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결혼 2년 차에, 윈터는 하루 두 시간을 자고 버틸 정도로 일에 파묻혀 지냈다.
긴축 재정으로 사무실을 줄여 윈터는 시장 한가운데 건물의 작은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하옐이 서류를 그의 책상에 쌓아 올리며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쳤다.
“식사는 좀 제대로 하시라니까요!”
“닥치고 꺼져.”
“하루에 두 시간 자고 식사도 매일 똑같이 때우시잖아요. 그러다 진짜 과로사해요.”
하옐이 접시에 놓인 샌드위치를 확인했다. 딱 피넛 버터만 바른 샌드위치였다.
“하다못해 햄이라도 넣어 드시든가요.”
“씹는 데 오래 걸려.”
“그럼 부드러운 햄으로…… 아니, 햄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옐이 푹 한숨을 쉬더니 그가 보고 있던 서류 위에 탁 편지를 올렸다.
“작은 마님 편지 한 번만 더 읽어 보세요.”
“읽었잖아.”
“다시 읽어 보세요.”
윈터가 혀를 차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윈터, 당신 생일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번 생일에는 직접 요리를 해 볼까 해요.
그러니 생일 저녁에 꼭 집에 와 줘요. 기다릴게요.
윈터가 뺨을 긁적이며 물었다.
“내 생일이 언제지?”
“두 달 전이죠. 심지어 작은 마님 생신도 지났어요, 그사이에.”
하옐이 비꼬는 말에 드디어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좀 몇 벌 사 와. 요즘 제일 잘나가는 걸로.”
“뭐, 뭐라고요? 지금 일주일째 모든 끼니를 피넛 버터 샌드위치로 때우시면서 무슨 드레스를 삽니까!”
“이 공주님이 진짜 내 생일에 요리라도 했으면 어떡해?”
“설마요. 작은 마님은 살면서 칼질 한 번 안 해 보셨을 텐데.”
“혹시 모르잖아. 그냥 사. 그 정도 살 여유는 있어.”
“여유야 있죠. 근데 대표님은 이 모양으로 사시면서…….”
하옐은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윈터의 고집을 꺾을 기운이 없어 그냥 돌아서 버렸다.
*
윈터는 그날 일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장난기 어린 얼굴로 감췄다.
“그래서. 내 생일에 음식 뭐 했어?”
“……놀릴 거죠?”
“아니. 안 놀릴게.”
“소시지가 들어간 토마토 파스타요.”
라크라운드에서 가장 만들기 쉬운 메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윈터가 큭 하고 소리를 내더니 이내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발끈해서 그를 흘겼다.
“안 놀린다면서!”
“소시지는 샀지?”
“당연하죠. 그럼 내가 만들어요?”
“토마토소스는?”
“도움을 받긴 했지만 토마토는 내가 삶았어요. 파스타도.”
“이제 와 생각하니 섭섭해지는군.”
“……당신 생일에 고작 그런 음식을 내려고 한 거요?”
“아니, 그날 내가 집에 안 간 거.”
그 3년의 모든 부분이 후회가 되었다. 그는 그 3년간 사업에서 모든 고통을 잊게 하는 온갖 희열을 맛봤다.
바이올렛은 그 3년간의 모든 기억이 불행했다. 그것을 되새길 때마다 그는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어졌다.
바이올렛이 크게 심호흡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당신은 드레스를 보냈군요.”
“보냈어.”
바이올렛이 오히려 미안해하며 윈터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당신은 생각보다 나에게 많은 것을 줬군요. 내가 모르고 있었던 거네요. 조금 더 주변을 둘러봤어야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
그녀가 화내기는커녕 사과를 하자 윈터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혼이 예정되어 있으니 바이올렛은 지금 제 마음에서 빨리 윈터를 정리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리라. 쓸데없이 미련을 두거나, 그때 이랬다면 하고 가정하기보다 제가 사과하고 지나가 버리려 하는 것이었다.
윈터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조용히 물었다.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부모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왜 내 허락을 받아.”
“당신은 가족을 사랑하는 남자니까.”
“돈으로 때운 거지.”
윈터가 욕을 하듯 말을 내뱉자 바이올렛이 조금 웃었다. 하여튼 꼭 이렇게 미운 말만 골라 하는 남자다. 이혼을 하고도 이런 남자가 그리울 거라 생각하니 제 꼴이 우스웠다.
이미 파티의 모든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스캔들이 재미있어 귀를 쫑긋 세우는 중이었다. 환상적인 분위기와 차차 흐려지는 날씨,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함의 절정. 이 모든 것이 타인의 흥미를 돋우고 있었다.
“잠시 나가시죠.”
그녀가 블루밍 부부를 바라보며 통보하고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 탓이었다.
블루밍 부부도 별수 없이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바이올렛은 조금 먼 곳까지 걸어갔다. 캐서린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바이올렛. 나는 그저…… 그래, 솔직히 말하마. 내 아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너에게 그렇게 좋은 옷을 보내 주는 게 싫었다. 우리 가여운 아들이…….”
“남편에게 작위를 넘기실 거죠?”
바이올렛이 말을 끊고 돌아서며 물었다. 그러자 캐서린은 대답을 거부하며 입을 다물었고,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윈터도 내 아들이니 언제나처럼 고려의 대상이란다.”
“디에브 혼자 힘으로는 가문이 유지되지 않을 겁니다. 윈터는 제 동생을 좋아하지 않으니 디에브가 작위를 넘겨받은 후에는 그에게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지요.”
마치 윈터처럼 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바이올렛을 보며, 부부는 못 본 사이 그녀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눈치챘다.
바이올렛이 캐서린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반대하시겠지요.”
“나는 두 아이를 똑같이 사랑한단다. 하지만 블루밍 가문에서 지금껏 서자가 가문을 이은 경우는 없어.”
“남편은 블루밍 가문이 상징하는 색조차 모르더군요. 그 외에도 당연히 가문에서 가르쳤어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했어요.”
“…….”
“두 분은 남편의 외로움을 이용하기만 하셨지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두 분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릴 거고,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바이올렛…….”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용서를 해 드릴 수도 있겠지요. 저에게 약을 먹이신 것까지.”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말하자 부부가 그녀를 보았다. 바이올렛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남편을 블루밍 가문의 승계 1순위로 올려 주세요.”
“안 돼. 절대로.”
캐서린이 본심을 드러내자 바이올렛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말씀드렸는데요. 이건 협상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준 것 없이 받기만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가를 치르셔야지요.”
“왜 준 것이 없니? 내 배로 낳지도 않고, 이방인의 더러운 피까지 섞인 아이를 거둬 주지 않았니.”
그녀의 눈이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서늘함으로 번뜩였다. 바이올렛이 종종 디에브에게 느끼던 섬뜩함이 캐서린에게서 느껴졌다. 상대가 우스워 보이면 반드시 제 발아래 두고 밟아 놔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내 아들 마음이 어떻겠니.”
“…….”
“우리는 서로 이런 관계에 만족하고 지내야 하는 거란다. 사람에게는 다, 자기에게 맞는 위치가 있지 않니.”
바이올렛은 잠시 말이 없었다. 윈터의 친어머니는 돈을 필요로 할 때 처음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런 그가 제 어머니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지금껏 저를 어떻게 여겨 왔는지 알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바이올렛, 너는 곧 떠날 사람이지만 나는 그 애 엄마잖니. 그것만으로도 윈터에겐 충분해.”
제임스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들에게 혼외 자식은 언제나 커다란 스캔들이었고, 돈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아내가 제 스캔들을 지금껏 참아 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가 없었다.
바이올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혼을 한다고 완전히 남이 되는 건 아니에요. 이혼한 후에, 남편이 외로움에 지치면 곁에 있어 줄 거예요. 그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녀가 씁쓸히 말을 이었다.
“남편이…… 좀 더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돈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생겼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두 분은 정말로 너무하셨어요.”
부부가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렛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후계는 두 분과 블루밍 가문의 원로들이 결정할 일이겠지요. 하지만 남편이 가문을 잇는 것이 가문 모든 이에게 낫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만약 두 분이 제 말을 거절하더라도 저는 가문의 원로들을 설득할 겁니다.”
“바이올렛!”
“말씀드렸잖아요. 이건 제가 두 분을 용서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그녀가 윈터에게 배운 거친 투로 말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녀는 곧바로 파티로 돌아왔다.
음악이 바뀌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었으나 윈터는 생각에 잠긴 상태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바이올렛이 사람들을 피해 그에게 걸어가 손을 이끌었다. 윈터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팔로 허리를 끌어안고 천천히 사람들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하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래.”
윈터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허리를 조금 숙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 춤춘 적 있나?”
그러자 바이올렛이 입꼬리를 조금 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윈터가 혀를 찼다.
“이런 개새끼도 없지.”
“처음이네요, 우리.”
온갖 파티에 초대받아 다니느라 강제로 춤이 몸에 익은 윈터와 어려서부터 사교계에 대비한 모든 교육을 받아 온 바이올렛은 처음이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못할 정도로 잘 맞는 파트너였다. 중간에 사람들이 멈춰서 두 사람이 춤추는 것을 넋 놓고 감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온몸으로 이 조화로움을 느끼는 것은 본인들이었다. 윈터도, 바이올렛도 태어나서 이토록 자신과 잘 맞는 춤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표정이 굳어 있던 윈터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춤추는 게 재밌을 때도 있군.”
“재밌어요?”
“응. 처음이야.”
재미있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이올렛도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재미있어요.”
“웃는 거 예쁘네.”
“요즘 당신은 예쁘단 말을 달고 사네요.”
“요즘 들어 당신이 예쁜 모양이군.”
그의 능청에 바이올렛이 이번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
파티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이올렛이었다. 그녀는 중간부터 연신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으므로 윈터가 번번이 구해 줘야 했다.
원래도 윈터는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었고, 바이올렛이 사람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으므로 두 사람은 일찌감치 파티에서 벗어났다. 일찍이라고 해도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파티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파티가 이렇게 힘든 거였죠. 잠깐 잊어버렸었네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소파로 향하던 바이올렛은 윈터가 가져다준 라크라운드 신문을 무심코 뒤적거리다가 찢어져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물었다.
“여긴 왜 찢어져 있을까요?”
“내가 가져갔어. 비행선 얘기가 있어서.”
“비행선?”
“응. 비행선 엄청 좋아하거든.”
“아…….”
비행선 좋아하는 사람이야 워낙 많았기 때문에 바이올렛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윈터도 그녀 옆에 풀썩 앉더니 바이올렛의 다리를 당겨 제 다리 위에 올리고 구두를 한 짝씩 벗겨 멀리 집어 던졌다.
그의 행동 중 이해 안 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바이올렛은 이제 일일이 물어보기도 지쳤다. 도대체 왜 남의 다리를 제 다리 위에 올리고, 왜 남의 구두를 던지는지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아졌다.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자신과 정반대로 자라 온 저 남자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