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핌이 넌더리를 치며 말했다.
“내가 얘기했죠? 열다섯 살부터 가장이었다고. 전신국 일을 안 해 본 곳이 없어요.”
“어디가 제일 좋았소?”
“……라, 라크라운드에서 잠깐 일했는데 괜찮았어요.”
핌은 제가 카닉 호텔에서 근무했던 것이 들통날까 봐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윈터에게 돈을 받고 바이올렛을 계속 돌봐 주고 있긴 하지만, 바이올렛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리나는 바이올렛을 무척 좋아해 틈만 나면 옆집으로 놀러 갔고, 그건 다른 동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다정하고 온화했으나 끊어 낼 것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었다. 좋은 것을 보면 좋다 말하고 나쁜 것을 보면 나쁘다 말했기 때문에 어려우면서도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녀가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정을 너무 많이 줘 버렸기 때문에, 바이올렛이 알고 저를 외면하게 되면 쓸쓸할 것 같았다.
핌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알았는지,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종종 나에게 전신 부호를 알려 줄 수 있소?”
“네에? 이걸 배워서 뭐 하게요?”
“살다 보면 쓸 곳이 있을 수도 있지 않소. 조난을 당한다든지.”
“아, 그럼 조난 당했을 때 쓸 것들 일단 알려 줄게요. 구조 신청 같은 거.”
“그럼 대신…….”
“혹시 남편분이 이 앞에 길 좀 못 깔아 주나?”
핌이 비만 오면 진창이 되어 버리는 길을 손짓했다.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했다.
“남편 돈이지 내 돈은 아니라서.”
“괜찮아요. 나중에 내가 말하면 돼요. 바이올렛도 비 오면 진창 지나느라 애를 먹잖아요. 그것만 말하지 뭐.”
바이올렛이 그녀의 이야기를 웃어넘겼다.
*
아무리 이혼을 준비 중이라지만 파티 호스트의 아내로서 바이올렛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호텔에 도착해 보니 바닥은 새하얀 대리석이었고, 벽은 아낌없이 금을 사용해 마감을 마친 후였다. 마치 거대한 신전 같아 보였다.
입구에 선 바이올렛에게 손가락을 까딱인 윈터가 앞장서며 말했다.
“호텔의 객실이 생명이라면 입구는 첫인상이지. 무조건 완벽해야 해. 우아하지만 불편해선 안 되지.”
“그렇군요. 그런데 윈터, 조금 천천히…….”
“알려 줄 것이 많으니까 더 빨리 걸어.”
바이올렛은 마치 신입 사원이라도 된 기분으로 윈터를 따라 걸었다.
키론의 호텔은 바이올렛이 본 수도의 호텔과는 격이 달랐다. 두 개의 층을 터서 만든 로비의 천장에 거대한 샹들리에들이 달려 있었고, 한가운데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 2층에는 벽을 타고 빙 둘러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호텔 안 세 개의 레스토랑 중 하나로 어느 곳에서나 바다가 보였다.
정문에서 들어서면 왼쪽에 리셉션 데스크, 맞은편에 연주자들이 연주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그리고 계단 바로 옆으로 인공 폭포가 있었으며 폭포 안에서는 색유리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제 허름한 차림새를 내려다보더니 윈터의 팔을 붙잡았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이곳과 맞지 않아요.”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돌아가서…….”
“객실에 있어.”
그가 따라오려는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그러곤 승강기에 아내를 먼저 태운 후 자신도 탄 뒤에 문을 닫았다.
잠시 후, 그들이 가장 높은 층에 도착하자 윈터가 입을 열었다.
“최고 층 전체가 한 객실이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심지어 왕족이어도 우리 호텔의 소셜 클럽 회원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어.”
“그렇군요.”
“좀 놀라지 그래. 맥 빠지네.”
윈터가 투덜거리는 사이 승강기가 11층에 도착했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그 앞에 있는 화려한 금색의 두꺼운 문 앞에 서 있던 직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바이올렛이 자리에 멈춰 섰다.
“……와.”
정면으로 트여 있는 거대한 공간 뒤, 한 벽 전체가 발코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너머로 바다와 호텔 소유의 해수욕장이 보였다.
복층의 객실은 첫눈에도 완벽함이 느껴졌다. 조약돌 모양의 장식이 있는 바의 디자인도 독특했고, 발코니 가까이에 놓인 미팅 테이블이며 소파들도 평범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걸음을 옮겨 발코니로 향하는데 윈터가 멈춰 세웠다.
“옷 갈아입는다며.”
“여기 옷이 있어요?”
“오늘 쓰려고 가져다 놨지.”
윈터가 태연히 말하더니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따라 들어가자 윈터가 드레스 한 벌을 꺼내 내밀었다.
“어때.”
“치수가…….”
“다 당신한테 맞는 거야. 이거 당신 거 아니라 내 거니까 잔소리하거나 팔 생각 하지 마.”
주지 말라니까 무엇이든 자기 거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이 남자가 이렇게 자신한테 돈을 쏟으며 바라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답은 명확했다. 애정의 갈구였다.
제 부모에게 끊임없이 돈을 쏟아부었던 것처럼, 제 직원들에게 유난히 높은 연봉을 주는 것처럼.
제가 그에게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흔들거리는 제 마음이 바이올렛은 가장 미웠다.
바이올렛이 드레스를 받아 들자 윈터가 물었다.
“웬일이지? 평소엔 차림새와 장소 조합 같은 거 신경 안 썼잖아.”
“여긴 당신 일터잖아요. 배우자의 일터에서 아무 옷이나 입고 사람들을 마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요.”
“아, 내 탓이다?”
“왜 그렇게 비꽈서 들어요? 당신을 위해서 갈아입어 주는 거잖아요.”
“그 말 듣고 싶어서 비꼰 거야.”
윈터가 짓궂은 투로 말했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 쉬는 바이올렛의 허리를 확 끌어안아 그녀의 등허리에 묶인 치마의 리본을 풀었다.
바이올렛이 멈칫하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도와주잖아.”
“안았잖아요.”
“그러니까. 도와주는 거잖아?”
객실 넓이에 비해 드레스 룸은 현저하게 작았다. 바이올렛이 그를 밀어냈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손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윈터가 바이올렛이 치마 안으로 넣어 입은 흰색의 블라우스를 잡아 빼며 말했다.
“입 맞추고 싶은데.”
“맘대로 해요. 대신 이번엔 정말로 마지막이에요. 내가 중간에 피하더라도, 당신이 이상한 짓을 해서 피한 거니까, 당신 탓이에요.”
“꼼꼼하시긴.”
“빈정거리지 말아요, 난 진지해요. 게다가 왜 당신은 꼭 이럴 때만 입을 맞추려 하죠?”
“이럴 때가 뭔데?”
“내가 싫어할 때요.”
“아닌데. 당신이 좋아할 때를 고른 거지.”
“무슨…….”
윈터가 한 걸음 성큼 다가오니 두 사람의 몸이 닿았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턱을 검지로 들어 자신을 보게 하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가 이렇게 보고만 있으면 빨리 입 맞춰 달라고 조르잖아?”
“그건 좋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쳐다보는 게 불편해서예요.”
“아, 까다로운 공주님.”
윈터가 능청을 떨고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곳에서 놔주지 않았다. 윈터의 말처럼 유독 그가 가까이에서 뜸 들이는 걸 못 견뎌 하는 바이올렛이 입술을 물었다가 저도 모르게 애원조로 말했다.
“……정말 마지막이에요. 알겠죠? 또 이상한 트집 잡으면 안 돼요.”
“내가 약속은 진짜 잘 지켜.”
“거짓말 말아요. 난 세상에서 당신처럼 쉽게 말 바꾸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바이올렛의 비난을 유쾌하게 듣던 윈터가 곧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다른 손으로 목을 감싸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녀를 붙잡은 윈터의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열정적으로 쏟아지는 키스에 바이올렛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윈터는 미끄러지려는 그녀를 완전히 벽으로 몰아넣고 입술이며 입 속을 수색하듯 샅샅이 뒤져 댔다. 입 안 곳곳이 건드려지자 바이올렛의 숨이 더워지며 두 손이 점차 윈터의 셔츠를 구겨 쥐게 되었다. 윈터는 그런 그녀의 손이 사랑스럽다는 듯 감싸 잡아 눌렀다.
드레스 룸 안에 더운 열이 번지도록 입을 맞춘 후에야 바이올렛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그제야 윈터 역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물러섰다.
떨어져도 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몸을 불태울 듯 더욱 커지기만 했다. 윈터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제 눈을 감쌌다.
“……미치겠네.”
윈터의 손에 바이올렛의 블라우스 단추가 죄다 풀려 있었고, 한 갈래로 묶고 왔던 머리 리본은 거의 다 끌려 내려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이올렛의 눈동자에서 그녀 본인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성욕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새빨개진 입술로 약한 신음이 섞인 숨을 쉬던 바이올렛이 천천히 윈터 가까이로 걸어왔다.
“왜 눈을 가려요?”
“아, 몰라.”
윈터가 짜증을 내며 제 등 뒤 문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바이올렛의 시선이 거친 호흡과 욕망으로 들썩거리는 윈터의 목울대에 닿았다.
바이올렛이 그의 넥타이를 잡더니 저를 보라는 듯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손으로 목울대 위를 감싸며 말했다.
“왜 이렇게 숨이 가빠요?”
“당신도 똑같잖아.”
“그러니까요.”
바이올렛이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버리는 윈터를 보며 물었다.
“묻잖아요. 왜 이렇게 숨이 가빠져요?”
“…….”
“기분이 이상해요.”
“……왜 이상해. 그리고 왜 끌어당겨. 날 어쩌고 싶은데.”
바이올렛이 윈터의 괴로운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왜 날 안 보는지 알고 싶어요.”
“바이올렛, 지금부터 내가 설득을 할 테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
윈터가 사활이라도 걸린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부부잖아.”
“그렇죠.”
“그리고 지금 당신은 매우 나를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표정이야.”
“거짓말 말아요.”
“진짜야. 여자들이 날 보고 그런 표정 많이 짓거든.”
그 말에 바이올렛이 질색하며 윈터를 흘겼다. 세상 최고 이상 성욕자도 저렇게 모멸하는 표정을 보진 못했으리라, 윈터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름의 유혹을 이어 갔다.
“그냥 데려가서 눕혀. 책임지라고 안 할게.”
“당신이 틀렸어요.”
“상대가 나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이건 그냥 본능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이 당신에게도 있는 것뿐이야. 지금 문뜩 나타난 것뿐이라고.”
“…….”
“날 이용해. 난 언제나 목말라 있는 이상 성욕자니까.”
윈터의 짓궂은 농담에도 바이올렛은 대답이 없었다. 가슴이 들썩이고, 윈터의 옷을 뜯어 벗기고 싶고, 온몸을 만지고 싶은 이 기분이 정말 성욕인가에 대해 고민할 뿐이었다.
그녀가 체념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윈터가 그대로 바이올렛을 들어 제 어깨에 메고 드레스 룸을 나섰다.
곧 그녀의 몸이 침대에 풀썩 쓰러지고, 윈터가 위를 덮쳤다. 바이올렛이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문제예요.”
“나는 항상 문제야.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면 그렇게 해.”
“불 꺼 줘요.”
“아까부터 꺼져 있어. 채광이 좋은 걸 어떡해.”
“그, 그럼…… 저녁까지 기다리죠.”
“이미 늦었어. 당신이 허락했잖아.”
“사람 말 무시하지 말…… 잠깐만요, 뭐 하는 거예요? 이건 로렌스 가문에서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공주님 소리 싫어하면서 이럴 때만 공주님인척하지 마.”
“잠깐, 잠…….”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빠르게 끊어지며 눈동자는 경악으로 가득 찼다가, 곧 아찔함으로 물들었다.
*
두 사람이 이성을 되찾은 건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난 후였다.
바이올렛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기 위해 샤워 후 옷을 단정히 입고는 울음소리를 내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반면에 윈터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침대로 돌아왔다.
허리에 배스 타월을 두른 그가 옷을 다 차려입은 바이올렛의 모습에 순식간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려고?”
“알려 줄 게 많다면서요? 당신 때문에 일정이 뒤죽박죽이에요.”
바이올렛이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화를 내며 일어서다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윈터가 혀를 차며 그녀를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헛짓하지 말고 누워. 내일 해.”
“어떻게 나한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싫어하지 않았잖아?”
“말이 안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왜 말이 안 나왔겠어? 싫지 않으니까 그렇지.”
“……당신은 악당이에요.”
“그것보다 더 험한 말은 못 하지?”
“오만 방자하고 무례하고 성욕에 눈이 멀었어요.”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녀가 퍼붓는 최선의 악담이 귀여워 윈터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가 바이올렛의 옆에 풀썩 누웠다.
그러더니 바이올렛을 팔로 꽉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이런 거였어.”
“뭐가요?”
“내가 생각하는 부부.”
“이런 게 어떤 건데요?”
바이올렛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이 닿는 것을 무안해하며 묻자 윈터가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다 벗고, 조금도 우아하지 않게 짐승들처럼 뒹굴다가 살 맞대고 자는 거.”
“…….”
“그런 거.”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