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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70화 (70/176)

70화

윈터는 조금 멀리에 있다가 웨이터 하나에게서 바이올렛이 워호슨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보고를 듣고 빠르게 되돌아오던 중이었다.

“아니면 달리 의도가 있는 말이었습니까?”

바이올렛이 그렇게 묻는 말을 엿들은 윈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제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뒤로 가면 서로 그의 혈통에 대해 헐뜯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도 뒷말을 하면서 돈을 뿌리니 놔두는 것뿐이다.

바이올렛은 대답이 없는 귀부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질문에 답이 되었다면 이만.”

그녀가 돌아섰다가 때마침 다가오던 윈터를 발견하고 미세하게 안심한 마음을 드러냈다. 윈터는 그녀의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곧은 어깨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자세가 저렇게 바른가, 윈터는 늘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평균보다 조금 작은 편인 그녀는 언제나 제 키보다 큰 인상을 주었다.

바이올렛과 있어줄 윈터가 돌아오니 샤론이 재빨리 아우스의 팔을 움켜쥐고 말했다.

“난 아우스와 할 말이 있어서 잠깐 객실에 갔다 올게.”

“그렇게 해.”

아우스가 살려 달라는 듯이 바이올렛을 보았지만 두 사람이 해결할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윈터가 말했다.

“당신 친구도 전혀 마음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우스 경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했거든요.”

“저 두 사람 객실에 특별히 신경을 썼으니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없던 로맨스도 생길 방이거든.”

“고마워요. 신경 써 줘서. 샤론이 영 철부지라 늘 걱정이에요. 가출을 하질 않나.”

바이올렛이 걱정하며 폭 한숨을 쉬자 윈터가 핀잔했다.

“동갑인 친구를 자식 보듯 말하지 마.”

“내가 그랬어요?”

“그랬어. 심지어는 나에게도 종종 그러지. 내가 연상인데도 말이야.”

바이올렛이 그건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천천히 파티를 둘러보았다. 어느 무리이든 그들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전에 제가 받았던 따돌림 때문에 바이올렛은 선뜻 어느 쪽으로도 걸음을 떼지 못했다. 게다가 사교계에서 오래 동떨어져 있었던지라 누가 사교계 명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윈터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슬쩍 속삭였다.

“잠깐 같이 다니지.”

“어차피 일 이야기 할 거잖아요. 괜찮아요, 난 2층에서 좀 쉴게요.”

“오자마자 쉬게 할 거면 드레스에 돈 이만큼 안 들였어.”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아까 바이올렛이 한 것처럼 그녀의 팔을 잡아 제 팔에 멋대로 둘렀다. 바이올렛은 그런 그를 힐끔 보고는 별말 없이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윈터가 사업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자 그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초대해 주신 덕분에 모처럼 가족들에게 생색 좀 냅니다.”

바이올렛은 그들 중 몇을 남부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과 있을 때, 윈터는 떠들썩했고 편안해 보였다. 일적인 관계 이상의 친구로 보였다.

모여 있는 여덟 명 중 다섯 명이 귀족이었고, 세 명은 아니었다. 말투와 행동, 차림새와 커프스 버튼이나 귀걸이의 색깔 등으로 바이올렛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가장 확실한 차이는 손목시계의 유무였다. 귀족들은 손목시계를 하지 않았다. 윈터가 공작가의 장남임에도 손목시계를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이질적인 경우였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왼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제가 준 백금 시계였다. 평소 그는 제 착장에 맞는 시계를 찼는데, 오늘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시계보다 값쌀 저 시계였다.

그는 물욕이 강했지만, 싫증도 잘 냈다. 한 물건을 여러 번 사용하는 것을 바이올렛은 거의 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는 저 시계를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었다. 백금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선물이라 기뻤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그는 아닌 척해도 외로운 사람이니까. 길 가다 문뜩 저를 떠올렸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했던 것 같았다. 그때는 솔직히 돈밖에 모르는 속물로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씁쓸해져서, 바이올렛은 윈터의 손목시계 위를 살며시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녀의 행동에 윈터가 대뜸 물었다.

“피곤해? 들어갈까?”

제 행동이 무슨 신호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러나 윈터는 곧장 그 자리에서 벗어나 바이올렛과 함께 1층 로비와 바로 연결된 테라스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바로 해.”

“그냥 내가 준 시계구나, 싶어서 만진 거예요. 과민 반응이네요.”

“마지막으로 당신이 이렇게 날 불렀을 때 당신이 곧장 무슨 짓을 했는데.”

“무슨 짓을 했는데요?”

“죽었잖아.”

“……아.”

바이올렛이 그제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었는지 윈터가 사색이 되어 한숨을 푹 쉬었다.

“당신 떠나고 내가 그 상황을, 그날 일을 몇 번이나 되새겼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하겠지.”

“…….”

“당신이 죽었다고, 그날. 내가 당신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아, 젠장.”

그의 트라우마를 심하게 건드렸는지 윈터는 말을 잇기는커녕 숨 쉬는 것조차도 가빠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이올렛에게 의지해 두 팔을 감싸 쥐었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던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죽었…… 군요. 내가.”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고 중얼거렸다.

“그래. 심지어 나에게 보여 주기까지 했지. 자기 머리에 총을 쐈잖아.”

“……세상에. 내가 그랬었죠.”

바이올렛은 이혼이 예정된 5월 20일까지 그에 대한 마음을 완벽히 비우는 것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1년간의 이별로 거의 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가 다시 나타난 이후부터 바이올렛의 마음은 경직된 겉과 달리 이리 튀었다가 저리 튀었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윈터를 마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려 왔다.

바이올렛은 이제야 윈터의 앞에서 제가 스스로에게 총을 쏜 일이 그에게 커다란 트라우마였음을 알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윈터. 나는 이제 안 죽어요. 그때는 슬펐고, 지금은 슬프지 않으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그때도 나는 당신이…… 엄살을 부린다고 했잖아. 나는 그렇게 멍청해.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 몰라. 그런데 내가, 내가 어떻게 당신이 죽지 않을 걸 확신해.”

“윈터.”

윈터 블루밍은 여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남자였다. 얻어듣기로 그런 남자들은 보통 아주 질이 나쁘다고 했다.

간혹 저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면서, 정작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제가 첫사랑이었다고, 아직도 종종 당신 때문에 설렌다고 고백했음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상대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아프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윈터의 핏발이 선 회색 눈동자는 이상하게도 바이올렛의 마음을 자꾸만 아프게 했다.

그는 참 이상했다. 불쌍할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남자가 툭하면 가여워졌다. 그건 아마도 저이의 눈빛 때문이리라, 바이올렛은 생각하고 있었다.

사납고도 씁쓸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늘 바이올렛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 곁으로 와 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 눈동자에 첫날부터 속았던 것이다. 첫날부터 바보처럼, 제가 그의 곁에 있어 주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했었다. 그날 처음 본 남자의 눈빛에 반해 버린 자신은 정말, 세상에 다시없는 바보였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들어가요. 당신 부모님께 인사해야죠.”

“필요 없어. 하지 마.”

윈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내 씁쓸함을 지우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난 요즘 부모님과 아주 관계가 나빠. 그러니 말을 걸 필요도 없어.”

그가 앞장서자 바이올렛이 따라 걸으며 말했다.

“그 의사가 보낸…… 편지 이후부터죠?”

“나도 부모님을 용서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야.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고통스러웠으니까.”

그가 대꾸한 뒤 두 사람은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과 대화를 하려 애썼고, 언제 블루밍 공작 부부와 대화를 하나에도 굉장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윈터도, 바이올렛도 그들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점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별수 없었는지 블루밍 공작 부부가 먼저 두 사람에게 다가섰다. 캐서린이 바이올렛의 앞에 서더니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어떻게 그렇게 연락 한 번 없이 떠나? 우리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하는 거니?”

그러자 옆에서 제임스가 맞장구쳤다.

“어디로 간 건지 한마디 해 줄 수는 없더라도, 잘 지내고 있다 기별은 줄 수 있는 것 아니냐? 로렌스 가문의 예를 배운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러더니 캐서린이 바이올렛이 대답도 하기 전에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보는 한가운데서 벌어진 포옹이라 바이올렛은 그녀를 바로 밀어낼 수 없었다.

윈터의 표정이 구겨졌다. 제가 받아 주지 않으니 곧장 바이올렛에게 달라붙는 모양새였다.

캐서린이 저를 놓아주자 바이올렛이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모처럼 뵙습니다.”

“그래. 모처럼이구나.”

“오늘은 차림새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어떠세요?”

“아…… 예쁘구나.”

“블루밍 가문의 며느리들은 3년간 화려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이제 괜찮으신가요?”

그녀가 담담히 묻자 블루밍 부부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윈터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화려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니.”

윈터가 영문 모를 소리라는 듯한 표정이라 바이올렛이 의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예 몰랐어요?”

“옆에서 뭐라고 해서 어두운 옷을 입는단 건 알았어.”

“가문의 전통이라고 들었어요.”

“나는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그딴 전통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당신은 그딴 걸 전통이라고 따랐단 말이야?”

“그럼 내가 달리 어떻게 했어야 하죠?”

고립되어 있었는데.

바이올렛이 말하지 않아도 뒷말을 알 수 있었다. 윈터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래서 내가 보낸 옷을 그대로…….”

“윈터.”

캐서린이 서둘러 윈터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시 돌려보낸 건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준 옷들은 항상 받았는데요.”

“우리 결혼하고 2년 정도 뒤에, 내가 그럭저럭 돈을 벌어서 당신에게 보낸 드레스 말이야.”

“네에?”

“왜 당신이 왕족이라 그런 드레스는…….”

차근하게 설명하던 윈터의 표정이 차차 서늘해졌다.

바이올렛은 제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윈터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못 받았구나, 당신.”

거절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녀에게 도착한 적이 없었다.

그가 제 부모 쪽을 보았다. 캐서린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져 있었다. 바이올렛이 이런 드레스는 좋아하지 않는다며 편지와 함께 돌려보냈던 것은 그의 어머니, 캐서린 블루밍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머니?”

윈터가 묻자 캐서린이 늘 아들을 달래던 처연한 얼굴로 걸어와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 드레스들, 네가 어떻게 벌어서 산 건지 알고 있었어. 그런데 어미가 돼서 그 드레스들을 보면 마음이 어떻겠니? 네가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샀다는 걸 아는데.”

캐서린은 분명 잘못했지만,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드레스들은 결코 쉽게 얻은 드레스들이 아니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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