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잽싸게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은 정문이 아닌, 직원들이 드나드는 옆문으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가, 궁금증을 못 참고 호텔을 나와 크게 한 바퀴를 돌아 옆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러 개의 방이 나왔다. 직원 숙소며 시설, 고객 관리 등의 일을 처리하는 여러 사무 공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하얗고 깨끗한 대리석으로 된 공간의 아기자기한 문들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손님들의 여유 있는 휴가가 완벽하도록, 이곳에서 모든 실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홀린 듯이 구경을 하는데 직원 하나가 막아섰다.
“손님, 이쪽으로 들어가도 객실이 나오지 않습니다. 정문으로 다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누가 봐도 손님의 차림새였던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나는 윈터 블루밍 경의 아내인…….”
“이, 인마! 너 지금 감히 누굴 막아선 거야!”
그때 뒤에서 다른 직원이 바이올렛을 막아선 직원의 등을 때리며 말했다. 그제야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인사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무슨! 실례는 내가 했소.”
“아, 안내해 드릴까요?”
“안 그래도 나가려던 참이었소.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하오.”
바이올렛이 저를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고 안쪽을 시선으로 한번 훑으며 돌아서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휴가 온 손님들에게 쏟아지는 편지와 전보들이 들락거리는 우편 취급실이 있었는데,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쪽으로 핌이 보였다.
바이올렛이 걸어가서 문을 열어젖히자 옛 동료들과 깔깔거리며 이야기하던 핌이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바이올렛과 눈이 마주친 핌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바이올렛의 굳은 표정에 핌이 얼어 있다가 얼른 둘러댔다.
“여, 여기서 직원을 뽑는다지 않겠어요? 그래서 일자리를 구해 보려고!”
“……서로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이는데.”
“아뇨! 몰라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핌은 이미 망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우기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혔는지 바이올렛이 아무 말이 없으니 점점 더 불안해진 핌이 2차 핑계를 늘어놓았다.
“하옐 씨가 일손 모자란다고 해서 몇 번 도와주느라 알게 됐어요. 그게 다예요.”
“왜 그렇게 급하게 핑계를 댈까…….”
바이올렛의 혼잣말에 핌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렛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핌이 이렇게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운 상황일 것이었다.
바이올렛이 그대로 돌아서 나가자 핌이 서둘러 그녀를 따라나섰다.
건물을 나가도록 말이 없던 바이올렛이 갑작스레 멈춰 섰다. 그리고 핌을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언제부터 남편 사람이었소?”
“어휴, 또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굳이 따지자면 난 바이올렛 사람이지.”
핌은 다시 변명을 하려 했지만 바이올렛의 실망한 눈동자를 보니 더는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라크라운드 수도 카닉 호텔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러던 중에 고향의 부모님이 몸이 안 좋아지셨다고 해서 간호하려고 다 같이 돌아왔거든요. 남편은 그래도 뱃일을 구했는데 전 못 구해 가지고 우리 리나를 어떻게 키우나, 하고 있었는데 하옐 씨가 연락을 주더라고요. 바이올렛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여기 잘 적응할 수 있게 신경 써 주는 일로 고용해 준다고.”
“…….”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내가 이 일을 맡지 않았으면 바이올렛은 불안에 떨며 지냈어야 할 테니까.”
“무슨 의미요?”
“바이올렛이 여기 오자마자 이장을 쫓겨나게 했잖아요. 그 망할 놈이 사람들 끌고 바이올렛 집에 오려 한 적이 있다고요. 보복하려고.”
“……그랬소?”
“그때 내가 사람들 몇 고용해서 그 망할 이장 흠씬 패서 내쫓았죠. 그것만 있는 줄 알아요? 바이올렛은 틀린 걸 보면 곧바로 말해 버리잖아요. 그동안 나도 꽤 속 썩었어요.”
바이올렛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객실의 손님들이 여기 직원들의 도움으로 편안한 휴가를 보낼 수 있었듯이, 자신도 핌의 도움으로 휴가 같은 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핌이 하소연을 이어 갔다.
“처음에 바이올렛은 생활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잖아요. 지금이라고 딱히 있는 건 아니지만.”
핌이 놀리듯이 말하고는 바이올렛의 민망해하는 표정을 귀여워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손이 보통 많이 가는 게 아니었어요.”
“그럼 마을 사람들이 다…….”
“아니지, 그건 아니에요. 연락을 받은 건 나뿐이에요. 다들 호의로 도와준 거예요. 나도 솔직히, 바이올렛처럼 손 많이 가는 사람에게 옆에서 사사건건 참견할 필요까진 없었어요. 그냥 바이올렛이 좋아서 도와준 거예요. 물론 돈도 좋아서 받았지만.”
바이올렛은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지금까지 핌이 그녀를 돌봐 준 것은 돈에서만 우러난 것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집안일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려 주었고, 그녀가 부실하게 먹는 듯하면 잔소리를 하며 식사에 초대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일은 돈을 받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이올렛이 호텔 쪽을 보았다. 그 시선의 뜻을 알았는지 핌이 말했다.
“처음부터 바이올렛이 여기 있는 거, 대표님은 당연히 알았어요. 종종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도 보냈고. 항상 궁금한 게 얼마나 많던지.”
“그랬소?”
“밥은 뭘 먹었는지, 어디서 일하는지, 잘 웃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궁금한 게 수도 없이 많더라고요.”
어쩌면 윈터는 바이올렛의 생각보다 힘든 1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늘 별일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고 툴툴거리지만.
그는 시계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바이올렛이 죽을까 봐 겁에 질렸었다. 자신은 이미 남편에게 받은 상처 이상으로, 그에게 상처를 돌려주었을지 모른다.
그때, 성벽 쪽으로 급하게 달려온 윈터가 바이올렛을 발견했다.
핌이 멈칫하더니 외쳤다.
“어맛! 들키면 안 되는데!”
“내가 따라가서 알게 된 거니 염려 마요. 잘 말해 둘 테니.”
“그, 그럼 다시 들어갈게요! 바이올렛의 남편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영 심장 떨려서…….”
핌이 재빠르게 말하더니 다시 쏙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 바이올렛은 천천히 성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윈터가 달려와 그녀의 양팔을 감싸 쥐었다.
“왜 여기 있어? 한참 찾았잖아.”
“비행선 사업을 산다면서요?”
“말 돌리지 마.”
“당신 일 스파이를 걱정했는데 나한테 붙은 스파이부터 살폈어야 하는 거였더군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주시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랬어요?”
“미안해.”
“사과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에요.”
“왜 그랬냐는 게 답이 필요한 질문이라면…… 나에게는 그것밖에 선택할 게 없었어. 당신이 있는 곳을 안다고 내가 억지로 끌고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그냥 당신이 거기 있고, 나는 당신의 안전을 책임지는 수밖에.”
“…….”
“다시 도망가지 마. 제발.”
날이 더운데, 윈터의 손이 차가웠다.
바이올렛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나 혼자서도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네요.”
“아니야. 당신은 잘 지냈어. 나는 그냥…… 내 불안감 때문에 필요했던 것뿐이야.”
윈터는 초조한 얼굴이었다.
바이올렛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다소 멍한 상태였다.
화를 내야 할지,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던 건지. 저를 속였다는 건 화가 나고, 염려해 준 건 고맙고.
아직 그에게 어떤 감정을 드러내야 할지 바이올렛은 떠올리지 못했고, 그러므로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불안해하는 윈터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화난 건 아니에요.”
“……그래?”
“네. 그리고 당신 말이 맞아요. 어서 라크라운드로 돌아가야겠어요.”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 윈터가 두 팔로 바이올렛을 꽉 끌어안았다.
“좋은 생각이군. 분명히 좋아할 거야. 새 집.”
“새 집이요?”
“분가를 하려고 수도에 사놓은 집.”
그녀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아서인지 윈터는 안도감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 라크라운드 수도의 집은 엉망이라 정리하는데 좀 걸릴 거야. 도착하면 4월 말일 테니 정원이 아주 아름다울 거야.”
“그렇다고 내가 당신 집에서 지내는 건 조금…….”
“왜 내 집이지? 우린 아직 부부야. 집 정도는 공유해야지.”
“그럼…… 고마워요. 잠시 당신 집에 머물며 내가 살 집도 찾아볼게요.”
“마음에 들면 위자료로 달라고 해. 난 그다지 그 집이 마음에 들진 않거든.”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을 꼭 쥐고 말을 이었다.
“외로울 것 같으면 옆집 스파이에게 같이 라크라운드로 가자고 해. 그 정도 경력이라면 전신 일로 어떻게든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 그 꼬맹이 교육을 생각하면 당연히 찬성할 거야.”
“하긴, 여긴 학교가 마차를 타고 세 시간쯤 가야 있다더군요.”
“수도로 가자. 이제 슬슬 재산 분배를 시작해야지. 거기만 매달려도 한 달은 걸릴 거야.”
“하긴, 당신 재산이 워낙 많으니까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훨씬 더 화를 낼 줄 알았어.”
“화는 나요. 하지만 고맙기도 하니까. 두 가지가 뒤섞여서 지금은 그냥…… 복잡하네요.”
“그렇군. 이해해. 그래도 도망가지 마.”
“안 가요. 나도 이제 힘들어요. 어차피 하루 만에 들키는 것 같고.”
바이올렛이 달래 봐도 윈터는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바이올렛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은 것과 달리,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면 당신에게 많은 재산이 생길 거야. 평생 무슨 짓을 해도 흔적도 남지 않을 재산을 가지게 될 거야.”
“그렇게 많은 재산은 필요 없어요.”
“그건 가져 봐야 알지.”
윈터는 조금 후련한 얼굴을 하며, 바이올렛과 함께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
오후 늦은 시간 라크라운드 수도 외곽의 대저택 앞에 룰루와 투린 부부가 내려섰다.
라크라운드 수도는 이제 막 봄이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온 세상이 싱그러움으로 가득했음에도 저택은 마치 버려진 것처럼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룰루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이게 웬일이야…… 우리 작은 마님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
“그러게 말이오.”
투린이 고개를 끄덕끄덕거리자 룰루가 투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신은 주방 군기부터 잡아, 빨리. 나는 요 꾀쟁이들을 잡아 볼 테니까.”
“우리 여보 밑에서 일하게 되다니, 다들 죽었소!”
“그럼, 그럼. 내가 가만두나 봐, 아주.”
투린이 짐을 챙겨 들고 룰루를 쫄래쫄래 따라서 저택 포치에 섰다.
문을 두드리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집사가 그녀를 발견하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 급하게 오느라고 기별을 못 보냈어요.”
룰루가 윈터가 준 서신을 내밀자 집사가 서신을 뜯어 확인하고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그가 버럭 소리쳤다.
“이,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갑자기 해고를 하다니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할까 봐.”
룰루가 손을 내밀자 투린이 챙겨 두었던 서류를 찾아 얼른 넘겨주었다.
“여기 사용인들 급여를 떼먹었다는 증거들이 있어요.”
“뭐, 뭐요?”
“빨리 가서 소송 대비해요. 안 봐줄 거예요, 대표님이.”
“그, 그럴 수가…….”
집사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룰루는 혀를 차더니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이 소란에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용인들이 달려 나왔다. 집 안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엉망진창인 데다 관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으니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 태반이 비어 있었다. 전부 도둑맞은 것들이었다.
룰루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할 일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닐 듯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