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테이블 앞에서 차를 마시며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를 꿈꾸었듯이, 윈터에게도 꿈꾸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빗질 안 하면 마주 앉아서 대화도 못 하는 게 무슨 부부냐고, 윈터가 말했었다.
남편 역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말했고, 자신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문뜩 밀려오는 안타까움에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품에서 벗어나자 윈터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싫어?”
그는 어쩌면 늘, 제가 하는 행동에 신경을 써 왔던 건지도 모른다. 함께하던 3년. 윈터가 차가운 벽처럼 느껴지기만 하던 그 3년 동안, 그는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느꼈을까.
늘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것 같았을까. 제가 그랬던 것처럼. 원하는 것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뭐야, 울어?”
윈터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고 앉았다. 바이올렛이 손바닥으로 제 눈을 부드럽게 눌러 눈물을 닦아 내며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미안해졌어요.”
“뭐가?”
“가끔 당신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괴로웠는데, 당신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너무 몰랐어요. 이번엔 정말로, 정말로 이해했어요.”
윈터는 그대로 얼어서 눈물을 닦아 주지도 못하고 바이올렛의 미소가 고인 입꼬리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가져왔다.
바이올렛이 눈물을 닦아 내더니 몸을 일으켜 드레스 룸으로 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올라가 앉으며 윈터에게 말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네요. 뭐라도 먹어요.”
“나도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야. 간단히 먹고 낮잠 자자.”
“간단히 어떻게 먹어요?”
“무슨 의미야, 어떻게 먹냐니.”
“조금도 우아하지 않게 짐승들처럼 뒹구는 부부들은 보통…… 이럴 때 뭘 먹어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곧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감자튀김.”
“감자튀김?”
“응. 지금은 무조건 감자튀김.”
바이올렛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윈터를 보고 몇 번을 되묻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즐겁게 웃었다.
잠시 후, 이 객실을 담당하는 집사가 윈터가 요구한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를 가져다주고 떠났다.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디저트를 같이 받아요?”
“같이 먹을 거니까.”
윈터가 대꾸하더니 김이 올라오는 따끈한 감자튀김을 밀크셰이크에 찍어 입에 넣었다. 바이올렛은 그 모습을 질색하고 보다가 마음을 넓게 가지기로 했는지 그를 따라서 한입에 넣었다.
“음?”
바이올렛이 의외의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맛있는 거죠?”
“왜 맛있으면 안 된다는 말투야?”
“맛있으면 안 되니까요. 이건 식사고 이건 디저트인데…….”
“감자 케이크 같은 건 기겁하시겠군.”
“그건 이름만 케이크지, 식사예요.”
“당신은 꼭 뭐든지 그렇게 이분법으로 나눠야 직성이 풀리지?”
“그런 편이죠.”
“그래도 입맛은 안 까다롭단 말이야, 신기하게.”
“의외로 당신이 가리는 게 많고요. 어린애도 아니고.”
“편식은 당신이 심하지. 브로콜리는 항상 그대로 남기잖아.”
“항상은 아니에요. 가끔.”
“뭐라는 거야, 난 당신이 브로콜리를 먹는 걸 본 적이 없어.”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이야기를 이어 갔다.
*
두 사람은 두 개의 침실에서 각자 낮잠을 자고, 중간에 일어나 가볍게 산책을 했다.
윈터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느낄 만큼, 바이올렛이 떠난 이후 처음으로 썩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양지라 호텔은 어디를 가도 탄성을 자아내는 사랑스러운 곳들로 가득했다. 특히 해변에 설치한 그네 의자가 바이올렛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부는 그곳에 잠시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윈터는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아마 가만히 말도 않고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건 취향이 아닌 듯했다. 그래도 특별히 불만은 없는 고양이처럼 그녀의 옆에 내내 앉아 있었다.
점심 식사를 감자튀김 약간으로 때우고 잠들었기 때문에 저녁 식사 시간쯤이 되자 둘 다 무척 허기가 졌다.
두 사람은 곧 1층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2층 테이블에 앉았다. 번거롭긴 했지만 근사한 분위기에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조금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윈터도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오늘따라 유난히 파도가 잔잔했으며, 가까이에 보이는 샹들리에들이 묘한 분위기를 더했다.
테이블 위에는 여신이 유리로 된 항아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 항아리 안에서 초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호텔 전체를 이용한 데이트였다. 이 호텔의 소유자이니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근사한 분위기에 푹 빠져 있던 바이올렛이 말했다.
“이건 부정을 못 하겠네요. 근사해요.”
“당연하지. 전부 당신 취향대로 만든 거니까.”
“네?”
“여기 호텔은 하나하나 전부, 당신 취향으로 만든 거라고. 몰랐나?”
“왜 그랬어요?”
“내 아이디어가 고갈돼서. 공주님 취향에 맞추면 실패는 안 하잖아.”
윈터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거짓말에 바이올렛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메뉴를 다 먹어 보고 의견을 내줘.”
“그럴게요.”
잠시 후 식사가 도착하자 바이올렛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루, 룰루!”
“오랜만에 뵙네요!”
수도 호텔에서 일하던 룰루였다. 바이올렛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며 물었다.
“세상에, 여기는 무슨 일인가?”
“남편이 파티 때문에 잠깐 출장을 왔거든요. 대표님이 작은 마님께 인사하고 싶으면 같이 오라고 해서요.”
“남편…… 아, 혹시 주방장과?”
“어떻게 아셨어요?”
룰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이올렛이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웃었다.
“몇 번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봤는데…… 주방장이 룰루를 좋아하는 걸로 보여서.”
주방장 투린은 툭하면 룰루의 주변을 얼쩡거리며 자긴 요리와 결혼해서 법적으론 미혼인데 당신은 어떻소, 하고 서툴게 관심을 보여 댔다. 그때 투린이 트롤리를 끌고 오며 말했다.
“작은 마님, 제가 언제 또 그렇게 아내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습니까…….”
“그래 보였네.”
“나름 감췄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입니까?”
“그게 감춘 거였나?”
바이올렛이 놀리듯이 묻고는 룰루와 함께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윈터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때리며 말했다.
“또 시작이군. 회포는 나중에 풀고 식사나 내려놔. 식어.”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투린이 얼른 사과하고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작게 큐브로 자른 가지 요리를 시작으로 온갖 식재료들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작은 유리 우산을 뒤집어 놓은 형태의 접시에 들어 있는 소르베를 떠먹고 난 바이올렛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투린을 보았다.
그녀의 감동한 표정에 투린이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눈치채 주실 줄 알았습니다! 코르시카를 대표하는 다섯 가지 식재료의 맛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이 소르베야말로 이곳 호텔의 모든 것을 담은 정수!”
“정말로 훌륭하네.”
“수, 숯에 구운 메추라기는 어떠십니까?”
“생강이 들어가서 아주 독특하군. 계속 먹고 싶어지는 맛이네.”
“딱 제가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
투린이 신이 나서 음식 소개는 때려치우고 바이올렛이 알아주기만 기다리자 윈터가 혀를 한 번 차고 말했다.
“주방장 태도가 형편없군.”
그제야 흠칫 놀란 투린이 이성을 찾고 식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투린은 더 많은 칭찬과 평가를 원했으나 중간에 룰루에게 눈치 좀 있으라고 등짝을 얻어맞으며 끌려갔다. 덕분에 디저트를 먹을 때부터는 데이트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무리했다. 바이올렛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라크라운드 사람들은 여기에 오기 힘들겠네요. 배를 한참 타야 하는데.”
“일단은 여기 대륙 사람들이 타깃이긴 하지만, 라크라운드 사람들도 오게 해야지.”
“어떻게요?”
“크루즈를 샀으니 대륙 양쪽을 오갈 거야. 그리고 중간에 도스 공국에도 거점을 만들면 좋겠더군. 그래서 당신 그 친오빠 비슷한 남자한테 얘기는 꺼내 놨어.”
“페런 도스예요.”
“내가 이름을 몰라서 이렇게 부르겠어?”
“아는데 왜 그렇게 불러요?”
“이름도 부르기 싫을 정도로 꼴 보기 싫으니까.”
“페런은 좋은 사람이에요.”
“나에겐 아내와 친한 외간 남자지.”
“친오빠 같은 사람이에요.”
“‘같은’ 사람이지. 친오빠가 있는데 친오빠 같은 사람이 왜 필요해? 정 필요하면 내가 남편도 하고 친오빠 같은 사람도 해 줄게. 그 자식은 그냥 외간 남자로 해.”
윈터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절대로 친오빠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왜?”
“당신은 내 첫사랑이잖아요.”
그녀의 담담한 말에 윈터의 손이 멈췄다. 바이올렛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사랑을 하고, 세 번째 사랑을 한다고 해서 첫사랑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까.”
“……지금은?”
“지금?”
“지금은 날 보면 어떻지?”
윈터가 어쩐지 무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은 언뜻, 상처가 떠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에게 설렐 때면 위에서 누군가가 바위로 나를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설레면 안 된다고. 다시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이 짐이 다시 나를 누를 거라고.”
그 마음은 윈터도 알았다. 차라리 납작한 물질이 되었으면 하던 마음. 그 우울함의 무게는 숨 쉬지 못할 정도였다.
윈터는 저와의 관계가 그녀에게는 그런 우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녀를 다시 짓눌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윈터, 어차피 우리가 이혼을 하면 얼마 안 가 당신은 나를 잊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나를 사랑해서 고른 게 아니었잖아요. 다음번엔 꼭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분을 만나요. 돈보다 사랑이 주고 싶은 사람이요. 아이도 같이 낳아서 기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죠. 운명처럼 만나게 될 거예요.”
“…….”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윈터는 말없이 티스푼으로 케이크를 눌러 으깨고 있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려 했다.
가슴팍에 총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고통을 억지로 짓눌러 견디느라 이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제가 돈으로 애정을 갈구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그러지 말라는 말을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로 우회한 것이다.
“윈터?”
“옆집 사람들을 부르지 그래. 당신 친구들.”
“핌이랑 리나요?”
“응. 오늘 밤에 여자들끼리 놀아. 방 비워 줄 테니까. 난 할 일이 많아서.”
“잠깐만요, 윈터.”
“먼저 일어나지.”
윈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먼저 일어나는 것이 무례란 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바이올렛의 앞에서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
잠시 후, 윈터가 보낸 마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핌과 리나가 호텔을 경계하며 속닥거렸다.
“엄마, 우리 오늘 왜 여기서 자?”
“응, 그 무서운 아저씨가 그러래.”
“왜? 집이 좋은데…….”
두 사람이 속닥거리며 호텔을 경계하는데 플립이 다가와 핌에게 물었다.
“객실까지 짐을 들어 드릴까요?”
“아, 플라이트 씨. 뭐 그러세요…….”
핌이 얼떨결에 짐을 맡겼다. 플립이 여느 때처럼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께서 세 분 원하시는 휴식을 취하게 해 드리라고 하셔서 여러 가지 메뉴를 준비했습니다.”
잠시 후, 플립이 안내한 방에 들어선 핌과 리나의 입이 절로 열렸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이 방을 보고 그런 표정이었소.”
플립이 간단한 간식거리를 두고 떠나자마자 핌과 리나가 질문을 쏟아부었다.
“바이올렛, 우리 오늘 정말 돈 안 내도 되는 거예요?”
“전혀. 남편이 갑자기 초대한 건데 와준 것만도 고맙소.”
“바이올렛! 나 이거 먹어도 돼? 아, 침대에서 뛰어도 돼? 침대가 엄청 커!”
바이올렛이 일단 간식으로 놓인 쿠키를 리나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쿠키는 먹어도 되는데 침대는 안 돼. 침대는 뛰는 곳 아니라고 했지?”
“에이…… 그럼 굴러다니는 건?”
“그건 괜찮을 것 같구나.”
허락해 주자마자 리나가 꺄악 소리를 지르며 침대로 달려가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핌 역시 폭신폭신한 침대에 감탄하며 드러누웠다.
바이올렛은 잠시 문을 열고 윈터의 집무실 방향을 보았다. 중간에 먼저 일어나 떠나 버린 그가 영 신경 쓰였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