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윈터를 훑어보았다.
그는 세련되고 유행을 잘 따르는 평소의 스타일과 달리, 매우 고전적인 디자인의 정장을 입었다. 그럼에도 근육질의 육체와 반항적인 눈빛 때문인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야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겼다. 안 그래도 근사한 남자가 저를 더 돋보이게 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이올렛은 저건 좀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윈터가 인상을 쓰고 물었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아뇨. 마음에 들어서 보는 거예요.”
“……뭐가 마음에 드는데?”
“이브닝 정장이요. 잘 어울려요.”
“어, 당신이 좋아할 것 같더군. 클래식한 스타일.”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녀가 대답하며 산뜻한 소리를 내고 웃었다. 윈터 역시 습관적으로 찌푸리던 표정을 풀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렛이 직접 만든 코르사주를 내밀었다.
“달아 줄래요?”
“잘 만들었네. 역시 꽃에 관한 건 당신에게 맡기는 게 좋겠어.”
“다행이네요.”
바이올렛의 취향이 반영된 코르사주 역시 고전적인 디자인을 따르고 있었고, 그래서인가 윈터의 정장과 일부러 조화를 맞춘 것만 같아 보였다.
윈터가 그것을 받아 드레스에 달아 주고 괜히 만지작거리는데, 때마침 객실 밖에서 하옐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8시입니다.”
7시부터 파티가 시작되었으나, 호스트이며 주인공인 두 사람은 한 시간이 지난 후 파티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윈터 역시 장갑을 낀 후 손을 내밀었다.
“갈까?”
그러자 바이올렛이 살며시 그의 옆에 서서 팔을 손으로 감싸 팔짱을 꼈다.
“가죠.”
윈터는 별 말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부부가 파티가 있는 로비에 들어서자 단숨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곧장 바이올렛의 드레스에 관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인지는 주관적인 것이라 확언할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드레스인 것은 확실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달라붙어 만든 드레스였다.
바이올렛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 파티는 오랜만인 데다가 남부에서 그녀를 눈에 띄게 따돌리거나 괴롭히던 귀족들까지 몇몇 보여 긴장을 해 윈터의 팔을 꼭 잡았다.
그러자 윈터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물었다.
“누구한테 인사할래?”
“네?”
“주인공께서 먼저 인사해 줘야지. 다들 기다릴 텐데.”
“그러니까, 당신이 호스트인데 왜 내가 주인공이 돼요?”
“요즘 세상이 전쟁 영웅 승전 파티라도 열어 주는 시대야? 남자가 주인공인 파티는 사라졌어. 우린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거라고. 부딪치지만 않게 잘 피해 다니면 돼.”
윈터는 그렇게 농담을 했지만 아마 이 파티에는 그와 어떻게든 친해져 보려고 안간힘 쓰는 사람들로 가득하리라,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파티에는 에쉬와 블루밍 부부가 있었으므로 두 방향 중 한 곳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제가 갈 곳을 알고 걸음을 옮겼다.
“샤론!”
바이올렛이 반가움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샤론이 잔망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바이올렛이 샤론과 함께 온 청년을 한 번 보고 소개해 달라는 듯 샤론을 보았다. 그러자 샤론이 못마땅해하며 소개했다.
“이쪽은 페런의 친구인 아우스 경.”
“아, 반갑습니다, 아우스 경. 샤론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바이올렛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우스는 정중히 해군식 경례를 한 후 그녀의 손등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는 인사를 했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말수가 적고 사교성도 없어 보였다. 샤론과는 정반대였다.
샤론이 말을 이었다.
“페런은 배를 타야 해서 아우스를 데려왔어. 보통 한가하거든.”
“그래?”
바이올렛이 대답하고 아우스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그 안에 실망감이 퍼지는 것을 본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우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바쁜 일이 있었음에도 취소하고 샤론을 에스코트하러 따라온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한가해서 데려왔다고 하니 좀 실망한 게였다.
샤론이 뒤따라온 윈터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보다 윈터 경! 바이올렛 드레스에 신경 많이 쓰셨나 봐요. 이렇게 딱 봐도 돈을 쏟아부은 것 같은 드레스를 얘가 찾아 입었을 리는 없으니까요.”
“역시 친구는 친구이시군요.”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우스를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에스코트의 표정을 보니 한가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윈터가 툭 내뱉자 아우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은 윈터가 말을 가려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반가움을 느끼며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래 보여서 혹시나 했어요.”
“응? 아닌데? 한가했을 텐데? 내가 파티 같이 갈까, 물어보니까 바로 온다고 했잖아?”
말이 빠른 편인 샤론이 다다다 하고 쏟아붓듯이 말하자 아우스의 입이 한 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가 말주변이 없는 타입이란 걸 안 바이올렛이 부드럽게 물었다.
“페런과 같은 배를 탔어야 했던 건 아닌가요? 해군이시고, 친구이시라 하니.”
“……맞습니다.”
그 말에 샤론의 미간이 팍 좁아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데 여기 있으면 어떡해?”
“전역했다.”
“뭐어? 미쳤어? 왜?”
“미치진 않았어. 다만…….”
아우스가 다시 입을 다물자 윈터가 대신 대꾸했다.
“이렇게 먼 곳까지 다른 남자와 보낼 수는 없으니 전역을 해서라도 같이 가겠다, 뭐 이런 거겠지.”
그가 대신 정리해 주자 아우스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잠시 경악으로 굳어 있던 샤론이 주변을 보았다. 아무도 안 보면 때릴 생각이었는데 모두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샤론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협박하듯 물었다.
“미쳤어? 돌았어? 인생 포기했어? 어쩌려고 파티 때문에 전역을 해? 오빠네 부모님 아시면 난리 나실 것 아냐?”
“여기 오기 전에 말씀드렸다.”
“뭐라시는데?”
“거기까진 듣지 못했어.”
“보나마나 ‘전역했습니다’, 한마디 하고 왔겠지. 파티 온다고 말씀도 안 드리고 나왔지?”
잠깐 기억을 더듬던 아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정확해서 살짝 놀라는 중이었다.
샤론이 바이올렛에게 말할 때는 그냥 ‘말이 너무 없는 게 웃기는 오빠 친구’ 정도였는데 여기서 보니 온 마음으로 샤론을 사랑하는 것이 보였다.
아우스가 일방적으로 샤론에게 혼나는 게 불쌍했는지, 윈터가 끼어들었다.
“객실은 어떠신지? 특별히 신경 썼는데.”
“아, 객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환상적이에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싶더라니까요?”
“두 개 객실 말고 한 객실에 두 개 침실로 해 달라고 하셔서 남매가 오는 줄 알았더니…….”
윈터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에 아우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샤론은 태연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욕실도 다 따로 있고 객실이 너무 넓어서 방 찾아가다가 길 잃을 정도던데요, 뭐.”
아우스가 옆에서 풀 죽은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해 놓고, 샤론은 슬쩍 바이올렛의 눈치를 보았다.
“잔소리할 거지?”
“결혼할 거니?”
바이올렛이 대뜸 묻자 샤론이 흠칫 놀라 부정했다.
“객실 따로 쓰면 부르기 불편하잖아. 게다가 요즘 객실 한 번 같이 썼다고 결혼하고 그런 시대 아니야. 애초에 우린 친구라니까?”
“아우스 경 의견은 물어본 거니? 경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대?”
“아니. 아우스랑 그런 거 상의하면 답답해서 죽어.”
그 말을 끝으로 샤론이 아우스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불만 있어?”
그러자 화들짝 놀란 아우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윈터는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약 올리고 싶은 걸 참고 옆에서 구경 중이었으므로 아우스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은 바이올렛뿐이었다. 그녀가 냉정하게 물었다.
“아무리 친해도 이성 간인데 객실을 같이 써도 되는지 정도는 물어봤어야지, 실례잖아.”
“우리 어머니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실례라니?”
“계속 네가 신경이 쓰이실 거 아니야.”
“뭐가 신경 쓰여? 내가 설마 저 숙맥을 덮치기라도 할까 봐?”
“샤론!”
바이올렛이 화들짝 놀라 언성을 높였다. 아우스는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지만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놀리고 싶어 미쳐 버릴 지경이던 윈터가 결국 아우스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문 잘 잠그고 주무셔야겠군.”
그가 말하고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씰룩거리자 울상이 된 아우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샤론,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 말에 윈터가 못 참고 한마디를 더 했다.
“그렇게 말하면 바라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의 말에 아우스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바이올렛이 놀리기 좋은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폭주하듯 아무 말이나 하는 친구와 남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두 사람의 팔을 아플 정도로 꼭 잡았다.
“둘 다 공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그런 말은 삼가 주세요.”
“그런 말이 뭔데.”
“맞아, 그런 말이 뭔데, 바이올렛?”
두 사람이 이번엔 바이올렛을 놀리려 들었지만,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엄한 표정을 짓자 금방 헛기침하며 입을 다물었다.
네 사람 사이가 너무 즐거워 보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윈터와 한마디 해 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그들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티의 주최자인 윈터는 다른 손님과도 인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곧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세 사람이 자리에 남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걸어온 귀부인이 레이스로 감싸인 바이올렛의 어깨를 보며 물었다.
“부인, 어깨에 그건 뭔가요?”
그러자 바이올렛이 차분히 귀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카닉 일족과 결혼한 다른 일족의 배우자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문양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머나, 그러셨구나…….”
남부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귀부인이라, 바이올렛도 그녀가 얼굴에 익었다.
그녀는 귀부인이 남부에서처럼 트집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말을 걸었으리라 미리 긴장을 했다.
3년간 많은 파티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누가 관심을 보여도 이내 괴롭힘으로 바뀌고 말았었다.
체념 상태인 바이올렛은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귀부인의 대답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온 워호슨 무리들이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에, 별거에 관한 건 다 낭설이었군요? 남편을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 그래도 명색이 공주님이시던 분이 이런 표식을 다 하시고.”
그것을 들은 바이올렛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들은 바이올렛을 비꼬고 있었지만, 그 비꼬는 말이 결국은 윈터의 피를 모욕하는 일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 귀족들은 제가 카닉 일족을 무시하는 걸 기반으로 바이올렛을 비꼬고 있음을 인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남부는 제 지역이 아니었으나, 바이올렛에게 키론은 집이고 제 지역이었다. 그녀가 어딘지 싸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 했나요? 이 표식은 카닉 일족과 결혼한 배우자에게 그리는 문양이라고 방금 말씀드린 것 같은데.”
“네?”
“무슨 용기라도 필요한 일인 것처럼 말씀하셔서 드리는 말입니다.”
바이올렛이 종종 윈터가 신경질 낼 기미를 보일 때처럼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과 함께 물들이는 것이라 한 달이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영구적일까 염려하신 것이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니, 저는…….”
“아니면 달리 의도가 있는 말이었습니까?”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