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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64화 (64/176)

64화

본디 헤스턴 가문은 왕실을 지키는 가문이오. 새로운 가주가 왕의 가호 없이 어찌 제대로 된 가주라 불릴 수 있을까. 나 카르잔 헤스턴은 라크라운드 왕의 가호를 요청하는 바요.

그 발표에 바이올렛이 기가 차서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윈터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하옐을 보았다.

“그러니까, 왕실을 다시 복구하라고 요구하는 건가? 에쉬더러 왕좌에 앉으라고?”

“네! 그런 목적인가 봐요…….”

“심각한 거지?”

“저한테 물어보시면 제가 압니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두 남자가 동시에 이 상황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할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가 신문을 다시 접으며 말했다.

“왕실을 복구하자는 주장까지는 아니지만 에쉬가 새로운 헤스턴 변경백으로 인정하는 예식을 치러야 한다는 건 확실해요. 그렇다면 왕실로서의 의전을 행하게 될 거고, 그걸 보게 되면 아무리 왕실이 해산되었다고 해도 라크라운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왕으로서의 에쉬 로렌스가 자리 잡겠죠. 나라의 이런 큰 행사가 생길 때마다 담당하는 입헌 군주로. 점점 더 나라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거예요.”

그러자 윈터가 혀를 차며 욕을 내뱉었다.

“아, 이 쓰레기 새끼.”

“그러게 말입니다.”

하옐이 옆에서 맞장구치다가 그 쓰레기 새끼가 바이올렛의 가족임을 떠올리고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담담히 말했다.

“이런 것도 욕하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나.”

“그, 그렇지만요…….”

하옐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얄밉게도 윈터는 이미 딴청하며 제가 그런 말 한 적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 대단하던, 고고한 헤스턴 가문조차 자본과 권력의 유지를 위해 틀린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것이 세상의 흐름이라지만.

그녀의 표정을 읽은 두 남자가 제 발이 저려 소곤거렸다.

“……바이올렛이 저렇게 실망한 표정 짓는 거 오랜만에 보는데. 내가 뭐 잘못했나?”

“그래도 오빠인데 욕해서 그런 걸까요?”

“말실수이긴 하지만 바이올렛은 쓰레기한테 쓰레기라고 욕하는 걸로 화내는 사람 아니야. 물론 내가 신사답지 못했다고 잔소리를 듣긴 하겠지.”

이제 바이올렛의 행동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 윈터의 말에 하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왜 저런 표정이신 걸까요?”

“내가 아내 속을 다 알면 이혼 얘기가 왜 나와.”

도대체 왜 그럴까, 두 남자가 의문에 빠져 있는데 바이올렛이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옐에게 말했다.

“전해 줘서 고맙네.”

“예, 작은 마님.”

분위기가 어떻든 윈터가 마침 잘됐다는 듯이 하옐에게 말했다.

“가서 디자이너들 끌고 와. 최고급 푸른색 실크로 드레스를 만들어야 하니까. 보석 예산도 한도가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고, 레이스에 자수 놓을 사람들도 있는 대로 데려와. 일주일밖에 안 남았으니 못해도 열 명은 고용해야겠군.”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깜짝 놀라 윈터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아까는 레이스 자수 같은 말 없었잖아요?”

“내가 입으려고 사는 거니까 참견하지 마.”

윈터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다.

어찌 되었든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으므로 하옐도 안심하는 눈치였고, 바이올렛 역시 헤스턴 가문에 대한 불안함을 감추고 일단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윈터도 하옐도 에쉬와 헤스턴 가문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 에쉬가 왕실 행사를 진행하면 자기가 작위를 받을 수도 있냐고 하기에 그건 아니라고 하니, 윈터는 그럼 관심 없다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이올렛이 궁금해할 것은 알았는지 이번에 배편으로 온 신문을 전부 가져다주었다.

에쉬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영웅, 헤스턴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왕실의 이름으로 새로운 헤스턴 변경백을 인정하는 자리를 만들 계획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바이올렛은 신문을 확인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롱 리우드 땅을 자신에게 돌려주게 된 이상 에쉬가 그 대단한 헤스턴 가문을 움직일 정도의 돈이 있을 리는 없었다.

바이올렛은 혹시 이 협의에서 오간 대가가 자신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선 헤스턴 변경백은 올해로 예순여덟, 이번에 새로 헤스턴 변경백이 되는 그 아들이 마흔일곱이었고 얼마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바이올렛이 골치가 아파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설마 아니겠지.”

저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데 제멋대로 저를 결혼시킬 생각은 아니리라. 제 오빠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헤스턴 가문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고 믿었다.

바이올렛은 침착하게 다시 신문을 덮었다. 그리고 단호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절대 안 되지.”

그럼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잠자코 끼워다 맞추는 결혼식장에 서느니 더 먼 곳으로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보다 더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선택할 것이다.

바이올렛은 반복해서 읽는다고 답이 나오지 않는 기사들을 서랍장에 집어넣었다.

지난 1년, 그녀는 이 낯선 곳에서 살아남았다. 그녀는 원래도 버티는 일을 잘했고, 이 1년이 지나고 나니 자신감까지 얻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어느 누구도 저를 힘으로 끌어다가 원하지 않는 결혼식장에 밀어 넣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 너머로 동네 아이들이 윈터가 사다 놓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노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저 멀리서 젠이 드레스 한 벌을 안고 오는 것이 보였다. 윈터가 말한 청색이 아니라 새까맣고 반짝거리는 드레스였다.

젠이 집 안으로 들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짜잔!”

“…….”

“작은 마님, 짜잔!”

젠이 거듭 말하자 바이올렛이 겨우 경악에서 벗어나 물었다.

“뭐, 뭐니, 이 야한 드레스는?”

“대표님 선물이요!”

“내가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이거 엄청 싼 거라던데요? 보세요, 딱 봐도 마감이 얼렁뚱땅이잖아요. 장식도 하나도 없고.”

젠이 드레스를 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얼렁뚱땅으로 보이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만듦새가 완벽했다.

게다가 바이올렛은 이렇게 화려하고, 팔다리며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이거 입고 카닉 일족들의 술집에 가자고 하셨어요. 왜 싸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화해의 데이트라면서.”

“갑자기 데이트라니…….”

“가실 거예요? 물론 대표님이 혼혈이시긴 하지만, 우리 작은 마님께서 어떻게 그런 곳에…….”

젠은 제 눈엔 세상에서 제일 귀한 작은 마님이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는 은밀한 술집에 가는 것이 못마땅했고, 바이올렛은 저 드레스가 못마땅했다.

일단 어떤지 입어 보기는 해야 하니 젠이 바이올렛에게 드레스를 입히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제가 어두운 드레스에 질린 걸 알면서 왜 굳이 이런 색을 골랐을까, 신경 쓰였지만 실제로 입어 보니 기분이 바뀌었다.

최고급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는 모양새에 비해 가벼웠고, 움직일 때마다 윤기가 흐르며 미묘하게 다른 색으로 보였다.

거기에 블루밍 저택에서는 늘 가리고 다니던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팔다리가 드러나 답답하거나 어둡다는 느낌 대신 우아하고 모던한 느낌이 들었다.

바이올렛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괜찮니?”

“괜찮은 정도겠어요? 지나가던 남자가 보다가 자빠질지도 몰라요.”

젠이 함께 가져온 상자를 열었다.

“이건 빌려 드리는 거니까 절대 팔지 말라고 하셨어요.”

안에서 보석이 여러 개 달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진주 귀걸이 한 쌍이 나왔다. 바이올렛이 보석들을 걸친 후 젠이 바이올렛의 머리칼을 풀었다.

검은 드레스 위로 결 좋은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젠이 고민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머리를 어떻게 할까요?”

“올릴까?”

“묶어서 안으로 말아 넣죠? 단발처럼. 그 위에 화려한 헤어밴드를 해요.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가수들처럼요.”

“그렇게 할 수 있니?”

“저만 믿으세요.”

젠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때 제집처럼 뛰어 들어온 리나가 멈춰 섰다. 아이가 차려입은 바이올렛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바이올렛, 공주님이었구나?”

그러자 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응? 어떻게 알았니? 비밀인데.”

그 말에 리나가 깜짝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웅얼거렸다.

“꼭 비밀로 할게요!”

“아유, 착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리나가 바이올렛을 보며 말했다.

“사실 조금 의심하긴 했어. 역시 공주님이었구나.”

이어서 리나가 바이올렛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바이올렛. 공주님은 꼭 하얀 말이 끄는 마차를 타야 해.”

“그러니?”

“응. 꼭이야.”

요즘 애들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는 것일까. 바이올렛은 그리 생각하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고, 리나는 여기서 구경했다가 저기서 구경했다가 하며 바이올렛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젠은 계획했던 대로 바이올렛의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기가 막히게 묶고 안으로 말아 넣어 단발머리로 만들었다.

거울을 본 바이올렛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신기해라. 재주도 좋구나.”

“이거거든요, 제가 원한 머리.”

단발에 알록달록한 보석이 박힌 헤어밴드를 하니 당장이라도 음악회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바이올렛이 무척 만족하며 기다리는데 윈터가 문을 두들겼다.

바이올렛이 걸어가 문을 열자 윈터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머리 잘랐어?”

그의 굳은 표정에 바이올렛은 조금 놀려 주고 싶어져 태연하게 말했다.

“네, 슬슬 더워서요.”

“나한테 좀 물어보지.”

“왜요. 자르지 말라고 하려고?”

“아니.”

윈터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관심 가지려고.”

“네?”

“전에 당신이 처음…… 죽기 전에 머리를 잘랐잖아. 그때 나한테 물어봤었잖아, 머리 자를까, 하고.”

“그랬죠.”

“그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 게, 나는 정말 당신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알아서 하라고 한 거였는데,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욕을 하더라고. 그게 관심 없다는 뜻이지, 무슨 뜻이겠냐고.”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난 당신이 단발이든 긴 머리든 원하는 거면 뭘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어. 그래도 이번에 혹시 내 의견을 물어봐 준다면 성의껏 대답할 생각이었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라고 할 생각이었는데요?”

그러자 윈터가 제 키보다 조금 낮은 문틀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꽤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자와의 대화의 기술을 좀 배웠어. 말해 봐.”

“음, 슬슬 더워지는데 머리를 좀 자를까 봐요.”

“그렇군. 더워지니 자르는 게 시원하겠지.”

그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하지만 난 긴 머리가 좋은데.”

“그래? 나도 그런데. 하지만 더운 건 큰 문제지.”

“높이 묶으면 되잖아요.”

“그거 시원하고 귀엽겠군.”

윈터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꾸하는 통에 결국 바이올렛이 명랑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게 뭐예요, 결국 당신 의견은 없군요?”

“난 정말로 다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면 관심 없어 한다고 할 거잖아.”

“그래도 긴 머리가 더 좋죠?”

“아니. 자르고 나니까 단발이 더 좋아.”

“이거 자른 거 아니고 안쪽으로 밀어 넣은 거예요.”

“진작 말하지. 그럼 긴 머리.”

윈터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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