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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68화 (68/176)
  • 68화

    일하랴 딸 돌보랴 쉴 틈이 없었던 핌은 천국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 들어올 때 들었던 부담감은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얼굴에 꿀이 듬뿍 들어간 마사지 크림을 바른 핌이 물었다.

    “아니, 근데 이런 건물이 있고 맨날 이렇게 살 수 있게 해 줄 남자랑 왜 이혼을 하려 그래요?”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누워서 자기도 하겠다고 우겨 똑같은 팩을 이마와 뺨에 한 방울씩만 바른 리나가 말했다.

    “맞아, 바이올렛은 무서운 아저씨 왜 싫어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데.”

    아이의 말에 핌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리나, 그럼 아빠는?”

    “아빠는 두 번째!”

    “미, 밀렸구나…… 리나. 그래도 이건 아빠한텐 비밀이야. 알겠지?”

    “으음. 응. 아빠가 울지도 모르니까.”

    리나가 대꾸했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녀 덕에 웃음이 그치지 않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 말에 모녀가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를 좋아하질 않아서 이혼하는 것도 있을까.”

    그 말에 리나가 제법 인상을 쓰고 물었다.

    “사랑한다는 말 안 해?”

    “응.”

    “바이올렛은 했어?”

    “응. 했지. 그래서 속상해.”

    “아빠가 다시 첫 번째로 멋있어. 무서운 아저씨는 백 번째 정도야.”

    리나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핌이 옆에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친하다고 우리까지 불러서 이렇게 대우를 해 주는데 안 좋아한단 말이에요?”

    “이건 그냥 그 사람의 방식이라오. 가족을 유지하는 방식.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식.”

    “돈 쓰는 게요?”

    “돈을 써야 주변 사람들이 옆에 머물러 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이…… 정말로 자길 좋아해서 곁에 있어 준다는 건 상상도 못 하는 남자니까…….”

    어리석고 가여운 남자.

    그토록 외로움을 타면서, 그걸 전부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이 윈터 블루밍이었다.

    잠시 후 크림을 닦아 낸 핌이 제 보들보들한 뺨을 감싸며 감격해서 말했다.

    “세상에, 다시 열여덟 살이 된 것 같네!”

    그러자 옆에서 리나가 엄마를 따라 제 뺨을 감싸며 말했다.

    “리나도 다시 열여덟 살이 된 것 같네!”

    아이의 해맑은 말에 두 어른이 까르륵 웃었다.

    시간이 늦어 리나는 곧 잠들고, 두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 테이블 앞에 앉아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졌다. 바이올렛은 경계가 흐려져 밤하늘인지 바다의 끝인지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호박색으로 우려진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남편에게 언젠가는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길 바라면서도, 그가 돈보다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올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그 남자가 사랑에 빠지면 어떨까. 어떤 모습일까.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길 바라면서도, 그 누군가가 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고 나면 마음이 덴 것처럼 따끔거렸다.

    *

    다음 날 정오에 카닉사의 크루즈가 키론 항구에 들어섰다.

    윈터는 도착한 손님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열쇠를 하나씩 나눠 주며 환영했다.

    초대장 인원들을 확인하고 전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뒤늦게 블루밍 부부가 들어서자 윈터가 미간을 좁혔다.

    “두 분은 제가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의 무정한 말에 캐서린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윈터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네가 우리 때문에 화가 난 건 알아. 하지만 우린 정말 그런 적이 없어. 그 의사가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우리도 이해가 안 간단다.”

    “의사에게 다 확인했습니다. 전부 사실이었고.”

    “우린 그게 임신을 촉진하는 약인 줄 알았어! 그 의사가 자기가 오진을 해 놓고 왜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지 모르겠구나…….”

    캐서린이 쓰러질 듯이 말하자 옆에서 제임스가 맞장구쳤다.

    “우리가 도대체 그런 이상한 약을 먹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이냐. 너는 아직도 우리를 부모로 받아들이지 못한 게냐?”

    “애초에 아내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으면 그게 뭐였든지 저에게 말하셨어야죠.”

    그러자 캐서린이 말했다.

    “너는 그때까지 바이올렛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잖니.”

    “저는…….”

    “그 애가 기다려도 넌 본 척도 하지 않았지. 그래 놓고 바이올렛에게 준 약을 다 미리 말해 줬어야 한다는 거니? 말해 봤자 넌 관심도 없었을 거였잖니.”

    “…….”

    “너는 정말…… 아직도 가족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구나. 사랑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려고 들지. 윈터, 이제 좀 우리를 믿어 줄 수 없겠니?”

    윈터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남은 열쇠를 들고 직접 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분으로 남겨 둔 방의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내했다. 부부는 이제껏 묵었던 방에 비해 현저히 약소한 방에 실망했지만 아들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부모와 아들 간의 사랑을 이런 속물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부부는 같이 크루즈를 타고 온 사교계 인맥들에게 이런 작은 방에 묵는다는 것을 어떻게든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그들은 언제나 아들 덕에 이런 중요한 사교계 행사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할 수 있었다.

    블루밍 부부는 윈터와 달리 날 때부터 부유하게 태어났으므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의 부모님이 하던 것처럼 사용인이나 영지민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며 군림하는 시대는 아니게 되었으나, 이제는 돈으로 귀족도 부릴 수 있고 어려서는 상상 못 한 자본주의의 산물들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아들의 마음이 돌아선 이후부터 그 모든 것이 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들은 윈터가 쌓은 금탑 위에서 지내고 있었고, 그가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가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껏 가족의 애정에 목말라 있던 윈터의 쓸쓸함을 쉽게 이용했었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도 변화가 필요했다.

    방을 안내하고 난 윈터가 열쇠 꽂이에 열쇠를 걸었다.

    “쉬시죠.”

    그가 나가려는데 제임스가 붙잡았다.

    “윈터.”

    “예.”

    “바이올렛과 다시 잘해 보려고 이곳으로 온 게냐?”

    “아뇨. 잠깐 즐기다 이혼할 겁니다.”

    윈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잠시 후, 제임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바이올렛의 말대로 작위 후계자를 윈터로 정합시다.”

    그의 말에 캐서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어차피 윈터의 도움 없이 디에브 혼자 가문을 유지할 수는 없잖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우리 아들을…… 디에브는 내 배로 낳은 내 아들이에요. 어떻게 내가 낳지도 않은 윈터에게 후계자 자리를 줄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윈터는 작위 때문에 전 재산도 쏟아 버린 녀석이잖소. 그 애 마음을 돌리려면 후계자로 인정해 주는 것이 제일일 거요.”

    “그럼 우리 디에브는 어떻게 해요?”

    “후계자로 삼는다고 꼭 저 애가 물려받는 건 아니지 않소? 후계자가 작위를 받지 못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짓는 경우, 혹은 앞으로 가문을 이끌 수 없을 거라는 정당한 이의가 제기되었을 때 가문 내의 원로 회의를 통하여 후계자를 교체할 수 있었다. 그들이 디에브를 후계자로 결정하더라도 반대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당신 그 사교계 생활도 다 끝이오.”

    제임스의 말에 캐서린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응석받이로 자란 부부에게 살면서 이보다 큰 시련은 없었다.

    *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윈터는 결국 일을 때려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우나라도 한 번 더 하고 올까, 생각하며 집무실을 나서는데 때마침 하옐이 두 팔 가득 상자를 들고 가는 것이 보였다. 윈터가 하옐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신문?”

    “아, 네. 라크라운드 신문들이요. 작은 마님께서 읽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이번에 크루즈 오는 김에 직원에게 지난 한 달 사이에 라크라운드에서 나온 모든 신문사 신문 전부 다 운반해 달라고 했어요.”

    그 말에 상자 안 신문을 확인한 윈터가 말했다.

    “내가 먼저 좀 읽지.”

    “예에? 대표님 신문 잘 안 읽으시잖아요?”

    “오랜만에 읽고 싶어졌어. 내가 읽고 바이올렛에게 가져다주지.”

    “뭐, 그렇게 하세요.”

    하옐이 그에게 신문을 넘겨주었다.

    윈터는 신문이 든 상자를 제 집무실 데스크에 둔 뒤 앉을 정신도 없이 의자 맞은편에 그대로 서서 신문 한 장을 꺼내 펼쳤다.

    그의 시선은 신문 광고에 꽂혀 있었다.

    유인 비행선에 도전할 파일럿을 찾습니다!

    테이블을 짚은 그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간 무인 비행선은 여러 차례 성공했으나 유인 비행선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아직까지 하늘을 이동할 수단은 그 느려 터진 열기구뿐이었다.

    무인 비행선의 속도는 이미 배의 속도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무인 비행선조차 고장 날 확률이 90%를 넘었고,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유인 비행선은 전부 추락했다.

    그리고 그 유인 비행선에 탄 실험자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걸 알면서도 최초라는 타이틀과 그 실험자들에게 걸린 막대한 보험료 때문에 도전하는 자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윈터는 한참 동안 그것을 보다가 광고를 찢어 제 서랍장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신문들은 바이올렛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바이올렛에게 내준 객실은 문 바로 정면에 돔 형태의 거대한 유리문이 있는 거실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넓은 침실이 있었다. 윈터가 객실 책상에 신문을 내려놓고 침실로 들어가 보니 모녀를 태운 마차가 떠난 후, 드레스로 갈아입은 바이올렛이 보였다.

    거울 앞에 앉아 하녀들에게 머리 손질을 받던 바이올렛이 거울에 비친 윈터를 보며 물었다.

    “왜 벌써 왔어요?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는데.”

    “예쁘네.”

    그가 태연히 하는 말에 하녀들이 ‘어머’ 하고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했다. 당사자인 바이올렛이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끝나면 다시 들어와요.”

    “왜. 뭐가 남았는데. 내가 할게.”

    그러자 가장 옆에 붙어 있던 젠이 얼른 구두와 장갑 상자를 꺼냈다.

    “장갑은 레이스라 조심해서 끼우셔야 하고 구두는 리본을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대표님.”

    “장갑과 구두. 좋아. 알아 두지.”

    윈터가 말한 후 젠이 하녀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 모습에 젠은 제 편인 줄 알았던 바이올렛이 다소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윈터가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돈 주잖아.”

    그리고 바이올렛의 팔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화장대에 상자를 놓고 열자 그 안에 아주 얇은 레이스의 흰색 장갑과 보석이 들어 있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을 들어 천천히 장갑을 끼우기 시작했다. 정교한 눈꽃 모양의 자수를 연결, 연결하여 만든 터라 조금만 힘을 줘도 뜯어질 수 있어 장갑 한쪽 끼우는 것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양쪽 장갑을 끼운 후 각각의 상자에 들어 있었던, 사파이어가 자잘하게 박힌 밴드로 고정했다. 그리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구두를 손에 들었다.

    양쪽에 푸른색 구두를 신기고 발등 리본까지 묶고 나니 바이올렛의 준비가 끝났다. 윈터가 자리에 서서 바이올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내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녔고 가만히 서 있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제가 가진 고민들은 하찮은 쓰레기나 다름없게 보였다.

    그저 그녀를 위한 선택만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내의 손에 쥐여 잡힌 장난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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