테니 너무 울지 마요.”

바이올렛이 몇 번이고 사람들을 달래고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제 집과도 이제 이별이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울적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 윈터가 먼저 와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집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 가구들까지 챙겼어요? 그걸 어떻게 가져가요?”

“무슨 소리야.”

윈터가 인상을 쓰고 투덜거렸다.

“집도 가져갈 거야.”

“……집을 가져가다니요?”

바이올렛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윈터가 뻔뻔스레 대꾸했다.

“정원에 가져다 놔야지. 이 집이 잠이 잘 오니까.”

그의 말에 기겁한 바이올렛이 집을 대륙을 건너 이동시키는 데 들어갈 막대한 예산을 생각하며 윈터의 팔을 붙잡았다.

“그대로 둬요. 정 그래 줄 거면 가서 똑같은 집을 만들면 되잖아요. 집을 어떻게 대륙을 이동해서 옮겨요?”

“어차피 내 배에 실어서 가는 거야. 집도 엄청 작잖아.”

“거기 도착하면 또 기차로 운반해야 할 것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해.”

윈터가 고집을 부렸다.

결국 윈터에게 쫓겨난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서는데, 눈물범벅이 된 리나가 달려왔다.

“바이올렛, 이사 가?”

“응? 으응…….”

바이올렛이 난처해하는데 리나가 그녀의 손을 고사리손으로 꼭 쥐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지 말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울었니?”

리나는 말없이 바이올렛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렇게 매달려 통곡을 하자 못 견디고 윈터가 집에서 나왔다. 그가 아내에게 달라붙은 옆집 꼬마에게 핀잔했다.

“방해되니 저리 가라.”

그러자 리나가 바이올렛을 놓고 달려가 윈터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윈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원래 이렇게 폭력적이야?”

“아뇨. 당신에게만요.”

“그거 열 받네.”

윈터가 말하고 아이를 내려다보자 리나가 무서웠는지 화들짝 놀라 바이올렛 뒤에 숨어 소리쳤다.

“바이올렛 데려가지 마!”

“바이올렛은 내 아내야. 나와 살아야지.”

“아니야! 나랑 살 거야!”

“이 녀석 강단은 있군.”

윈터가 실소하더니 제가 끼고 있던 반지 하나를 빼서 바이올렛의 손가락에 끼우며 물었다.

“너 이런 거 사 줄 수 있어?”

윈터가 유치하게 나오자 리나가 움찔했다.

“못 사 주는데…….”

“거봐, 그러니까 내가 데려가지.”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며 제 손가락에서 헛돌고 있는 반지를 빼서 윈터에게 돌려주었다.

“왜 이렇게 유치해요?”

“현실적인 거라고 해줘.”

그때 리나가 다시 바이올렛의 손을 꼭 잡았다.

“바이올렛, 어디로 가?”

“응,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고향이 뭔데?”

“태어나고 자란 곳. 아,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면 거기가 고향이야.”

“그래? 그럼 난 라크라운드!”

“리나도 거기서 태어났지?”

“응! 그리고 거기 친구들도 있고, 눈도 내리고…….”

“여기처럼 바다가 있지?”

“바이올렛도 가 봤어?”

“나도 그곳이 고향이야.”

“정말? 아, 근데 라크라운드에도 공주님이 있어. 바이올렛도 공주님이지? 아, 그럼 바이올렛이 라크라운드 공주님인가?”

리나의 말에 옆에서 윈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 녀석 통찰력 있네. 천재 아냐? 역시 미리 고용 계약서를 써야겠어.”

“무서운 아저씨 어려운 말 하지 마.”

윈터가 쏟아붓는 말들이 어려웠는지 리나가 핀잔했다. 그러다 다시 훌쩍거리더니 쪼그려 앉아 울기 시작했다.

“라크라운드 엄청 먼데…… 배도 엄청 많이 타야 되는데…… 바이올렛,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만나?”

리나가 또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바이올렛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 앞에 앉아 두 팔로 꼭 리나를 끌어안았다. 그때 옆에서 윈터가 말했다.

“꼬마도 와, 라크라운드로.”

“가?”

“어. 라크라운드로 오고 싶으면 와.”

“그래도 돼?”

리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윈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와도 돼. 가서 부모님한테 물어봐.”

“진짜? 물어볼까?”

리나가 잠깐 고민하더니 주춤주춤하며 쪼르르 핌에게로 달려갔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왜, 지난번에 얘기했잖아. 옆집 스파이한테 같이 가자 하라고. 당신이 말 안 할 것 뻔해서 내가 먼저 비행선 사업장 전신실로 들어가겠냐고 찔러봤지.”

“그랬어요?”

“응. 안 그래도 저 꼬마 내년에 학교 문제로 고민이 많더군. 똑똑한 꼬마라 세심한 교육이 필요한데, 카닉사는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하더군.”

“아…….”

“이혼하면 당신 친구들이 근처에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도스 공국 공녀님이 그 먼 수도에 매일 들락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건 그래요.”

바이올렛이 안심한 표정을 짓자 윈터가 놀리듯이 말했다.

“이것 봐. 돈 무시했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아.”

“무시한 적은 없어요.”

“무시했잖아. 내가 사 준 걸 다 팔아 버리고 돌려주는 게 무시지, 그럼 뭐야.”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걸로 돌려준 것뿐이에요. 괜찮…… 지 않았어요?”

바이올렛이 조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전부터 왜 그렇게 싫은 반응이에요?”

그러자 윈터가 오히려 놀랍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럼 여태 내가 그걸 정말로 좋아할 줄 알았어? 선물 준 걸 돌려받았는데 기분 좋아할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꽤 큰돈이었어요. 땅도 돌려받았잖아요. 난 최대한 당신을 생각한 거예요.”

“날 생각했다고?”

윈터가 되묻더니 기가 찬다는 듯 실소했다.

“어떻게 그게 날 생각하는 게 돼? 그까짓 돈 몇 푼 돌려주는 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지금까지 언제나 돈을 우선한 건 당신이에요. 내가 달리 당신에게 뭘 줄 수 있었겠어요?”

“돈이 좋지. 난 그걸 좋아해. 그건 당신 말이 맞아. 그런데 내가 돈을 왜 좋아하는지 알아?”

바이올렛이 멈칫하자 윈터가 말을 이었다.

“돈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뤄 줘서 그래. 내가 맞기 싫으면 맞지 않게 하고, 배고프면 먹이고, 가족이 필요하면 가족을 만들어 줬거든.”

“…….”

“내가 당신한테 돈을 쓴 건 당신이 내 옆에 있어야 되기 때문이야. 내가 원하는 게 이뤄지지 않으면 그 돈은 나에게 가치가 없어.”

윈터의 눈동자가 서러운 분노로 아슬아슬하게 일렁거렸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완벽하다고 믿으며 쌓아 올린 금자탑이 사실은 균열투성이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3년 동안 그럭저럭 버텨 왔다고 생각하던 아내가 제 곁을 떠났을 때부터. 그녀가 사실은 제가 손써 볼 도리도 없는 순간 죽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에게 모든 것을 연결시켜 주던 돈의 가치가 바닥으로 처박히고 나니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망한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바이올렛의 곁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것은 승패가 정해진 전쟁이었다.

그녀는 결국 제 곁을 떠날 테니, 후자는 지속되지 않는 세력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이사와 내년부터 학교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리나가 뛸 듯이 기뻐하며 달려와 중단되었다.

*

이사가 마무리되는 동안 바이올렛은 호텔에서 지냈다. 윈터가 가구를 전부 치워버렸으므로 선택지가 없었다.

멋대로 가구를 옮긴 것이 미안했는지 윈터는 샤론에게도 계속 방을 내주었다. 덕분에 바이올렛은 친구와 행복하게 키론 생활을 마무리했다.

윈터의 배가 대륙을 출발하는 날, 배를 타기 전에 보여 줄 게 있다는 샤론을 따라서 제 집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어리석은 남자야. 정말로, 정말로.”

바이올렛이 최대치의 욕을 하자 옆에서 샤론이 호탕하게 웃었다.

“너에게 그 정도 욕을 먹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네. 그게 네 남편이라니.”

“하지만 그렇잖아.”

“그건 그래. 나도 저런 건 처음 본다, 진짜.”

집터가 비었다.

집을 옮기겠다는 윈터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바이올렛이 좋아하는 그 집의 자재들을 전부 해체해 배에 실었다.

편지 한 장만 보내려 해도 10라크네였다. 이 정도 짐이면 수도의 웬만한 집 한 채 값은 줘야 할 것이었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남편은 사치가 너무 심해.”

“윈터 블루밍 경 정도면 좀 사치해도 괜찮지.”

“이런 불필요한 곳에 돈을 쓰잖아. 이러다 파산하겠어.”

바이올렛의 말에 샤론이 힐끔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바이올렛은 유난히 수학에 약했지.”

“무슨 의미야?”

“윈터 경께 집 한 채 값은 재산에 흠집도 안 남을 돈이란 의미지.”

샤론이 핀잔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배편으로 대륙을 이동해 집을 옮기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데는 두 사람 다 이견이 없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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