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63화 (63/176)
  • 63화

    바이올렛이 가여워하며 토닥거리자 하옐은 정말로 울먹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놀러 와 차를 마시던 핌이 의자를 당겨 주었다.

    “하옐 씨, 이리 와서 앉아요. 직장이 많이 힘든가 보네.”

    “상사가 너무 힘듭니다…….”

    “에그, 불쌍해라. 그 성질머리를 여태 버틴 게 대단하지.”

    핌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핌도 같은 상사 밑에서 일한 것처럼 대화하고 있다고 잠시 생각했다. 아마도 핌이 좋은 사람이라 깊이 공감해 주는 것이려니, 바이올렛은 생각하며 일단 시원한 음료를 내주었다.

    하옐이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푹 한숨을 쉬었다.

    “작은 마님, 잠깐만 대표님 좀 봐 주시면 안 됩니까? 두들겨 패도 좋으니까……. 아닙니다. 작은 마님께서 희생하실 필요 없죠. 대표님도 지금쯤이면 아마 숙취 때문에 어제 그렇게 술을 드신 걸 후회하고 계실 거예요. 분명히.”

    “술을 얼마나 마셨는데 자네에게 이렇게 걱정을 끼쳐?”

    “그러니까요! 혼내 주세요. 꼭. 말로 아주 두들겨 패 주세요.”

    훌쩍거리며 말한 하옐이 보살핌을 받으며 차차 안정을 되찾았다.

    *

    윈터는 심한 숙취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 주량이 아무리 끝이 없어도 죽자고 마시는 술에는 버티지 못했다.

    해가 눈부셔서 팔로 눈을 가리고 누워 있는데 침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어?”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물었다.

    “나인 줄 알았어요?”

    “당신은 움직일 때 들리는 소리가 다른 사람과 달라.”

    “그래요? 어떤데요?”

    “거만하지.”

    윈터가 말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젠장,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네.”

    “자업자득이에요.”

    “화내러 왔어?”

    “화내러 왔어요.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바이올렛은 나름 훈계하려 했으나, 윈터 입장에서는 보고 싶었던 아내가 나타나 주었으니 앞으로 바이올렛이 저를 안 만나 줄 땐 진탕 술을 마셔야겠다는 나쁜 버릇만 들게 만들었다.

    윈터가 상체를 일으키자 바이올렛이 그의 목을 보며 놀라서 물었다.

    “목에는 무슨 상처예요?”

    그러자 윈터가 제 목을 손으로 만져 보며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무슨 상처?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안 나는데.”

    “뭐라고요? 당신 정말!”

    “아, 따가워.”

    제가 다쳐 놓고 짜증을 내던 윈터가 손을 뻗어 바이올렛의 팔을 움켜쥐었다.

    “당신이 옆에 누우면 왜 다쳤는지 기억이 날 것도 같군.”

    “그게 말이 돼요?”

    “되지, 왜 안 돼. 아, 그나저나 일주일 뒤에 오픈 파티인데 참 일찍도 오시는군.”

    “내일 오려고 했어요.”

    “그러시겠지.”

    바이올렛이 윈터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가자 윈터가 뒤로 물러났다.

    “다친 곳을 왜 만져. 당신 남 괴롭히는 취미 있어?”

    “좀 자세히 보려고 그래요.”

    바이올렛이 포기하지 않아서 윈터가 결국 그녀의 팔을 붙잡아 침대로 끌어 내렸다.

    “당신이 봐서 뭐 하게. 치료는 의사가 하잖아.”

    그러자 바이올렛이 침대 아래 제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발등이 덧났는지 걷는 게 힘들어요.”

    “뭐? 어디 봐.”

    “당신이 의사예요?”

    “…….”

    바이올렛은 윈터가 일반적인 성숙한 어른들과 달리, 달래기만 해서는 컨트롤 할 수 없는 남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역지사지로 윈터가 드물게 얌전해지자 바이올렛이 그제야 채찍을 넣고 당근을 꺼냈다.

    “상황을 알았으니, 당신이 내 부정을 의심했던 일은 용서할게요. 당신도 피해자니까.”

    “……그래?”

    “네.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잘못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 충분히 화를 낸 것 같으니까.”

    순식간에 입꼬리가 늘어난 윈터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내 아내가 왔는데 다과도 안 가져오고 뭐 하고 있어!”

    “예, 예! 대표님!”

    밖에서 누군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윈터가 제 성질머리에 같이 움찔거리는 바이올렛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안 그래도 당신 오픈 파티에 입을 드레스 골라야 하는데 마침 잘 왔군.”

    “네에? 오픈 파티 가야 한다고 나에게 말도 안 했잖아요.”

    “지금 말했네.”

    윈터는 어쩐지 숙취까지 싹 가시는 기분을 느끼며 바이올렛을 끌고 침실을 나서면서 말했다.

    “청색으로 하자.”

    “흰색이 좋겠어요. 파티가 열리는 1층은 흰색이 많으니까.”

    “청색.”

    “흰색으로 해요.”

    “청색이 좋다니까. 주인공 같잖아. 주목받기 싫어서 보호색이라도 띠겠다는 거야, 뭐야.”

    보호색이라는 말이 좀 충격이었는지 바이올렛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할 말 많은 눈빛에 윈터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찡그렸다.

    “뭐 어떡하라고. 내 돈으로 사는데 의견도 못 내?”

    “의견을 내는 게 아니라 고집부리는 거잖아요.”

    “공주님께서는 하나도 고집 없는 줄 알아? 당신도 아주 고집불통이야. 세상에 당신만큼 나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아?”

    “내, 내가 못됐다고요?”

    바이올렛이 너무 어이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행히 두 사람이 싸우기 전에, 직원 하나가 트롤리를 가져와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를 내려 주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한 모금 마셔 보니 적당히 우러나 즐기기 딱 좋은 상태였다.

    “맛있네요.”

    바이올렛의 감상에 윈터가 삐딱하게 뒤로 기대앉아 말했다.

    “당신 하녀가 당신이 좋아하는 차 온도를 알려 줬거든. 그 외에도 머리를 묶을 때 잔머리 없이 깔끔한 걸 좋아한다든지, 옷은 색은 상관없지만 형태는 단정한 걸 좋아한다든지. 그런 걸 알려 주더군.”

    바이올렛이 물끄러미 윈터를 보았다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고개를 거의 숙이지 않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느낀 바가 있었는지 윈터 역시 나름 반듯한 자세를 찾아 앉았다.

    바이올렛은 그런 윈터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 3년 동안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것들, 서로를 배웅해 주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시간이 나면 마주 보고 차를 마시는 소소한 일상.

    바이올렛이 언제나 바라고, 이루지 못해 가슴이 아파 밤잠을 설쳤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게 연애인가,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처음으로 윈터 블루밍과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다 사라지지 않은 숙취에 비스킷에는 손도 대지 않은 윈터가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슬슬 재산 분배를 시작하지.”

    “괜찮아요. 필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많이 줄 생각도 없어.”

    “난 이대로도…….”

    “이봐, 공주님.”

    윈터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왜 받아야 하는지 알아? 나와 3년을 산 유명인이기 때문이야.”

    “무슨 의미죠?”

    “당신과 똑같은 상황의 다른 여자가 있다고 생각해 봐. 그럼 그 여자들도 당신 이야기 들먹이면서 재산 분배를 못 받게 되고 만다고. 내 말이 틀려?”

    “…….”

    윈터는 바이올렛이 성격상 제 유산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그가 골머리 썩으며 찾아낸 이유였다. 바이올렛이 재산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 이유.

    “그래, 당신은 선택권이 있을 수 있지. 도와줄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런데 이런 상황의 다른 여자들을 생각해 봐. 당신처럼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선례가 된다고.”

    바이올렛의 창백해진 얼굴에 윈터는 제 말이 확실히 먹혔음을 알았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요.”

    윈터는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지만 필사적으로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제부터 알면 돼.”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업가라고 생각했어요. 내 선입견이었네요. 미안해요.”

    아니, 나 내 잇속만 챙기는 사업가 맞는데, 공주님…….

    윈터는 뒷걸음질로 쥐 잡은 기분이 되었지만 감탄하는 바이올렛의 눈빛에 우쭐해져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이지. 난 굉장히 사회적인 공헌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건 너무 거짓말이라 양심이 찔렸다. 윈터가 왠지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여전히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바이올렛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몰랐네요. 좋아요. 그럼 적극적으로 재산 분배에 응하겠어요.”

    “그거 무섭군.”

    “무서워할 정도는 아닐 거예요.”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진지했고, 윈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족들의 이혼은 상당히 복잡하더군. 서류에 도장을 찍어서 제출한 후에도 어마어마하게 긴 절차가 있다고.”

    “네. 알아봤어요.”

    “그럼 우선 이혼을 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해야겠지. 나와 반드시 이혼해야 하는 이유.”

    “이유라면…….”

    “하옐에게 얘기한 거 들었어. 내 옆에 오고 싶지 않아 했다며. 여기가 행복하다고, 내 옆으로 오면 불행해질 것 같다고 했다며. 그런 거 적당히 써.”

    윈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으나, 바이올렛의 입으로 이 이야기를 들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 제 입으로 먼저 말한 것뿐이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당신 곁은 당신 하나만 얘기한 게 아니잖아요. 상황을 말한 거예요. 내 가족과 당신 가족과 돈, 사교계 이런 온갖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

    “나는 여전히, 내가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다시 우울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당신과 이혼하고자 하는 거지만. 그런데도.”

    바이올렛은 여전히 윈터의 손에 끼워진 저와의 결혼반지를 무심코 바라보며 씁쓸히 중얼거렸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 직전에, 시장에서 당신 목소리를 들었어요. 당신은 그날 내가 거기 있는 걸 몰랐겠지만.”

    “…….”

    “자신이 없는데. 당신이 미운데. 그런데도 당신 목소리가 어찌나 반가웠는지.”

    그녀의 말에 체념과 설움과 분노로 복잡하던 윈터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랬어?”

    “네. 반가웠어요.”

    “얼마나?”

    “그게…… 중요한가요?”

    “당연히 중요하지. 내가 얼마나 반가웠는데? 자세히 설명해.”

    윈터는 울던 어린애에게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쥐여 준들 이렇게 휙 기분이 바뀌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손바닥 뒤집는 것도 이보단 어려우리라. 그는 바이올렛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기분이 급변하고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원래도 다혈질인데 그녀가 더욱 부채질하는 기분이었다.

    윈터가 계속 추궁하려는데 문을 다급히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님! 작은 마님!”

    윈터가 혀를 차며 걸어가 문을 열자 하도 뛰어 호흡이 거칠어진 하옐이 호외 한 장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두 사람에게 수도에서 사흘 전 발행된 호외를 내밀었다.

    “바, 방금 우리 회사 크루즈가 도착했는데요! 거기 함께 온 라크라운드 신문에 이런 발표가!”

    하옐이 드물게 흥분해서 소리치자 윈터가 먼저 받아서 읽고 혀를 차며 바이올렛에게 종이를 넘겼다.

    신문에는 라크라운드에서 가장 힘 있는 가문인 헤스턴 변경백 가문의 가주가 바뀌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헤스턴 변경백 가문의 가주가 바뀌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으므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북부 변경을 지키는 위대한 가문으로서 라크라운드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이 헤스턴 가문의 발표였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3