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비행선을 좋아한다는 질문 때문인지 바이올렛이 물었다.
“무인 비행선이 성공하던 해 우리가 몇 살이었죠?”
“난 열네 살이었지. 당신은 여덟 살이었겠군.”
“그때 기억이 나네요.”
“신문으로 봤어? 무인 비행선 시연장에는 안 왔잖아?”
“갔었어요.”
“공주님이 왔으면 내가 기억하지. 의전이 전혀 없었잖아.”
“오빠들이 몰래 간다고 해서 저도 따라갔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아, 그랬군. 그날 엄청 추웠지.”
“정말 너무 추웠어요. 스산한 추위였어요.”
바이올렛이 기억을 떠올렸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들판 한가운데에서 출발하는 무인 비행선을 보았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비행선이 위로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록 비행선이 날아오른 것은 38초뿐이었지만, 그 38초는 바이올렛의 인생에서 손꼽히게 황홀한 순간이었다.
“빨간색이었죠.”
“989호라는 숫자는 은색이었지.”
“980호부터 전부 성공했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에게 공개한 건 989호였지만.”
“나도 그렇게 들었어.”
두 사람은 추억에 푹 빠져 서로가 다리를 겹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윈터는 무심코 구두를 신고 고생했을 바이올렛의 다리를 마사지했다. 바이올렛은 조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오늘은 가급적 윈터가 하는 일을 막지 않기로 했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찢어 간 건 무슨 내용이었어요?”
“유인 비행선 실험 중이라는 내용.”
“그래요?”
“언젠가는 배가 아니라 비행선으로 대륙을 오가게 될지도 몰라. 그때가 되면 더 이상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은 기차가 아니게 될걸?”
“와.”
바이올렛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그게 신기해서, 윈터가 웃으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아뇨. 당신이 돈 말고 그렇게 관심 있는 게 있다는 게 좋네요.”
“무슨 소리야. 나 좋아하는 거 많아. 스포츠도 좋아하고.”
“하지만 이건 왠지…… 당신 같지 않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냥요. 좀…… 귀엽다고 해야 하나.”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멈칫했다.
“……그래?”
“그래요.”
일단 비행선 사업 전체를 사기로 했다. 지금이야 돈 파쇄기나 다름없지만 어쨌든 바이올렛이 보기에 귀여울 수 있고, 심지어는 마음만 먹으면 유인 비행선에 타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윈터는 비행선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
바이올렛은 그리 오래 잠들어 있을 수 없었다.
에쉬와 브런치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행사는 이 파티에 참여한 모두에게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쉬와 이야기할 것이 많았다.
바이올렛이 침실을 나서자 하옐과 이야기하던 젠이 얼른 다가왔다.
“작은 마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두 사람은 무슨 얘기 중이었니?”
요즘 들어 젠과 하옐이 붙어 있을 때가 부쩍 많아졌다. 젠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얼른 가요, 하옐 씨.”
젠이 눈치를 줬지만 하옐은 가지 않고 뒷짐을 지고 서서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대표님이 비행선에 투자하신답니다, 작은 마님. 대표님이 알거지가 될 수도 있으니 이혼하실 거면 빨리 재산 챙기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비행선 사업에 투자를 한다니?”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하옐이 퉁명스레 말했다.
“어제 밤새 고심해 보니 비행선이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더라면서요. 바로 그 망할 비행선 기술을 사들이러 이글린을 보냈습니다. 협상 전문가거든요.”
“기술이 그렇게 비싼가?”
“아뇨, 솔직히 지금 비행선 연구원들은 죄다 후손의 후손까지 빚을 물려줘도 못 갚을 적자들을 보고 있어서 빚 갚아 주고 생활비 정도 대 주면 기술 전부 넘길 겁니다. 그까짓 건 우리 직원들 라크라운드에서 여기 오는 데 든 돈 정도 될 겁니다. 얼마 안 된다는 뜻이죠.”
“그럼?”
“앞으로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이걸 상업용으로 발전시키는 데까지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는 게 문제입니다. 비행선이 개발이 안 되는 것도 다 그 돈 때문이고요. 돈을 들여도 비행선이 성공할 확률은 극히 희박한데요. 대표님이 그 천문학적인 돈, 달랑 하룻밤 고민하고 투자를 결정하셨다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미친…… 정신이 이상하신 거죠.”
인생 끝난 것처럼 말하는 것과 달리 하엘의 표정은 술 진탕 먹고 숙취 때문에 일 못 한다고 드러눕는 윈터를 볼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 표정에 바이올렛이 넌지시 물었다.
“하옐은 거기 큰 불만이 없는 것 같아 보이네만.”
“솔직히 호텔 사업 아주 조금 질렸습니다. 있는 거 유지만 하면 된다는 게 의욕 떨어진다고 할까요.”
바이올렛이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짓자 하옐도 같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대표님이 회사 처음 세우실 때 저랑 맨날 싸우셨거든요. 미치셨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오랜만에 그런 기분이라 좀 들뜨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같이 미친 게죠.”
이 이야기를 유난히 즐겁게 듣던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네. 난 들어가서 준비할 테니 하던 일 마저 하게.”
“아, 드레스 가져올게요, 작은 마님.”
“오전용 드레스는 리본 하나 없으니 혼자 입으면 돼. 내가 준비할게, 젠.”
바이올렛이 가볍게 말하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침실에 돌아 들어갔다.
그 모습에 젠이 인상을 쓰며 하옐에게 말했다.
“이상한 오해를 하시는 것 같죠?”
“확실히 그러네요.”
하옐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젠이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작은 마님 즐거워하시니까 환상 깰 생각 하지 마요.”
“그럴 생각 없는데요.”
두 사람은 바이올렛이 즐겁도록 오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다시 하던 일을 시작했다. 하옐이 서류를 넘기며 취조하듯 말했다.
“수학 성적이 엉망진창입니다. 이래서는 재산 관리가 불가능해요.”
“안 배웠는데 어떡해요, 그럼?”
“어떡하긴. 처음부터 공부를 해야죠.”
“지금 사격 훈련만으로도 죽겠거든요?”
“어쩔 수 없잖아요. 작은 마님의 비서 일을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래도 사격 점수는 매우 뛰어나니 다행이네요. 사람을 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겠지만.”
“으, 그럴 일 없으면 좋겠는데.”
“당연히 없어야죠.”
하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머리가 좋은 하옐과 신체 조건이 좋은 젠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성격도 안 맞고, 아무튼 그냥 여러모로 그리 서로가 내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바이올렛의 아이 같은 얼굴에 영원히 그럴 일 없다는 걸 밝히지 못하고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척해 주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
그때, 침실 안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젠이 눈이 둥그레져서 하옐에게 물었다.
“작은 마님 지금 방 안에서 밖으로 노크하신 거예요?”
“……처음 봤는데. 로렌스 가문 예법인가요?”
“아니, 나도 처음 봤는데요…….”
두 사람이 의아해하는데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 하옐이 서둘러 말했다.
“예, 작은 마님!”
그러자 바이올렛이 문을 열고 말했다.
“비행선 기술은 군수 사업을 하는 레위, 플릿 가문에서 관심이 있을 테니 스파이를 조심하는 게 좋네.”
“아, 아! 그렇군요! 예, 염두에 두겠습니다.”
하옐이 대답하자 바이올렛은 다시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침실로 들어갔다.
*
바이올렛은 혼자서 말끔히 단장을 하고 젠에게 확인을 받은 후 2층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가 앉은 뒤로 한참이 지나서야 에쉬가 나타났다.
그가 바이올렛의 맞은편에 앉았다. 에쉬의 뒤에는 그가 데려온 호위 두 명이 서 있었는데, 둘 다 명문가의 차남들이었다.
에쉬가 입을 열었다.
“헤스턴가에 대해서 말하려는 건가?”
“이게 무슨 짓이야?”
바이올렛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자 에쉬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하자는 거 아니야. 헤스턴가에서 원하는 거지.”
“헤스턴 가문은 올곧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별수 없잖아. 시대가 올곧은 사람들을 떨궈 내고 자본 위주로만 굴러가는데. 네 남편 같은 쓰레기들이 떵떵거리는 세상이지.”
에쉬가 비웃음 섞인 투로 말했다. 바이올렛이 힘주어 대답했다.
“혹시나 결혼을 거래 수단으로 쓰려는 거라면.”
“그런 거면?”
“거절하겠어.”
에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바이올렛이 이렇게 단호하게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에쉬의 입장이 곤란해졌는지, 그가 모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녀였던 네가 이혼하면 온 나라에서 너를 헐뜯으려 들 거야. 그 전에 혼처를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게다가 네가 존경하던 헤스턴 가문이잖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헤스턴 가문과 혼담이 오간 것이 분명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바이올렛은 강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존경하는 헤스턴은 자기 손으로 왕실을 해산한 자에게서 왕의 권위를 찾지 않아. 특히 자존심을 굽혀 대가를 받지도 않지.”
“바로 거절하지 말고 좀 더 생각해 봐. 재혼을 헤스턴 가문과 하게 되다니, 행운이고 영광이야.”
“내 행운과 영광은 내가 판단해.”
에쉬가 혀를 차며 표정을 구겼다.
제 여동생에게 융통성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고려도 안 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블루밍 가문에 고립되어 있을 때처럼 이 결혼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거절하겠다고 말하는 바이올렛을 보니 생각처럼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헤스턴 변경백의 손에 바이올렛을 넘겨줘야 끝나는 문제였다. 바이올렛이 거절했음을 알면 헤스턴 가문에서도 이 예식을 취소할 것이다.
에쉬는 이렇게 처박혀서 인생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시 권력을 쥐고 싶었다.
가장 이용하기 쉬운 것이 바이올렛이었다. 저와 같은 좋은 혈통이었고, 제 동생이지만 어느 남자든 마다하기 힘들 외모란 걸 알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렛이 제가 필요할 때 언제든 희생할 수 있는 존재로 알고 자랐다. 부모님도, 조부모님도 그를 그렇게 키웠다.
그가 뜸을 들이는 사이 바이올렛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여러 개의 작은 과일을 넣고 굳힌 투명한 젤리를 스푼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과일의 산뜻함으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에쉬가 물었다.
“그럼 재혼은 어쩔 건데.”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결혼으로 힘을 얻고 싶으면 본인이 결혼을 하면 되잖아.”
그녀의 말에는 에쉬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대화가 중단되었다.
바이올렛은 에쉬의 연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왕실이 해체되었으니 오히려 더더욱 많은 혼담이 들어올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왕족의 직계 혈통을 사위로 맞을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의문을 가지며 브런치가 끝이 났다.
에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다시 생각해 봐. 로렌스 가문을 위한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바이올렛의 단호한 대답에 에쉬가 인상을 쓰고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에쉬, 내 남편은 윈터 블루밍 경이야. 그 남자가 날 미치도록 미워하는 상태로 3년을 살았어.”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도, 글쎄. 남편과 비교하면 위협적으로 느껴지질 않네.”
그 말을 끝으로 바이올렛은 그대로 돌아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녀를 지키고 있던 플립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웃지 않도록 입술을 물었다.
바이올렛이 승강기를 타기 위해 1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 막 승강기에서 내리는 샤론, 아우스와 마주쳤다. 바이올렛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식사하려고?”
“우린 객실에서 먹고 나왔어.”
샤론의 말에 아우스가 뒤에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샤론이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근처는 워낙 자주 와서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윈터 경께서 이걸 주셔서 써 보려고. 후원 입장이 가능하다고 해서.”
샤론이 블랙 카드를 들어 보이더니 냉큼 바이올렛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같이 후원 가자.”
“그럴까. 나도 마무리된 이후에는 안 가봐서.”
“잘됐네.”
바이올렛은 함께 후원으로 가려고 방향을 틀다 아우스의 눈매가 축 처져 버린 것을 발견했다. 바이올렛이 살며시 팔짱을 빼내며 말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잠깐 남편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아. 깜빡했네.”
“그래? 그럼 뭐, 할 수 없지. 이따가 봐.”
샤론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바이올렛이 다시 아우스를 보니 역시나 표정이 환해져 있었다. 빨리 구경 가자는 샤론에게 설레는 표정으로 끌려가는 아우스를 보며 안심한 바이올렛이 돌아섰다.
문득 주변을 보니 사람들이 바이올렛에게 다가오려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이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제 집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제가 제 손으로 일궈 온 것들이 그리워졌다.
‘슬슬 집으로 돌아갈까?’
속으로 고민하며 사람들을 피해 성벽을 걷던 그녀는 성벽 아래에서 주변을 기웃거리며 걸어가는 여자를 발견했다.
핌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